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9)화 (9/163)

09화

사내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찾지 못했어.”

[당신이요? 흐음. 의외군요. 당신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존재라니. 이 왕국에서 그럴 사람은 몇 없을 텐데 말이죠. 역시 위험한 존재가 맞나 봐요.]

“그걸 묻기 위해 연락한 건가?”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지 궁금했어요. 애타게 연락했던 건 당신이 걱정되어서였고요. 저번에 마나 보충이 충분하지 않았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마나가 충분하지 않으면 당신의 육체는 서서히 무너져요.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서부터 심장으로 점차 육체가 굳어 가죠.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선 마나 보충은 반드시 주기적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져야 해요.]

“다 아는 걸 설교하기 위해 연락한 건가? 이제 몇 안 남은 버드까지 보내면서?”

사내는 그 말을 하면서 버드의 철판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안이 녹슬었다는 의미였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마도 시대에 사용했던 버드들은 중요한 기관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한때는 죽음의 새가 떴다고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상 기계였지만 이제는 사람의 눈을 피해 연락하거나 정찰할 때만 사용될 정도로 활용 가치가 낮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희소성은 더 커졌다. 수리할 기술이나 보존할 기술이 현시대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고물로 취급받아야 하는데 인간들의 욕심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새.

사내는 버드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갈 때는 광견병에 걸린 거 같았고.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우리 왕국의 보물이니까.]

고장 난 새라 그런지 로리엔의 목소리도 괴상하게 비틀어졌다. 렉스는 그 목소리야말로 지금 대화에 걸맞다고 조소하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왕국의 쓸 만한 개, 혹은 무기라고 칭하는 게 정확하겠지.”

[렉스, 비꼴 필욘 없잖아요. 혼자 당신을 그런 곳에 보내서 안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로리엔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연기가 아니었다. 로리엔은 그의 연락책이 된 후로부터 그의 보호자인 양 굴고 있었다. 렉스는 측은한 표정으로 떠들고 있을 로리엔을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습윤하게 젖어 있었다.

[당신이 강한 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강한 만큼 저의, 왕국의 도움이 필요해요. 사소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에서부터요. 그런 걸 못 챙길 테니까.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따뜻하고 감상적이나 허황하고 재수 없다. 렉스는 딱 정의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자신을 위하는 척하는 소리를 더 듣기 싫었다.

“현재 안드라스 제국의 동향은 어떻지?”

[다행히 조용해요. 아니 여유가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죠. 당신이 무너뜨린 성을 수리하느라 한동안은 온 신경이 그곳에 쏠려 있을 테니까요. 그들이 전쟁 병기를 개발하는 실험실을 부숴 버렸으니까 당분간은 그 피해를 복구하려고 우리를 조사할 여력이 없을 거예요.]

로리엔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목소리에선 탁월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적국이 아끼는 기지를 파괴한 게 무척이나 기쁘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한 건 렉스였지만 협조자이자 연락책으로 로리엔은 제 본분을 다했다는 사명감을 넘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활력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함께하면서 이룰 일들을 생각해 봐요. 앞으로 얼마나 더 위대한 일을 하게 될지 기대되지 않아요?]

“전혀.”

렉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로리엔은 조금 웃고 말았다. 그라면 그렇게 대꾸할 거라 생각했다.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쁜 것은 그가 자신을 속이며 감정과 말을 꾸며 내는 것이다. 이런 솔직함은 친근함과 호감을 키울 뿐이다. 그가 자신에게 곁을 주고 있다는 확신을 키우면서.

[렉스, 전 알아요. 당신이 우리 왕국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걸요.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이야기해요. 아니, 도움이 필요하기도 전에 제가 옆에 있을 테지만요.]

“더 할 말 없으면 이만하지.”

[정말 홀로 괜찮겠어요? 찾는 것이 어렵다면 기사단을 보낼게요.]

“이곳으로 말인가? 살아서 올 수 있는 녀석들로 보내. 거의 없겠지만.”

[윽. 당신 말이 맞아요. 그 섬에서 멀쩡하게 통신에 응답할 사람은 없겠죠. 당신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새로 구성된 기사단이라면 가능할지 몰라요. 그들은 렉스처럼 육체가 마나로 강화된…….]

“끊지.”

[아, 목표를 찾는 것에 성과가 있으면 알려 줘요! 버드에게 마법의 가루를 동봉했어요! 비싼 거니까 꼭 연락할 때 써야 해……]

렉스는 더 듣기 싫다는 듯이 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러자 통신이 끊기며 새가 다시 바보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렉, 렉, 렉…….”

“진짜 미친 새대가리야.”

렉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의 주둥이를 억지로 벌려 그 안에 든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가죽 주머니가 사라지자 빙글빙글 돌던 눈알이 멈추면서 버드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딱딱 부딪치는 부리에선 불분명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통신 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새는 이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렉스는 멀어지는 기계 소음을 확인하며 가죽 주머니를 손바닥에 쏟았다. 회색의 반짝이는 가루. 마법이 온전치 않은 시대에 마법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귀중한 물품이다.

물론 대규모 공격 마법이나 방어 마법은 불가했다. 일상생활을 조금 윤택하게 하는 정도였다. 소소하게는 집안일을 거드는 것부터 거창하게는 해독이나 치료, 통신과 그리고 통역까지.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서 그 활용도가 커진다. 렉스는 가루를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고개를 들었다.

다시 습지의 중심부를 바라봤다. 별 탈 없이 평온하던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지만 변화했다. 렉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가 있을 장소에 누군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렉스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훌쩍 도약했다. 물안개가 그를 쫓듯 치솟았지만 그의 속도와 힘을 따라가지 못하고 금세 무색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이거 놔-!”

수지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마른 장작 같은 몸에는 믿을 수 없는 힘이 숨어 있었다. 사지를 붙든 그 힘이 너무 우악스러워서 수지는 눈가를 왈칵 찡그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수지는 재빨리 눈을 굴렸다. 자신의 몸을 붙든 이가 넷, 날카로운 활을 겨눈 이가 셋. 그리고 창을 든 채 방을 둘러보는 이가 하나. 합해서 모두 여덟이다. 여덟 명의 침입자들은 그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수지는 낮잠에서 겨우 깨서 막 고개를 든 채였다. 그들을 피할 시간 따윈 없었다.

‘이들은…….’

수지는 신음을 삼키며 침입자들을 살폈다. 아래는 원시인들처럼 줄기로 엮은 나뭇잎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어깨에는 천으로 만든 두루마기 같은 것을 허리까지 오게 걸치고 있어서 얼핏 이단 종교의 신도들 같아 보이기도 했다. 수지는 이게 현실인가 눈을 깜박였다. 그때 창을 든 사내가 그녀를 끌고 나가란 손짓을 했다.

“싫어-!”

수지는 몸을 비틀었다. 억지로 끌어내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구속하는 힘은 거세졌다. 단순히 붙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일행 중 하나가 양 허리춤에 찬 나무줄기를 풀어 수지의 양 손목과 발목을 묶기까지 했다. 나무줄기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가여운 피부에는 곧 빨간 피가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읏. 끌려가면 안 돼.’

그러나 아픔보다 무서운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들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눈빛도 버릴 물건을 보듯 차가웠다. 수지는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눈꺼풀은 무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도, 독인가?’

정확히는 정신을 잃는 액이 묻어 있었다. 수지는 앞이 보이지 않자 더욱 두려워졌다. 시야가 멀쩡하다면 기회라도 노려 도망쳐 볼 텐데. 수지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싸한 아픔에 눈이 잠깐 트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지는 대장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무척 익숙하게 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물건을 확인하고 제자리에 돌려놨다.

‘실은 저들의 집인가?’

수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들은 멀리 사냥을 나왔을 때 임시로 머무는 숙소에 들린 것이다. 그들은 안개가 기승을 부리는 이 계절에는 원래 여기까지 사냥을 오진 않지만 근래 섬에 살지 않는 외부인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잦다 보니 일부러 여러 명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왔다. 운이 좋다면 외부인들을 잡아 제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한 명밖에 없어 아쉽군.”

수지를 붙든 이 중 하나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저번에는 두 명을 잡아서 호수의 괴물에게 바쳤다. 호수의 괴물은 두 명을 먹고 나자 배가 불렀는지 한동안 부족민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최소 두 명이 있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살집이 별로 없는 마른 체구의 여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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