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저녁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는 확실히 특이한, 아니 재주 많은, 아니 수수께끼 같은 사내였다. 고깃덩이를 칼로 찢어 조용히 식사를 마친 것과 달리 그는 천장이나 벽에 아무렇지 않게 매달려 구멍 난 부위를 능숙하게 보수했다. 한 손으로 긴 몸을 지탱해 매달리는 것도 대단한데 암벽을 타는 사람처럼 벽과 천장을 뛰어넘어 다니는 것은 더 굉장했다.
‘거미야, 사람이야.’
수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영화에서나 볼 듯한 날렵한 움직임은 그가 있는 곳만 중력이 다른 느낌이었다. 사내는 커다란 체격에도 묘기에 가까운 놀라운 몸놀림을 선보였다.
‘어디 제보하면 취재하러 나올 거 같은데.’
아니지. 자신은 공무원이 될 테니까 저런 사람이 소외되지 않도록 모니터링해야겠지. 수지는 자신의 생각에 웃고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편해졌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그가 고마웠다. 이런 곳에서 함께해 주어서.
‘이상하게 안심이 된단 말이야.’
삭막한 분위기도 오히려 이런 습한 곳에선 장점이었다. 마치 늪으로 빠져 가는 저를 잡아 주는 뻑뻑한 동아줄 같다고 할까. 수지는 제 비유가 재미있어 조금 웃었다. 동시에 잠이 몰려왔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귀에서 기분 좋게 깊어 간다. 불을 좀 더 피워 놓아야 할 텐데.
‘그도 불을 쬘 수 있도록.’
수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르륵 감기는 눈을 느꼈다. 간신히 불쏘시개로 불덩어리를 휘적거린 수지는 이내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땐 제 세계이길 바라면서.
밤은 몹시도 추웠다. 습지의 바람은 물을 머금어 축축하면서도 겨울의 돌풍처럼 싸늘한 기온 강하를 선사했다. 사내는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괴물의 목구멍에서 빠져나온 소리 같았다. 그 포효 같은 바람을 따라서 벽은 요란하게 흔들렸다.
습지 인간들이 사냥을 위해 임시로 만든 거처답게 벽들은 튼튼하지 못했다. 이대로 두면 거처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흐윽. 안 돼.”
그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떨고 있었다. 가녀린 몸을 애처롭게 웅크린 채로 그녀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래연아.”
누군가의 이름일까.
“…….”
이름이라면 그는 가족일까, 연인일까. 사내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운명의 적수에게도 애타게 찾는 상대가 있는 모양이다. 사내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물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윽고 신경 쓰지 말자며 거처 보수에 나선 사내는 콜록거리는 소리가 크게 이어지자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가까이서 본 여인의 입술은 어느새 파랗게 변해 있었다.
“고집스럽게 입고 있군.”
젖은 옷을 입고 잠들었으니 기침이 나올 만하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그녀의 피부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멈칫하고 말았다.
“독 때문인가?”
낮에 개구리 괴물에게 당한 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사내는 새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변한 그녀의 살빛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이대로 두면 체온 조절이 안 돼 죽을 수도 있다. 사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으음.”
“!”
그때 바로 앞에 있던 그녀의 손이 덥석 그의 팔을 잡았다. 사내는 쳐낼 수 있었지만 쳐 내지 않았다. 습격당한 것처럼 그녀가 잡은 부위가 욱신거린다. 사내는 도리어 뻣뻣해졌다. 곧 작은 입술에서 소리가 빠져나왔다.
“가지 마…….”
아마도 온기가, 자신의 몸에 없는 더운 체온이 좋았을 것이다. 사내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완된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가 제 몸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사내는 관자놀이로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거칠게 넘기면서 입가를 끌어 올렸다.
“좋아, 먼저 원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사내는 짓궂게 대꾸하면서 수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나무 침상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의 검은 눈빛이 번쩍였다. 아래까지 모두 벗은 사내는 살짝 마른 느낌이 드는 훤칠한 몸을 그녀의 옆에 뉘었다.
그러고 나서 두 팔로 여인을 꽉 끌어안자 신음 같은 소리가 빠져나왔다. 여인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변한 여린 몸을 끌어안자 서서히 한기가 옮겨 온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닿는 물컹거리는 감촉을 즐겼다.
보드랍고 유순한 솜털 같은 피부.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온순한 느낌이다. 납작한 배나 그와 대조적인 봉긋한 가슴이나 부드러운 허리의 곡선이나 엉덩이의 굴곡이나 모든 것이 온유했다.
‘이런 죽음이라면 죽더라도 즐겨 볼 만하지 않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사내는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을 이곳에 보낸 연금술사가 알면 기겁하며 당장 죽이라고 하겠지만 이제 와서 그녀를 죽이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려면 애초에 죽였겠지.
‘어차피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모르니까.’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여인의 감촉을 즐기기로 했다. 밤 동안 온전하게.
수지는 나른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었다. 간밤에 잠을 잘 잔 모양이다. 머릿속은 개운했고 몸은 따뜻했다. 기분 좋게 잠이 깬 고양이처럼 목을 움츠렸다가 피려던 수지는 뜻밖의 단단한 무언가를 느꼈다.
“어?”
자신은 누군가의 가슴팍에서 잠든 상태였다. 엎드린 채로 몸의 반이 걸쳐진 탓에 그의 체온이며 피부의 결이며 심장의 박동이며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지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벗고 있지? 생각을 더듬던 수지는 지난 밤에 불 곁에서 잠이 들었던 것을 깨달았다. 몸이 춥고 아프다고 느꼈는데 그가 침대로 옮겨 준 걸까? 아니, 옮긴 건 좋은데 왜 벗은 채로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일까. 수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랫배를 찌르는 그의 남성을 느낀 것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신경 쓰지 말자고 저건 그냥 건강한 아침 현상일 뿐이라고 되뇌었지만 피가 쏠린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숨도 쉬기 어려운 것 같았다. 결국 무념무상이 되지 못한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지고자 팔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왜?”
그때 사내가 눈을 떴다. 까만 눈은 이질적인 생명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밤새 느껴 놓고 도망갈 생각인가?”
“뭐, 뭐라는 거죠? 나, 난 그냥…….”
“내 품으로 파고들었던 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가? 떨어질라치면 날 끌어안았잖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수지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당당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반듯하게 휘어진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 곧은 턱선과 하얀 피부는 어스름에선 식별할 수 없던 강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희끗희끗한 아침 햇살 아래서 보자 까만 머리칼과 하얀 피부가 더 대비되는 사내였다.
‘뭐야, 생각보다 훨씬 젊잖아?’
수지는 그제야 사내의 나이대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많아 봤자 서너 살 더 먹었을까. 그럼에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또래 같지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이 침착하고 차분하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무슨 생각을 하지? 간밤에 느꼈던 것을 떠올리나?”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수지는 멈칫했다. 메마른 입가에 그려진 미소. 이 축축한 공간에선 묘할 정도로 안정감이 있다. 수지는 자신에게 키스할 것처럼 다가온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팔을 뻗고 말았다.
“…….”
“죄, 죄송해요.”
수지가 뺨을 밀어 버린 덕분에 천장의 비틀어진 갈대 줄기 따위를 보게 된 사내는 말이 없었다. 수지는 더듬거렸다.
“가, 갑자기 너무 들이밀어서요. 부담스럽다고 할까.”
뭐라고 변명을 하는 걸까.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는 그녀는 말 많은 연금술사와 달리 거슬리지 않는다. 곁에서 한참을 떠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자신의 뺨을 감싼 손을 쥐었다. 가느다란 손은 보드라웠다. 수지가 움찔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작은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수지는 그대로 그의 가슴에 떨어졌다.
무슨 짓이지? 수지는 욱신거리는 코를 느꼈다. 그의 맨가슴에 얼굴을 부딪친 것도 수치스러운데 그의 몸에 밀착하게 된 것은 더욱 난감했다. 수지는 아래쪽 생물은 느끼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애써 시선을 위로 올렸다.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오래동안 말라 왔던 사막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적극적이지 마.”
수지는 남자를 보았다. 뭐라고 하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경고한다는 건 알겠다. 온기 없는 눈동자로, 정 대신 삭막함만이 가득한 동공으로.
“나는 네가 아는 인간이 아니니까.”
“…….”
어쩐지 수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자의 눈빛이 묘하게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져서 그런 걸까. 수지가 말이 없자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의 벗은 몸을 두 눈 뜨고 쳐다보기엔 아직 지나치게 제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