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36화 (136/138)

135회

chapter5주소와 날짜가 찍혔다. 대구 동구 동대구로. 이번 주 토요일. 본가로 내려가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장 연락처 옆에 있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직접 정원이를 보고 말하고 싶었고,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도 했다.

전화를 걸어 예약한 후 오랜만에 담당의를 찾아갔다. 내 정신병을 처음부터 진단했던 의사였다. 가서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정신병 진단을 받겠다고 하니 먼저 걱정을 했다. 증상이 악화되거나 그런 것은 없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니 검사를 해주셨다.

며칠 후 다시 병원을 재방문해서 확인한 결과 우려되는 정신질환은 없었다. 나는 검사지를 내려놓고 의사에게 물었다.

“제 정신질환의 원인이었던 친구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정신질환이 다시 생길 수도 있을까요?”

의사는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예. 그럴 수 있습니다.”

의사가 우려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원인이 된 만큼 다시 원인이 된 사건과 비슷한 일을 겪으면 재발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나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나실 거라면 꼭 타인과 한 명 동행해서 만나시는 것을 추천하겠습니다.”

“예.”

결국은 우려된다는 말이었다. 마음에 찝찝한 기분을 남기는 말이었다. 그러나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현재 정신질환이 남아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을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다음 날 정원누나와 약속을 잡았다. 술자리 약속이었다. 그날은 다른 날과 달리 정원누나의 페이스대로 맞춰 술을 마셨다. 정원누나는 연거푸 술을 마시다가 뚱한 표정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어.”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 해.”

나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정원누나도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짠. 술잔이 부딪히고 서로 술을 넘겼다.

“나 정원이 보러 가도 될까?”

“음, 무슨 말이니?”

“말 그대로의 의미야.”

정원누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빈 잔에 술을 따라줬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원이 생각나?”

“어.”

“전처럼 막 미친 듯이 보고 싶고, 없으면 죽겠고 그래?”

“아니.”

“근데 왜 보러 가는데?”

나는 빙긋 웃었다. 이전에 봤던 노을 진 바닷가가 생각났다. 그 때 떠올린 기분을 가감 없이 말했다.

“정원이가 있으면 더 즐거워서.”

“에휴.”

정원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자신의 빈 술잔을 내밀었다. 내가 그 술잔을 가득 채우자 정원누나가 술잔을 들이밀었다. 다시 짠. 정원누나는 빈 잔을 손가락으로 흔들거리며 웃었다.

“잘 다녀와. 내 선물 잊지 말고.”

“정원이 대구 살더라. 뭐라도 하나 사오지, 뭐.”

“그래. 다음에 정원이 데리고 한 번 보자.”

“걔 술 못 마시는데 술 취하면 진짜 귀여워.”

“와, 그거 진짜 보고 싶네.”

정원누나와 한차례 웃고 나서 다시 술잔을 채웠다. 정원이의 술버릇을 얘기하면서, 정원누나의 술버릇을 얘기하면서, 그러다 내 술버릇은 어떤지 아냐며 다시 한 번 웃고, 즐겁게 술잔을 비우면서, 그렇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차를 끌고 올 자신은 없어서 기차를 끊고 왔다. 아직 약속시간까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에 검색을 해서 평점이 높은 미용실을 찾았다. 옷은 예전에 정원이와 첫 데이트를 했을 때 입었던 그 옷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옷을 잘 챙겨 입었지만 그래도 정원이와 다시 볼 날엔 이 옷을 입어야만 할 것 같았다.

미용실에 들어가서 정원이와 처음에 만났던 그때의 머리스타일로 세팅했다. 같은 미용실이 아니라 조금 걱정됐는데, 평점이 높았던 미용실답게 내가 들고 온 사진을 보더니 보기 좋게 세팅을 해주셨다. 왠지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속장소에 나와 자리에 앉았다. 약속장소는 카페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초코렛 프라푸치노를 한 잔 시키고 정원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거웠다. 사소한 것들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꽃이 만개한 것을 바라보며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실실 쪼개다가 정원이를 보는 것은 싫어서 누가 보지도 않는데 헛기침을 하곤 다시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그렇게 5분, 10분, 그리고 30분.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초코렛 프라푸치노가 녹는 것을 보면서 조금 빨리 시켜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들뜬 것 같았다. 카운터에 들고 가서 사과를 하며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며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조금씩 빨대에 입을 대는 빈도수가 늘어났다. 5분, 4분, 3분, 2분, 1분. 50초, 40초, 30초, 20초, 10초, 9초, 8초, 7초, 6초, 5초, 4초, 3초, 2초, 1초. 약속시간이 되고, 정원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조금 늦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버튼을 누를까 고민하다가 다시 내려놨다.

계절이 한주기 바뀔 동안 떨어져 있었다. 잊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와서 조급하기에도 긴 시간이었다. 빨대를 바라보니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괜히 조급한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워서 빨대를 버리고 새 빨대를 들고 왔다. 그리곤 다시 정원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누군가가 내 앞에 앉았다. 모르는 여성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선약이 있어서.”

“강휘……씨 맞으세요?”

웃는 얼굴이 조금 굳을 뻔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 맞습니다만.”

“저 이 핸드폰 번호 주인이에요.”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들며 문자메세지함을 열었다. 그곳엔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확인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난처한 기분이 들어 일단은 미소를 짓고 정중하게 물었다.

“혹시 전화번호가 xxxx-xxxx 맞나요?”

“네.”

“으음.”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던 정원이의 연락처였다. 지우지 않았기에 틀릴 리가 없는, 소중하게 간직하던 번호였다. 그리고 그 순간 기분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정원이는 멍청한 친구가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은 있었지만 그만큼 영악하고, 현명한 친구였다. 내가 부족한 것을 지적해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런 정원이가 연락처를 바꿨다면, 그렇다면 내가 찾아오길 원하지 않는 것이리라. 우리가 각자 서로의 행복을 찾자고, 혹은 자신이 준비가 됐을 때 만나겠다고 그런 메시지를 나에게 남긴 것이리라. 그렇구나. 정원아, 내가 너무 서둘렀구나.

난처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이 눈앞에서 내 메시지를 주기적으로 받았던 여성을 무시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녀에게 큰 민폐를 끼친 것이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전에 사귀던 연인의 연락처가 바뀌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민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 네.”

그녀는 미묘한 태도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실은 내 기세에 눌린 것 일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추가로 말을 이었다.

“앞으론 다신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피해 보상을 원하신다면, 제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충분히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금,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스토커 아니세요?”

“으으음.”

그 질문엔 답하기가 조금 곤란했다. 내가 정원이의 스토커인가? 생각해보면 헤어진 연인에게 주기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다가 덥썩 나온 셈이니까, 그렇게 아니라곤 말하기 곤란한 면도 있었고, 그렇지만 그렇게 질척하게 달라붙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래요…….”

그녀는 내가 대답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조금 질린 것 같은 눈빛을 했다. 아마 믿지 않는 것이겠지. 한숨을 내쉬고 커피를 빨려다가 그녀가 아직 음료를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불편하신 거면 자리 일어나면서 시켜드리겠습니다.”

“흠.”

그녀는 나를 이리저리 탐색하는 듯 했다. 아직도 내가 스토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그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하십니까?”

“어, 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프론트에서 기다리다가 받아서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설렜던 만큼 나는 집에서 조금 더 우울해지겠지. 그렇지만 이 정도라면 약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연락처까지 바꾸면서 마음을 다잡았으니,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정하에게서 특별한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고. 그렇게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하던 와중이었다.

“다정원씨 맞아요?”

“예?”

급하게 뒤를 돌았다. 그녀는 아직도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음 같아선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캐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됐다.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쉰다. 마음이 조급해질 땐 이렇게 해보라고, 주치의는 말하곤 했다. 물론 그리고 나서 약을 먹으라는 것까지 한 세트였지만. 진정이 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찾으시는 분이 다정원이 맞으시냐구요.”

“으음, 예.”

신음을 냈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실 정원이가 말해주지 말라고 했는데. 으. 괜히 매너가 좋아서.”

그녀는 고민을 하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다짐을 한 듯 굳은 얼굴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은 왠지 믿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요.”

“예?”

“폰 번호가 바뀐 건 맞아요. 정원이랑 친해진 것도 그래서 친해진 거고.”

“어, 예.”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한강휘씨가 나오는 거 정원이가 알고 있었어요. 제 핸드폰으로 날아온 거 정원이가 다 봤거든요. 아니고서야 제가 네 달 동안 스토커 문자를 어떻게 참아요.”

“허어.”

“아무튼 다정원씨 찾아온 거 맞는 거죠?”

“큭, 네.”

다정원이 맞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의 우연의 일치였다. 동시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겼냐하면, 정원이가 제 스스로 여자사람친구를 만들었다는 게 너무 웃겼다. 아마 내가 닦달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나아간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정원이는 착실하게 인생을 구가했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입을 가리고 웃었더니 그녀가 내게 물었다.

“뭐 재미있는 거 있나요?”

“아, 죄송합니다, 큭큭. 정원이가 친구를 사귀었다는 게 좀 웃겨서요.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친구, 좀, 서툴잖아요.”

“아, 아아, 그렇죠, 그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음을 참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원이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정원이는 친구가 한 명 생겼고, 그녀의 반응을 보아 꽤나 정원이를 위해주는 것 같은 친구였다. 그걸 안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정원이는 자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보냈다. 심지어 나를 모른 척하라고 그렇게 일러둔 것이었다. 마음을 천천히 정리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원이 소식도 듣고 좋았습니다. 정원이를 찾아온 건 맞는데, 본인이 피하면 어쩔 수 없죠. 수고하세요.”

“잠깐만요.”

자리를 뜨고 일어서려던 내게 그녀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넘겨주었다. 처음엔 자신의 연락처를 넘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받은 종이엔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걸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가 말했다.

“정원이 주소에요. 그, 필요하시면, 한 번 가보시라 구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카페를 나섰다.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길가에 가서 멍하니 종이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정원이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정원이가 잘 산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즐거워했던 것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멍한 기분이었다.

정원이는 연락처를 바꿨다.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나는 이곳에 정원이를 보러 나왔다. 정원이가 함께 있으면 더 즐거우니까.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정원이가 만나기를 원하지 않으니 이 종이를 찢어서 버린다. 내가 만나기를 원하니 이 주소를 찾아간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양 방향의 고민을 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정원이에 대해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검토하고, 또 다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또 고민의 전제가 틀려있었다. 정원이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찾아가자. 찾아가서 정원이가 돌아가라고 하면, 그냥 돌아가자. 음,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하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자. 그래, 그러자. 괜히 또 나 혼자서 결정하지 말자. 다시 고개를 내리고 편의점에 들어가서 제로콜라를 두 캔 샀다. 그리고 한 캔을 바로 까서 마셨다. 쓰고 단 맛이 입안에 돌았다.

“좋아.”

택시에 타서 메모지를 기사에게 넘겨줬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빌라였다. 정원이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조금 치안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도 규모가 조금 작았다. 301호. 3층이었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방금 전에 선택한 게 우스울 정도로 나는 다시 고민을 했다. 항상 나는 고민이 많았다. 한 층을 올라가고 다시 서성이고, 한 층을 올라가고, 다시 서성였다. 그러다 3층에 올라가 다시 한참을 고민했다.

정원이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정원이가 혹시라도 나를 보고 오늘 하루가 기분 나빠질까봐. 아니면 정원이가 아직 나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봐. 아니면 아직은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정원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자. 정원이의 상처가 아물고 정원이가 나를 보겠다고 할 때, 그 때 만나자. 오늘이 끝은 아니니까. 꼭 만나고 싶다면 정하를 통해서 내게 말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러자. 그렇게 뒤로 돌아섰다.

“으잉?”

“움직이지 마!”

경찰? 방범대? 정확히 모르겠다. 경찰복을 입은 두 사람이 계단 아래에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저항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그들은 내 포즈를 보고 바로 뛰어 올라와 나를 붙잡았다.

“아니, 그, 선생님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이 빌라에 거수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서에서 듣겠습니다. 순순히 따라와 주십시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저항을 하지 않자 경찰들도 다시 반 존대를 하며 나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확고했다. 나를 서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였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xx회사 비서과 한강휘씨가 몰래 여성이 있는 주택에 침입하여 뭘 하려고 했다? 이 시대에? 뭘 하려고 하는데! 회사와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겠다며 잠시만 놓아달라고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니, 저 신분도 증명할 수 있고요, 그리고 의도! 의도도 말할 수, 있나? 아니, 아니, 아닙니다. 진짜 오해에요. 저는 진짜 범죄나 그런 게 아니라.”

“알겠습니다. 다음은 서에서 듣겠습니다.”

“아니요, 아, 진짜 안 되는데.”

“잠시만요!”

그렇게 경찰들에게 끌려가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익숙한 목소리. 반가운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정원이가 서있었다. 허겁지겁 뛰어나온 듯 머리가 헝클어져서는, 그리고 머리가 조금 길어서, 당황한 표정으로, 하얀 얼굴로, 숨은 좀 몰아쉬고 있고,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정원이였다.

“걔, 걔! 쟤 남자친구에요!”

“음?”

경찰들이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나는 경찰들을 바라보며 순진한 얼굴로,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말했다.

“저 신분증도 제시할 수 있고, 어, 그리고 진짜 범죄 아니구요, 어.”

“쟤 저랑 어제 싸워서 그래요. 제가 그래서 문 안 열어줬어요.”

“으음.”

정원이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낚아챘다. 눈빛이 조금 사나웠다.

‘이 등신새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경찰들이 서서히 내게서 떨어져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음, 죄송합니다. 신고를 받고 나와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좀 수상하긴 했죠, 하하. 괜찮습니다.”

나는 허리가 꺾어져라 고개를 숙였다. 일반 소시민으로써 경찰에게 잡혀간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패닉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해프닝이 끝나고 경찰들이 가고 나자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했다. 정원이는 나를 쏘아보더니 못 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흘렸다.

“들어 와.”

“어?”

“들어오라고. 여기서 말하면 울려서 옆집에 다 들려.”

“어? 어, 어. 그래. 응.”

어색하게 따라 들어가자 정원이가 호쾌하게 침대에 앉았다. 나는 뻘쭘하게 방바닥에 앉았다. 마치 혼이 나는 것 같은 구도였다. 정원이의 머리가 높이 있었다는 것이 더욱 그랬고, 정원이의 엄한 표정이 그런 생각이 나게 했다.

“찌질한 놈. 겁쟁이. 치킨. 초인종 누르는 법도 모르는 멍청이. 연락도 하나 없는 매정한 놈. 경찰한테 잡혀갈 뻔한 수상한 녀석에 또, 어.”

정원이가 떽떽거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진정이 됐다. 방금 전까지 패닉에 빠졌던 것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빈자리에 다른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정원이는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피부도 여전히 하얗고, 여전히 귀여웠으며, 여전히 프레지아 향기가 났다. 머리가 조금 길지 않았다면 정원이와 헤어졌을 때 그 모습 그대로인 수준이었다.

여유를 찾았더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원이가 서둘러서 나오느라 머리가 엉켜있을망정, 화장을 하고, 옷도 제대로 된 것을 입고 있었다. 아니, 저 옷은 내가 처음으로 사줬던 그 옷이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방 풍경이 보였다. 방은 원 룸이었고, 침대와 컴퓨터 책상이 앙증맞게 있었다. 침대에 보이는 저 큰 인형들이 귀여워서 저게 정원이의 취향이구나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컴퓨터 책상 한 구석에 작은 액자가 있었다. 천천히 일어서서 그것을 집자 정원이가 하던 말을 멈추고 화들짝 놀래며 내게서 그 액자를 뺏어가려고 했다.

“야, 내려놔! 내놔!”

“풋.”

그건 정원이와 사진관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던, 우리가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둘 다 모른 척 뽑았던 사진. 마냥 웃으며,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행복하게 찍었던 그 사진. 내 지갑에도 들어있는 그 사진. 나는 피식 웃으며 정원이에게 액자를 넘겨줬다. 정원이는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숙제는 다 했어?”

“무슨 숙제.”

“자살시도는 안 했지?”

내가 묻자 정원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천천히 액자를 내려놓고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다가, 한숨을 내쉬고,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 죽는다는 소식 안 들렸으니까.”

“칼은 조심했어?”

“조금 베이긴 했는데, 크겐 안 다쳤어.”

“병원에선 뭐라고 했어?”

“상처 안 깊더래. 봐봐, 상처 안 남았어.”

“니 친구 좋은 사람이더라.”

“걔 말고도 한 명 더 있어. 걔도 소개시켜 줄게.”

“남자들은 조심히 만났어?”

“음, 지금 소개시켜주려는 애가 남자인데, 고백한 거, 차고 나서 친구 먹었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뻔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샘솟아 올랐지만 다시금 헛기침을 하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 인터넷에 퍼진 건 잘 견뎠어?”

“너도 알잖아. 이제 대충 잘 섞인 거. 야, 근데 너 목소리 갈라졌다.”

“아오, 야! 분위기 좀 깨지 마, 봐!”

그러자 정원이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주말에 친구들이랑 나가서 놀았어! 혼자서 논 적도 당연히 많았지만! 일은 지금도 하고 있어! 고기는 이제 나도 꽤 잘 구워! 됐어?”

“쓰읍, 후우. 그래. 잘 했어. 잘 했다. 너 잘났다, 이 년아.”

“그래, 나 잘났다! 난 이렇게 잘 살고 있어!”

정원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지 정원이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야. 읏, 어? 너 문자 내 친구한테 보냈더라?”

“그건 어떻게 아는데?”

“너 오기 전에 보내주더라. 후우, 그래서 너 초인종 누르면 문 열어줄랬는데, 어? 끝까지 못 열고.”

“미안해. 고민이 좀 많았어.”

“넌 임마, 시험 불합격이야. 흣.”

정원이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눈썹을 엄지로 누르고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다가 다시 웃는 얼굴로 핸드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 이제는 정신병 약 안 먹는다며. 나도 이젠 안 먹어.”

“어. 잘 됐다.”

“정원이 언니랑 다시 만나는 것 같더라?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친해. 완전 술 친구야. 너도 보고 싶대.”

“외국인들 이랑도 이제 말하고 다니고. 완전 인싸잖아.”

“노력한 거야. 하긴 이제 잘 어울리긴 해.”

“아직 너보다 친구는 더 적어. 근데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야.”

“요 일 년간 만들었으니까. 이해한다.”

“나도 여기서 일 잘하고 있어. 그래도 프로젝트 수고했어.”

“어. 그걸로 나 승진했다.”

“공부는 솔직히 안 했는데, 니 요리는 진짜 수도 없이 먹고 싶더라.”

“지금이라도 말하면 해줄게.”

“너 고백 받은 만큼 나도 고백 많이 받았어.”

“뭐? 몇 번이나 받았는데. 난, 임마 수도 없이 받았어.”

“내가 더 받았어!”

“내가 더 받았다고!”

그렇게 점점 소리가 높아지다가 정원이가 결국 고함을 치듯 소리를 질렀다.

“나도 보고 싶었어, 이 바보야!”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이 멍청아!”

정원이의 핸드폰엔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가 띄워져있었다.

[안녕?오늘은조금잠이안와.사실나고백진짜많이받았어.저번에말한거말고그냥밥먹자고한사람도많았고.근데다거절했다.왜냐고?너때문아니야임마.다정원근데그냥보고싶다]

정원이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나는 정원이를 끌어안았다. 너를 안는 순간 봄날 햇살 같은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은은한 프레지아 향이 났다. 그리운 향기였다. 너를 내가 사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아, 그래. 네게서 나는 프레지아 향기가 그것을 다시 일깨워줬다. 우린 서로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많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정원아 너와 같이 보고 싶어. 너와 같이 하고 싶어. 네가 없어도 나는 이제 홀로 살 수 있어. 다른 사람과도 사랑을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네가 있는 세계가 더 아름다워. 눈앞이 흐려졌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원아.”

“응!”

항상 품에 안고 다녔던 반지를 꺼냈다. 오늘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 문자를 보내던 날부터 항상 준비하던 것. 그것을 꺼내서 정원이의 약지에 끼웠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만큼, 너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웃는 만큼, 너도 웃고 있었다.

“결혼해줘.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해.”

“……나도 그래. 이 바보야.”

우리는 조금씩 강해졌다. 기대지 않아도 서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부족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그때처럼 쓰러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네 곁이 가장 위험했다.

그래서 너와 떨어져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생각이 너무 느리니까, 그렇지만 그만큼 오래 고민할 수 있으니까, 계속 고민을 했다. 네가 없어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여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여유를 쌓고, 나를 구성하고, 나를 세워도, 그래도 너에게 물들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세상은 아름다워서,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너를 만났다. 너와 함께 보고 싶었다. 너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너와 있으면 더 즐거웠다. 그래서 결국 너를 택했다. 친구도 아닌, 내 전부도 아닌,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인 다정원을 택했다.

우리는 껴안은 채로 울면서 웃었다. 불안한 점은 많을 것이다. 흔들릴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기대가며 받쳐줄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그 상태로 썩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주시할 것이다.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조금 떨어져서, 짐짓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야, 제로콜라 좋지 않냐. 신의 발명품이야. 리얼……, 특히 고기나 밥이나, 햄버거 먹을 때 특히 제로콜라가 좋단 말이지. 왜일까?”

“깔끔해서가 아닐까, 끈적끈적하지 않고.”

“큭,” “풋.”

나는 개소리를 씨부렸다. 다정원은 개소리를 받아주며 웃었다. 비닐봉지에서 제로콜라를 꺼내 정원이에게 반을 따라줬다. 그리고 나머지 반을 들었다. 가볍게 잔과 캔을 부딪치며 서로 제로콜라를 마셨다. 나는 이제 제로콜라가 싫지 않다. 아니, 좋아한다. 다정원을 떠올릴 때마다 마셔서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제로콜라를 반만 넘길 만큼 너를 사랑한다. 언젠가 이 잔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나는 이런 방식으로 언제나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작품후기]최종화입니다. 이러니 저러니 우여곡절 끝에 글이 끝났네요... 감회가 되게, 음... 네.

내일은 후일담 격인 에필로그를 연재하며 작품에 대한 코멘터리를 남길 셈입니다. 오늘 새벽 동안 오늘 완결 글 세 편을 좀 고치고요... 네...

작품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다면 다음 화인 질문용 공지에 남겨 주세요. 내일 코멘터리에 추가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점이 많은 글 관심 가져 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다정원 친구 만난 파트 조금 수정 들어갔습니다. 내용상으로 다정원이 친구를 보낸 것이 됐습니다. 문자도 자연스럽게 본 게 되겠네요. 그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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