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37화 (137/138)

137회

epilogue 후일담오늘은 준비한 프로젝트를 프레젠테이션해야 하는 날이었다. 어제 준비를 완전히 끝내고 왔지만 혹시라도 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거나, 예상하지 못 했던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기에 빨리 나가봐야됐다. 정원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준비를 했는데, 나가기 바로 직전에 결국 정원이를 깨워버리고 말았다.

“우웅, 지금 나가?”

“어? 아, 깨웠어? 다시 자. 곧 나갈 거야.”

“으응, 안니. 후아암. 잠깐만 일루와 바.”

정원이가 허우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다 다시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그냥 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서 다가갔다. 시계를 바라보니 조금 빠듯했지만, 이미 나갈 준비는 모두 마쳤으니 잠깐은 괜찮을 것 같았다. 정원이는 쓸데없는 데에서 고집이 세서 내가 나갈 때까지 저렇게 허우적거릴 것 같았다.

아침에 약한 녀석이 뭘 저렇게 용을 쓰고 일어나려는지 모르겠다. 정원이의 코앞까지 다가가자 허우적거리던 손을 내 어깨에 간신히 올려 조금씩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내 뺨에 입술을 한 번, 입술에 한 번, 가볍게 맞추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녀와. 오늘 힘내구.”

“어. 완전 힘난다. 해치우고 올게!”

“어,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나도 정원이의 이마에 키스해주고 일어섰다. 정원이의 입술이 닿은 곳이 화끈거렸다. 아침이라 남아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나고,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원이는 내가 떨어지자마자 다시 베개에 폭 머리를 떨구고, 내가 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거렸다. 집을 나설 때마다 아쉬웠지만, 오늘은 조금 덜 한 기분이었다.

정원이가 매 번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오늘 내게 있어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어서 특급서비스를 해준 것 같았다. 다시금 생각해도 정원이는 아침에 굉장히 약했다. 그래서 더욱 발걸음에 힘이 났다.

정원이와 함께 산지는 한 달 반 즈음 되었다. 정원이와 재회한 뒤에 우리는 바로 결혼을 계획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내려간 김에 정원이네 부모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자 마자 아버님께 멱살을 잡히고 주먹으로 뺨을 맞았다.

“꺅! 아빠! 머 하는데!”

“괜찮아, 정원아.”

“안 괜찮다, 이 빙시야! 아빠 이거 안 노면 내 다신 아빠 안 본데이!”

정원이가 호들갑을 떨며 아버님의 손을 때렸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멱살을 놓으셨다. 멱살이 놓이자마자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따님을 울렸습니다.”

“쯧쯧쯧. 사내 새끼가.”

혀를 차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러나 이 정도에 위압돼서 아무 말도 못할 거였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그 상태로 고개를 들어 아버님을 바라보고 자신감 있게 외쳤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따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건 접니다!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임마, 뭐라카노?”

“하이구야.”

아버님께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니께선 기대가 가득 찬 얼굴로 탄식을 내뱉으셨다. 사실 이때 조금 짜릿했다. 정원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내 소매를 잡더니 내게 조금 머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웅. 내 야랑 결혼할란다.”

“진짜가?”

“어, 진짜.”

아버님께선 나와 정원이를 노려보셨다. 정원이가 내 팔을 좀 더 꼬옥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내 턱을 잡아당기더니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상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아버님께선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다가 입을 여셨다.

“날 잡자.”

“예, 정원이 데리고 올라가서 저희 쪽 어른들께도 말씀 드리겠습니다.”

“머? 니 우리한테 먼저 온기가?”

“예.”

“크하핫!”

그제야 아버님께서 호쾌하게 웃으시더니 내 팔을 잡아 상으로 끌고 가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해가 다시 뜰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 날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정원이랑 일 년도 더 지나고 재회한 그 날이었다. 당연히 둘이서 꽁냥거리면서 보내고 싶었지만 아버님께서 부어주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님께선 나도 꼭 딸을 낳아서 너 같은 놈한테 보내보라고 저주를 날리셨다. 솔직히 그 순간엔 내가 아버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참고로 다음 날 머리통도 깨질 것 같은데, 정원이에게 한참 혼났다.

“넌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니? 보자마자 첫 날부터 술 마시니까 좋아? 응?”

그러면서도 내가 얼굴을 찡그리면 못마땅한 얼굴로 꿀물을 태워다주고, 무릎베개를 해주면서 머리를 쓸어주는 게 정원이의 귀여운 점이었다. 결국 그런 태도에 기세가 등등해져서 정원이 무릎사이에 얼굴을 비비다가 뒤통수가 얼얼해질 때까지 맞았다. 얘가 징징거리는 모습만 보면서 기억이 안 났었는데, 생각해보니 얘도 꽤 한 성질 하는 애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 성질만 늘어가지고는. 못 된 기지배.

그 날로 바로 함께 올라온 것은 아니었고, 내가 먼저 올라와서 약속날짜를 잡았다. 정원이는 회사를 접고 약속 날짜에 맞게 서울로 올라왔는데, 내가 정말 그만둬도 되냐고 묻자 한심한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내가 너 먹여 살릴까? 니가 내려올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보세요, 한강휘씨. 문자에서 잘 나간다고 큰 소리 뻥뻥치더니 나 하나 먹여 살릴 생각은 못 하겠어?”

“이런, 썅. 못할 거 같냐? 좋다, 당장 회사 접고 올라와라. 몸만 올라와! 대신 니 몸은 오늘부터 내꺼다!”

“응, 나 올라가서 직장 새로 구할 거야. 맞벌이 할 거야, 좆까.”

“아니 시팔, 방금까지 나보고 먹여 살리라며!”

그러자 정원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지 어떻게 너한테만 내 운명을 맡기겠니. 사랑하는 남편님 선물 살 비상금 정도는 내 돈으로 벌어야 되지 않겠어?”

“어, 음, 네.”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 선물을 사겠다고 돈을 모으겠다는 소리에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답했다. 그러자 정원이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 멍청아, 생각을 해 봐라. 나야 올라가서 새 직장 구하면 되는 전문직이지만 너는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나은 데 갈 수 있겠어?”

정론이었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정원이는 키득키득 웃더니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눌렀다. 무릎을 굽히라는 소리였다. 얌전히 무릎을 굽히자 정원이는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렇게 말해도 나는 너만 믿고 있으니까, 처신 잘 하라고.”

“……네, 마님.”

“뭐? 풋! 갑자기 뭐래!”

솔직히 이 날부터 정원이에게 잡혀 살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 후 날을 맞춰서 아버지와 어머니께 정원이를 다시 소개시키려고 했다. 당연히 반대를 하겠다고 생각해서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굳게 마음을 먹고 척척 집으로 들어와 부모님께 결혼하겠다고 했더니 두 분의 반응이 너무 담담했다.

“하거라.”

“하렴.”

정원이와 내가 준비했던 수많은 말들이 백지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상황엔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말엔 어떻게 대답하고, 그런 것들이 모두 날아가자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계속 말이 헛돌다가 멍청하게 다시 질문을 했다.

“해도 됩니까?”

“해. 날짜는 언제로 맞출 테냐?”

아버지께서 흔쾌히 수락을 하신 건 둘째 치고 어머니께서도 너무 순순히 승낙하신 것 같아 돌아봤더니 어머니께서 왜 자길 쳐다보냐는 식으로 얼굴을 찡그리시며 말했다.

“난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척 하는 거 두 번은 보기 싫구나.”

“아.”

그 일로 정원이에게 평생 놀림감이 생겼다. 안 그래도 정원이와 헤어지고 나서 끄떡없었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던 터라 정원이에게 단단히 찍히고 말았다. 정원이는 조심스럽게 강휘가 그렇게 청승맞았나요? 하고 물었고, 어머니께선 너 없으면 죽겠다고 밤마다 창가 올라가서 지랄했단다하고 다 일러바치셨다.

그 후로 정원이는 내가 자신에 부탁에 안 된다고 할 때마다(예를 들면 가챠에 월급을 꼴아대는) 짐짓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너와 헤어지고 나서 강해졌어! 약을 먹었을지언정 자살은 시도하지 않았어!”

“씨발!”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은 꺼내지나 말 걸! 아무튼 그 후로 순탄하게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도 가서 신나게 놀았다. 정원이가 아직은 외국인들에게 쭈뼛거리는 것을 손을 잡고 데려가 같이 떠들고, 춤추고, 그러다 호텔에 들어와 편하게 쉬고, 밤새 몸을 섞고, 맛있는 것을 먹고, 다시 몸을 섞고.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바로 집을 구했다. 사실 지금도 정원이가 내 방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정원이에게도 조금 불편하고, 가족들 눈치를 보느라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집을 나와서 정원이와 함께 산지 한 달 반쯤 지난, 즉 결혼식을 한지도 한 달 반쯤 지난 때였다. 결혼식을 하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대형 프로젝트를 맡아 정신없이 일을 했다. 오늘은 그런 프로젝트를 드디어 마치고 오랜만에 한숨 돌릴 날이 온 것이었다.

신혼여행 이후 정원이와 해피 타임을 보내지도 못 했던 터라 쌓여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혼부부답지 못 하게 일만 했던 것이 정원이에게 퍽이나 미안했다. 그래서 집에 치킨을 시켜놓고 제로콜라를 사들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정원이가 반겼다.

“왔어?”

“어, 왔어. 오늘 뭔 일 있었어?”

“어,”

“뭔데?”

“짜잔, 치킨이 왔어.”

정원이가 손을 벌려 자랑하듯이 치킨을 보여줬다. 웃음이 터져서 가볍게 웃고 들고 온 제로콜라를 가볍게 흔들거리자 정원이가 활짝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요, 요, 요, 센스쟁이!”

“내가 한 센스하지.”

“에, 그거 개그 아니지?”

“……아니지.”

“방금 대답 늦은 거 뭐야? 우리 강휘 설마 틀딱 아저씨 된 거야? 서른하나라는 나이를 이겨내지 못한 거야?”

“너도 이제 계란 한, 아닙니다. 다정원양은 겉과 속이 똑같은 젊고 귀엽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다정원양은 겉과 속이 똑같은 젊고 귀엽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좋아. 제로콜라의 얼굴을 봐서 봐준다.”

필사적으로 복창하자 정원이가 피식 웃으며 문에서 비켜줬다. 그러면서도 내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고, 제로콜라를 들고 와서 탁자 위에 치킨을 세팅했다. 방금 왔는지 아직 치킨에 온기가 남아있었다. 경건하게 치느님을 영접하고, 서로 치킨 다리를 잡아서 술잔을 부딪치듯이 부딪쳤다.

“치어스.” “치어스!”

그리고 맛있게 치킨을 먹으려는 순간 정원이가 입을 벌렸다가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다시 한 번 치킨을 입에 넣으려고 했지만 안색이 안 좋아지며 치킨을 내려놓았다. 나는 다리를 우물거리다가 내려놓고 정원이의 다리를 뺏어서 냄새를 맡았다.

“상했나? 아닌데. 괜찮은데? 몸 안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으, 속 메스꺼운데.”

정원이는 제로콜라를 까서 메스꺼운 속을 넘기려는 듯 시원하게 들이키고 다시 치킨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에 데려다가 결국 치킨을 떨어트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보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 역시 굳은 표정으로 탁자에서 일어났다.

“우욱.”

정원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헛구역질은 정원이에게도 내게도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정원이가 입을 틀어막은 채로 굳었다. 점점 표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양 뺨을 한 대 때리고 입을 움직였다. 좋아. 나는 정원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마주보고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일단 화장실로 가자.”

정원이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서 등을 쓸어내 주는 동안 정원이가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며 정원이를 받쳐주었다. 정원이가 헛구역질을 멈추자 내 팔을 부여잡고 나를 돌아봤다. 얼굴이 탈색된 것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고,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또, 또 그런 거면.”

“야, 다정원.”

“으,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응, 괜찮다, 괜찮다.”

정원이를 안아주고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다. 나보다는 정원이에게 더 큰 아픔일 것이었다. 정원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떨었다. 떨림이 멎을 때까지 나는 정원이를 안은 채로 정원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내가 정원이의 아픔을 견뎌주어야 할 때였다. 정원이는 그렇게 한참을 떨다가 약한 목소리로 흐느꼈다.

“이번에도, 그, 그런 거면, 어떻게 해.”

“괜찮아. 요즘에 뭐 두렵거나, 가슴 조이거나, 울고 싶거나 그런 적 있어?”

“어, 없어, 없는데에.”

“내가 저번에 임신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한 달쯤 돼서 헛구역질할 수도 있다 그러더라. 우리 솔직히 신혼여행가서 좀 많이 했냐.”

“으, 응.”

“그러니까 그 때 생겼을 수도 있지. 사실 그땐 나도 못 참겠더라, 하하.”

“으, 바보.”

사실 그땐 아이가 생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엔 철저하게 피임대책을 했지만, 신혼여행을 한 그때만큼은 아이가 생겨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너무 흘러서 넘쳐날 때였으니까. 정원이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나는 부드럽게 정원이의 뺨에 입을 맞추고 눈을 마주했다.

“좀 진정됐어?”

“응. 근데 아직 좀 무서워.”

“그래. 옆에 있어 줄게. 이번엔 아니더라도, 같이 있어 줄게.”

“으, 응. 흑, 아, 이게 아닌데.”

“아냐, 울어도 돼. 무서울 수 있지.”

“으으, 흑, 흐끅.”

오랜만에 정원이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 재회하고 난 이후 씩씩한 모습만 보여서 이런 모습이 다 사라졌을 줄 알았지만, 그만큼이나 이건 정원이에게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겠지. 정원이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훌쩍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떼고 말했다.

“같이 봐줘.”

“그래. 알았어.”

임테기를 들고 왔다. 정원이는 떨리는 눈으로 소변을 종이컵에 담아 임테기를 담갔다.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들어내고 바라보자 선명하게 두 줄이 그어져있었다. 임신이라는 소리였다. 정원이는 눈을 꽉 감고 있다가 실눈을 뜨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으, 마, 맞지?”

“음. 맞는 거 같은데, 음. 그래도 불안하지?”

“응. 흑, 아직 솔직히 무서워.”

“그래. 내일 병원도 가보자.”

“웅. 히잉.”

정원이는 그날 계속 나에게 안기며 불안함을 표시했고, 나는 정원이를 하염없이 달래주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산부인과에 찾아가서 확인을 했다. 검사결과가 나오자 마침내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임신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흐잉.”

의사의 확답을 듣자 그제야 정원이가 긴장이 풀린 듯 어깨가 늘어져서는 훌쩍거렸다. 나는 그런 정원이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러자 정원이가 안겼다. 조금 난처했지만 그대로 안아주면서 의사에게 물었다.

“확실한 거 맞죠?”

“네, 확실합니다. 한 달 반쯤 됐네요.”

“하하.”

역시나 허니문 베이비였다. 축복받은 아이. 우리가 가장 사랑할 때 생긴 선물. 사랑의 결실. 정원이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정원아, 역시 그때 애래. 허니문베이비래.”

“흑, 다행이야아.”

“응, 그래. 다행이다. 어이구, 우리 정원이. 앞으로 더 힘들 텐데, 벌써 울면 어떻게 해.”

“흐잉. 오늘만, 오늘만.”

“그래, 알았어. 오늘만.”

정원이가 칭얼대며 내게 안겼다. 나는 의사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다. 아직 성별은 알 수 없었다. 성별은 더 지나야 알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정원이는 오늘만, 이라는 말을 지키려는 듯 그날 하루 종일 칭얼대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귀신같이 다음 날부턴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생활을 했다. 정원이는 구직에 성공한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임신휴가를 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원이 입장에서도 모든 신경을 사랑이에게만 쓰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사랑이는 아이의 태명이었다.

그 후로 정원이는 모든 행동을 조심히 했고, 아이에게 좋다는 것을 찾아 들었다. 조금 극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원이는 최선을 다했다. 대신 그만큼이나 내가 고생한 것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귤이 먹고 싶소.”

“알았소.”

출장 갔다가 돌아온 날에 돌아오자마자 집을 나가 열려있는 편의점을 뒤져 귤을 사왔다.

“아기 용품을 좀 사야할 것 같은데.”

“그럼 하루 비울게.”

휴가를 내서 정원이를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며 느긋하게 아기 용품을 골랐다.

“오늘은 좀 해주면 안 될까? 안정긴데?”

“혼자 빼. 짐승아.”

“아니, 의사 선생님도 된다고 했어.”

“야, 이 미친놈아! 의사 선생님한테 뭘 물어본 거야!”

안정기 때 하자고 했다가 뒤지게 혼났다. 한 번 쯤은 해보고 싶었는데. 진짜 나 몇 달은 참은 건데. 정원이 사진을 보면서 뽑았더니 결국 정원이가 한심한 놈을 바라보듯이 바라보더니 결국은 한 발자국 져줬다. 하진 못했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우리의 모든 관심이 사랑이에게로 가득 찼다. 정원이는 사랑이에게 신경을 쓰고, 나는 정원이가 신경 쓰지 못한 만큼만 정원이에게 신경을 썼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도 정원이 몰래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8개월이 흘렀다. 정원이의 배가 부풀어있었다. 임신 예정일은 이번 달 마지막 주 쯤이라고 했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일을 하던 중 정원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왜?”

[아흑, 가, 강휘야.]

듣자마자 무슨 일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고통에 찬 목소리. 전화도 겨우 한 것 같았다.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그러나 빠르게 물었다.

“집이야?”

[윽, 어어.]

“알았어, 기다려!”

전화를 끊고 바로 119에 전화를 했다.

“예, 산모가 통증이 와서요, 예. 네, 출산할 것 같아요. 주소는 어디고…….”

말하면서 바로 짐을 챙기고 퇴근을 했다. 내 통화를 들었으니 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아님 말고. 내가 지금 회사 챙기게 생겼냐. 아직 퇴근시간이 아니라 차도가 비어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200을 밟고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자 구급차도 도착해있었다.

“아흐윽, 아으으.”

“정원아! 여보야! 괜찮아?”

“아, 안 괜찮지, 괜찮겠냐!”

“아, 알았어. 힘내. 어? 내 손 잡고. 어. 으악!”

정원이가 세게 내 손을 쥐었다. 손아귀 힘이 이 정도로 쎈 적이 없었던 지라 비명을 질렀다가 다시 정원이의 손을 세게 잡아주었다. 뭔가 정원이의 얼굴을 보며 계속 힘내라는 말을 하며 괜찮다고 다독이는데, 갑자기 정원이가 내 손에서 사라졌다. 분만실에 들어간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발만 동동 굴리며 한참을 서성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가 예상보다 빨리 나온 게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엄마를 그렇게 고생시키고 그러니 사랑아. 그래도 이왕이면 원망하기보다 기원을 하자. 사랑아, 제발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둘 다 건강하게 나와 줘. 제발.

이럴 때 남편이 할 수 있는 게 발을 동동 굴리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씨발. 고통 반만 나한테 줘. 아, 돌겠네. 제발. 제발, 시간아 지나라. 정원아, 사랑아. 힘내, 힘내!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긴 시간이 지났을 때쯤, 내 손톱이 걸레가 됐을 때 쯤 힘찬 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애!

나도 모르게 달려갔다. 정신이 없었다. 유리로 비춰 보이는 정원이가 너무 진이 빠져보였다. 그리고 핏덩이 같은 조그마한 것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정원이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 멍해보였지만, 분명히 입은 웃고 있었다. 곧 나도 그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절차를 뭘 밟았던 것 같은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수고했어.”

“으응, 하아. 으으으.”

정원이의 입이 부르터있었다. 자연분만 시키지 말 걸. 지가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진짜 그러지 말 걸 그랬다. 정원이의 머리는 완전히 땀에 절어있었다. 머리칼을 쓸어주며 웃고 있다가 의사가 내게 사랑이를 넘겨서 나도 모르게 안았다.

사랑이가 꼬물거리는 손에 손가락을 쥐어주었다. 따뜻했다. 사랑스러웠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을 텐데, 우리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사랑이를 바라보고 웃고 있다가, 정원이를 바라봤다.

“고생 많았어.”

“어, 진짜로. 하아, 죽겠다. 진짜.”

“큭큭, 그래. 퇴원하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줄게.”

“너 약속했다아.”

“그래, 쉬어.”

정원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정원이도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랑이를 안은 채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는 친구였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며, 사랑하는 사이였고, 함께 이 아이의 부모가 된 가족이었다.

아직은 조금 모자라지만 나는 더 공부할 것이고, 더 노력할 것이다. 이 관계가 너무나 소중해서,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아끼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랑해, 정원아. 사랑해, 사랑아. 건강하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

정원이가 나를 보며 웃었다. 쉰 소리를 내려다가 결국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나는 애틋하게 정원이를 바라보며 입술 모양을 읽었다.

목, 말, 라. 제, 로, 콜, 라, 사, 와?

제로콜라 사오라고? 미친 거 아니야? 하여간에 옛날부터 분위기 깨는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새어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어쩌겠는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것을. 나는 고개를 돌려 의사 선생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산모가 제로콜라 마셔도 됩니까?”

[작품후기]네, 에필로그 끝입니다. 상상임신을 생각할 때부터 정원이가 아이를 낳는 후일담을 꼭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얘들한테 남은 가장 큰 트라우마고, 해피엔딩에 찝찝한 것이 남아 있는 게 싫었거든요.

여기까지 따라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 Q&A 및 코멘터리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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