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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3)화 (3/163)

03화

남자는 그렇게 여자를 구한 이유를 합리화하며 옆에 놓인 물잔을 들어 올렸다. 찰랑거리는 맑은 물소리가 나자 여자의 눈이 움직였다. 명확하게 원한다는 반응. 남자는 그게 재밌어 몇 번 더 물잔을 흔들고는 여자의 마른 입술을 응시했다.

작고 단정한 입술은 가엽게도 버석거리는 나뭇잎처럼 갈라져 있었다. 아마도 지독히 목이 탈 것이다. 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탈수가 일어난 것이다. 남자는 물잔을 다시 여인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아직은 안 돼.”

애타는 눈동자. 사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미소에는 정감이라곤 없었다. 사내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존재였다. 이타심이나 측은지심이 발휘되지 않는 생명. 다른 생명을 효과적으로 해할 수 있는 무기로서 존재하는 인간 말이다. 사내는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독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진 참으라고.”

여자는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사내의 의도를 읽었는지 표정이 뭉개지고 말았다. 코를 찡그리던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의식의 끈을 다시 놓아 버렸다.

사내는 의식이 사라진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죽을 것이다. 이 섬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독성이 강했으니까. 일부 연금술사, 치료사가 봐 주지 않는 이상 살아남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사내는 여자가 이대로 죽는다면 연금술사들에게 그녀의 시체를 던져 주며 비웃어 주리라 결심했다. 그들의 경고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문제는 오히려 살아남았을 때인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문제가 될 것은 미리 없애 버리자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일 뿐, 운명의 적수여서 불쌍하다든지, 곧 죽어야 해서 안타깝다는 감정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내는 그녀를 구조한 것이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죽지 않아서 들고 왔고, 바로 죽지 않아서 독이 빠지는 것을 관찰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물을 주어서 그녀를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내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가 방금 잡아 온 사냥감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

세 시간 뒤 수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갇혀 있다가 나온 기분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오자 멍청하게 바라보고 말았다. 막 가죽이 벗겨져 피가 아래로 떨어지는 짐승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수지는 역한 게 올라와 욱 하면서 고개를 틀었다. 목구멍이, 위장이, 아랫배가 막 꼬여 온다. 바닥을 보며 평정심을 찾으려고 할 때 누군가 말했다.

“깨어났군.”

사내의 목소리에는 의외의 경탄이 담겨 있었다. 수지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허름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인다. 그는 앉아 있었지만 확연하게 키나 체격이 컸다. 웃통을 벗은 채로 손에 작은 칼을 쥔 사내는 뭉툭한 과일을 깎고 있었다.

“그 독은 너 같은 여자가 이겨 낼 수 있는 만만한 게 아닌데. 역시 연금술사들이 말한 대로 범상치 않은 인간이란 건가?”

사내는 칼날에 붙은 과일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수지는 긴장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느꼈다. 사내의 눈빛이나 표정에는 온정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드넓은 모래벌판에 모래알로 조형된 형상 같았다. 그런 퍽퍽하고 강마른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수지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과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 한가롭게 과일을 깎아 먹는 것이 주된 업무 같진 않은데. 수지는 고개를 돌렸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면 평범치 않은 그의 심성을 건드릴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 때문인지 더욱 수지를 응시하고 말았다.

‘저 작은 머리로 열심히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어떤 사람일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겠지. 사내는 수지의 표정과 눈동자에서 그녀가 놀란 상태란 걸 알아차렸다. 그게 흥미롭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들이 말한 대로 자신의 적수라면 자신을 무조건 싫어할 거 같은데. 여자의 태도만 보면 여자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 보였다. 사내는 물론 가르쳐 줄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수지를 쏘아보듯 유심히 살피던 사내가 갑자기 멈칫했다.

“움직이지 마.”

수지는 번뜩이는 눈을 보고 얼어붙었다. 사내는 쥐고 있던 과도를 휙 돌리더니 그대로 수지에게 던졌다. 콱. 깊게 박혀 들어가는 소리에 수지는 눈을 감았다. 아픔은 없었다. 눈을 뜨자 과도가 박힌 게 보인다. 정확히 자신의 옆, 헐겁게 엮은 나무줄기에 노란 전갈하고 함께 박혀 있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지는 그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움찔하며 떨고 말았다. 사내는 가까이서 보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자였다. 체격이 과격하게 우람하거나 두꺼운 것도 아닌데 마른 듯 훤칠한 몸매에서 알 수 없는 중압감이 흘러나와 마주한 자를 주눅 들게 하는 남자였다.

수지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사내는 벗은 가슴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면서 박혀 있는 단검을 빼내고 있었다.

푸욱. 단검이 빠지는 소리가 유독 귓가에 크게 울렸다. 수지는 그가 얼른 떨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내는 물러나지 않고 그녀에게 바싹 붙어 오히려 관찰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아물었군. 신기한데?”

사내의 손가락이 어느새 목덜미에 닿았다. 수지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수지가 놀란 것을 알아차렸는데도 손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수지의 목덜미를 더욱 천연덕스럽게 매만졌다.

“완전하게 새 피부가 돋아났군. 재생력이 엄청난데? 머리 셋 달린 도마뱀처럼 말이야. 그것들은 꼬리나 다리가 잘려도 반나절 만에 회복하거든. 독에 물려서도 웬만해선 죽지 않지.”

젊고 고운 여자를 도마뱀에 빗댄 사내는 그만하라는 듯이 움츠리는 수지를 보면서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수지가 부르르 떨며 노려볼 때가 돼서야 그제야 손을 떼면서 뒤로 물러났다.

수지는 돌아선 그를 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제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방금까지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아무렇지 않게 만져 댄 곳이다. 수지는 그곳에서 뱀이 물었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은 저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치료해 주었다는 것인가? 알 수 없는 말과 불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긴. 방금 전에도…….’

수지는 바닥에 떨어진 노란 전갈을 내려다보았다. 전갈 꼬리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닿은 부위가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독일까. 남자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수지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남은 과일을 한 손으로 쥔 채 천천히 먹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뭇잎으로 엮어진 임시 거처 밖으로 향해 있었다.

어둑어둑하게 물든 바깥세상은 이제 밤의 시간대로 흐르는 듯 사위가 선명치 않았다. 수지는 그를 따라 바깥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물…….”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몸은 수분을 갈구하고 있었다. 수지는 입술과 목을 번갈아 가리키며 사내를 보았으나 그는 냉담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수지는 막막해지고 말았다. 지금 물을 먹지 않으면 속이 불타서 겉까지 바삭해져 버릴 것 같은데. 오만상을 찡그리며 다시 한번 그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물 비슷한 것이라도…….”

제발. 속이 탄다며 가슴을 쾅쾅 치자 남자의 눈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는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독이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하루는 더 기다려야 할 테지만, 못 참겠다는 거지?”

사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과일의 남은 부분을 와작와작 입 안에 가득 넣기 시작했다. 수지는 인상을 썼다. 지금 약 올리는 걸까. 남은 목이 말라서 애가 타다 못해 몸속 장기가 말라비틀어질 지경인데 혼자서 과일을 우걱우걱 씹어 먹다니. 그런데 과일을 입 안에서 우물거린 사내가 걸어오는 게 아닌가. 수지는 그가 자신의 앞에 설 때만 해도 그가 하려는 짓을 예상하지 못했다.

“……!”

그가 뒷머리를 부여잡고 키스를 해 올 때에야 정신이 들었다. 거칠게 부딪친 입술은 아릿한 통증을 남겼다. 꽉 헤집어 머리를 잡은 그는 사정없이 입 안의 것을 수지에게 밀어 넣었다. 수지는 밀려 들어오는 질척한 시큼한 즙에 치를 떨었다.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강력한 악력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느물거리고 축축한 것들이 입 안으로 꾸물꾸물 쳐들어왔다. 그리고 목까지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수지는 급기야 끅끅거렸고 얼굴이 빨개졌다. 사내는 그것을 가는 눈초리로 지켜보면서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이윽고 수지가 억지로 다 삼키고 나서야 떨어졌다. 스치듯 떨어지는 더욱 낯선 혀의 감촉에 수지가 어깨를 떨고 만 건 당연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수지는 안색이 퍼레져서 외쳤다. 입을 막은 채로 소리 지르는 그녀를 보며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목마르다며. 물은 안 되고 이 즙이라면 괜찮겠다 봐서.”

“무, 물어보고 할 수도 있었잖아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데? 예의를 지키 바라나? 이런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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