13화
거처로 돌아오는 길은 수월했다. 그들을 위협하는 괴물도 창을 들이미는 원주민도 없었다. 위험이 제거된 습지에는 오히려 조용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수지는 지는 해를 보면서 고단했던 하루를 위로받을 수 있었다.
“카리반.”
렉스는 낙조가 지는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침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강물은 햇빛을 반사해 금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화사한 풍경 속에서 습지라는 것을 알리는 어두운 수풀만이 풍경 사이사이 녹색으로 빛을 발하는 게 기이하다고 할까? 수지는 그제야 그 단어가 이색적인 자연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무서운 듯 아름다운 광경을 아울러서.
‘그하고도 잘 어울리는 단어야.’
수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여느 때처럼 무정해 보였다. 그 어느 것에도 감흥이 없다는 듯이. 그러나 수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살짝 어두운 눈이 밝아져 흥미 있다는 듯 반짝여 온다. 수지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특별하게 봐 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처럼 무정한 남자가 그러하다면 더더욱.
수지는 자신을 더 특별하게 각인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야 자신을 소개했다.
“이수지.”
사내가 빤히 본다. 수지는 다시 한번 반복했다.
“수지.”
알아들은 걸까. 왠지 사내는 물끄러미 보기만 한다. 수지는 그의 빤한 응시에 민망해졌다. 무언가 잘못 말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발음이 이상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수지라는 음절이 이곳에선 아주 엉뚱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쳐다보면 기분이 이상하잖아.’
수지는 자신을 가리킨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그는 집요하게 수지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지는 강물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움찔했다. 남자의 얼굴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맞닥뜨린 것처럼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수지는 그가 자신을 소개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그에게서 평범한 걸 기대하면 실망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수지는 아까의 오싹했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게 누가 한 짓인지도 떠오르자 몸이 절로 떨려 왔으나 왜곡해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자신을 구해 주려고 위험을 무릅썼다. 괴물들과 악의가 넘치는 세상에서 자신을 돕고자 과감한 짓을 서슴없이 했다. 이 이상한 늪지에선 일반적인 용기와 수단으론 자신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힘과 의지가 있어야 남을 구하지.
수지는 떨렸던 순간을 상기했다. 그의 등장은 그녀의 뇌리와 가슴에 강하게 남겨져 있었다. 억지로 지우거나 흐릴 수 없다는 듯이.
어느새 강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듯 배가 숲 어귀의 무성한 수풀에 둥실둥실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수지라.’
렉스는 배에서 내려 덩굴 숲을 걸어가면서 그녀가 알려 준 이름을 곱씹었다. 이수지. 생각하면 할수록 이름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뜬 이후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뇌가 벌써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뇌가 수지 같은 특이한 여자를 잊을 리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의식으로 존재할 때 그녀를 알았다는 건데.’
그는 마나의 육체로 깨어나기 전에 정신 형태로 존재했었다. 연금술사들이 실험을 거듭하여 마나로 조형된 완벽한 육체를 만들었고 그 안에 렉스의 의식을 넣었다.
연금술사들은 그것을 세기의 발명이라 외쳤다. 세상을 바꿀 혁신이라고 떠들었다. 육체와 정신을 조합한 사례는 그전에도 있었으나 그 누구도 렉스처럼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성공한 건 렉스가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조합 뒤 정신이 미쳐서 날뛰거나 육체가 정신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만큼 육체와 정신을 건드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으며 실패를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 뒤 렉스 같은 인간을 만드는 시도가 이어졌으나 다시 성공하지 못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만큼 렉스의 성공 사례는 연금술사들이 하나하나 파헤쳐 그 과정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귀중한 것이었는데, 렉스는 그 실험 자료를 봤으면서도 무의식 상태일 때의 기록은 보지 못했던 걸 떠올렸다.
어쩌면 수지는 그때 들었던 이름으로, 그가 의식하지 못한 채 기억하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는 그녀는 내가 렉스로 존재하기 전에 알았던 여자일 수도 있다는 건가?’
무의식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연금술사들은 시원스럽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건 ‘원래부터 존재했다’라는 모호한 문장뿐이었다. 따라서 렉스는 연금술사들이 죽은 자의 몸에서 의식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마나와 수식을 사용해 연금술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자의 의식을 현재에 붙드는 정도일 테니까. 의식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은 그들로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데.’
수지가 자신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무의식의 그가 그녀를 알려면 그녀가 이쪽 세계의 사람이어야 이야기가 되니까. 그렇게 렉스의 머리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떠올랐을 때 수지는 거처를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살아 돌아왔다. 낡고 허름하지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안개를 뚫고 들어가자 엉망이 된 실내가 나온다. 수지는 서둘러 정리를 했다. 원주민들이 건드리고 뒤진 곳을 청소하다가 문득 다 식어 버린 그릇의 음식이 보였다. 수지는 그걸 버리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가 든 접시를 가져갔다.
“뭘 만든 거지?”
냄새는 고소했다. 아직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렉스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냄비를 바라보았고 렉스는 그녀가 깨진 알로 요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몫인가?”
반쯤 남겨져 있는 음식. 렉스가 자신을 가리키자 수지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렉스는 그걸 손으로 긁어 입에 밀어 넣었다. 딱히 못 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선 제대로 된 음식은 귀하기도 했고 제 몫으로 배정된 걸 거부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군인다운 판단과 실천력이었지만 놀란 것은 오히려 수지였다. 혹시 상한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에 그가 한입에 털어 넣자 수지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으나 그는 이미 다 먹고 난 뒤였다.
“맛있는데? 잘 만들었네.”
렉스는 착실하게 칭찬했다. 수지는 그가 혀를 날름하면서 입꼬리를 올리자 왠지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별거 아닌 행동도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사내였다. 수지가 그의 팔을 놓자 이번엔 그가 수지의 팔을 잡아 왔다.
“다친 데 치료해야지.”
“?”
수지는 그가 손목을 보자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가시 때문에 아프긴 했어도 피는 더는 나지 않아서 상처만 잘 아물면 될 거 같았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란 의미로 고개를 저었더니 사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고통을 참는 데 익숙한가? 그렇다면 좋아할 일이 아니야. 고통의 강도가 강해져도 참는 데 익숙해져서 더한 고통도 참아 낼 테니까. 그걸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세상에 수두룩하거든.”
렉스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했다. 아무리 그라도 적과 싸우다 보면 부상을 얻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투에 특화된 인간답게 그는 고통을 잘 참았고 그때마다 더 강한 적과 맞붙게 되었다. 그러면 더 큰 고통이 수반되었고, 더 참아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의 상관들은 렉스가 참는 것을 당연시했다. 팔다리를 잃을 정도로 큰 부상이어도 나중에는 마나 보충을 하면 된다고 가볍게 넘겨 버렸다. 렉스가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물론 수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렉스는 그걸 알면서도 충고한 자신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래도 그가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은 느껴져서 그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그에게 순순히 맡겼다. 잠시 후, 그는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펼쳤다.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 회색 가루라는 것을 발견하자 수지의 고개가 갸웃했다.
‘저걸로 뭘 하려는 거지?’
수지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반짝였다. 렉스가 회색 가루를 손안에서 움킨 뒤 수지의 손목에 뿌렸다. 발목에도 뿌렸다. 그러자 연한 빛이 나더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완전히 아물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반적인 속도는 아닌 게 분명했다. 수지는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몰라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저 뛰어난 약초 가루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특별한 힘?
“마법의 가루야. 가공하면 효과가 더 좋지만 지금은 어려우니까.”
“마법의 가루?”
수지는 그가 뱉은 낯선 단어를 따라 했다. 렉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세상에는 없는 것일 거야.”
아마도. 라고 중얼거리며 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비가 오는지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지금은 얕은 비였지만 기후변화가 들쭉날쭉한 이곳에선 언제든 장맛비처럼 쏟아부을 수 있었다. 렉스는 그전에 지붕을 보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먹을 것을 구해 오지.”
빨개진 수지의 얼굴을 보며 렉스가 말했다. 그가 나가려고 하는데 그의 옷깃을 잡는 손이 있었다. 돌아보자 수지가 그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