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34화 (134/138)

133회

chapter5정원이와 헤어지고 다음날은 무단결근을 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서 왜 회사에 나오지 않았냐고 물으셨다. 그제야 정원이와 헤어지고 나서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바라보시다가 일주일 동안 시간을 줄 테니 마음을 정리하라고 하셨다. 무단결근을 해도 잘리지 않는다니. 이사 아들 만만세다.

침대에 앉아 있다가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창문을 열고 아래를 멍하니 바라봤다. 새벽녘 어둠은 내가 창틀 아래를 완벽하게 볼 수 없게 만들었고, 흔들리는 불빛을 담고 있는 어둠이 그렇게 아늑해 보일 수가 없었다. 몸을 던지면 살포시 받아줄 것 같은 욕망에 한 발을 떼고 창틀에 발을 올려놨다가 정원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울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나이 스물아홉을 먹을 동안 채 세 번도 울지 않았는데, 정원이가 바뀌게 되고 나서 만난 일 년 동안 세 번은 족히 더 울게 된 것 같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창틀에 발을 올려놓고 밑을 바라보다가 누나에게 걸렸다. 누나가 호들갑을 떨며 나를 창문에서 끌어내려 내 뺨을 때렸고, 나는 그 상황이 웃겨서 오랜만에 웃었다. 덕분에 정원이와 헤어진 이후 정신과 방문 덕분에 첫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과에 끌려가는 도중 입구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무심하게 내게 정원이의 정신병을 전달해주던 의사의 얼굴이 오버랩 됐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더는 못 갈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토악질을 했다. 그렇게 그 날은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들어와 정원이 얘기를 하셨다. 내가 그렇게 힘들면 정원이와 당장이라도 결혼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 이젠 너무 늦었어요. 어머니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께선 눈물을 흘리셨다. 옆에서 누가 울고 있으면, 울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돌이켜 보면 정원이와 함께 울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자주 울지 않아서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울고 싶을 때마다 정원이가 먼저 울어서 덤덤해졌던 것 같았다. 그렇구나, 정원이는 내가 울고 싶을 때 대신 울어준 거였구나. 아닌가? 아니면 뭐 어때.

핸드폰은 철저하게 꺼 놨다. 핸드폰을 바라보면 정원이의 연락처만 보게 될 것이며, 정원이의 연락처만 보면 통화를 하게 될 것 같았다.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제발 한 번만 보게 해줘, 아니야, 네 목소리만이라도 듣게 해 줘.

구차하게 정원이에게 빌다가 정원이와 연락마저 끊기게 되겠지. 아름다웠던 우리의 이별을 더럽히고 말겠지. 그럼 정원이가 행복해질 때까진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래서 핸드폰은 꺼 놨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애매한 시간이다. 정원이가 없는 일주일동안 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지지리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내가 느꼈던 온기, 향기, 촉감 그런 것들만 그리다가 너와의 시간을 돌이켜보고, 다시금 내 행동을 후회하고,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지냈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은 흐르고 내 휴가도 끝이 났다. 회사에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는데, 놀랍게도 샤워를 한 것도 일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니 꾀죄죄한 병신이 하나 퀭한 눈으로 서있는데 쌍놈도 이런 쌍놈이 없었다. 차를 몰았다간 사고를 낼 것 같았다. 그대로 죽는 건 썩 나쁘지 않았지만, 정원이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견뎌내기엔 아직은 너무 여려서, 아니 여릴 것 같아서 버스를 탔다.

회사에 도착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모두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회사 일을 하다가 부서 밖을 바라봤다. 기웃거리고 있는 정원이가 있을 것 같았다. 홀린 듯 홍보팀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총무과로 돌아왔다. 정원이는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울고 나니 개운해져서 다시금 자리로 돌아와 일을 했다.

의외로 손가락은 타자를 잘 치고 있었고, 막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퇴근 시간이 돼서 인사를 하고 퇴근을 했다. 오늘 하루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역시나 내가 퇴사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과 전체가 숙연해져있었다. 내 눈치를 보는 게 내게도 느껴졌을 정도였다. 음, 빠른 시간 내에 퇴사를 하자. 내일은 인사과에 가서 총무과 인원 좀 한 명 더 뽑자고 건의해봐야겠다. 후임한테 인수인계만 하고 나가자.

그렇게 한 주가 또 흘렀다. 총무과는 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정확히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데 익숙해졌다. 왕따랑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나를 배려하기에 모른 척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내가 총무과 인원들과 친했냐고 묻는다면 조금 애매하지만, 위치가 위치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아들 씹씹쌔다.

주말이 돼서 누나가 다시 정신과에 가보자고 했다. 누나는 이제 매일 밤이 되면 내게 수면제를 넘겨줬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정원이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며 보내는 것에 비하면, 수면제를 먹고 잠든 밤이 조금은 더 나았다. 물론 다음 날 아침에 머리가 울리는 것은 그 조금은 더 나았다는 말을 고민하게 만들었지만. 다시금 정신과에 갔다가 또 주저앉았다. 이번엔 토악질은 하지 않았다.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다.

결국 누나는 가족들과 상담을 마치고 정신과 의사를 집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했다. 돈이 있으니 뭔들 못할까 싶긴 했다. 의사는 내게 몇 가지 검사를 시행했고,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검사를 수행했다.

그렇게 한 주가 한 번 더 지나고 검사 결과가 나왔다. 성격장애에서 의존성 성격장애, 망상장애에 부정망상, 피해망상, 우울장애가 심하고, 불안장애도 일부, 이것도 끝이……, 뭔가 익숙한 검사 결과였다.

“푸핫!”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 완전 다정원 검사 결과랑 다를 게 없잖아? 정신병이 전염병도 아닐 진데 우리는 정신병도 공명하고 있었다. 이게 운명의 붉은 실은 개뿔. 정원이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빨리 헤어지는 편이 나았다. 우리 사이에 애가 있었으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할 정도였다.

의사가 떠나고 난 후 내 인생에 이만큼 약을 먹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약을 먹어야했다. 아, 정신병 약은 정말 최고다. 자아를 구성하는데 자신의 의지니 뭐니 했던 과거의 내 자신이 우스웠다. 인간의 감정은 약 한 알로 모두 제어할 수 있다. 약을 먹고 나는 웃을 수 있었고, 울지 않게 됐고, 난간에 타지도 않게 됐다. 어, 아니, 사실 난간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탄다.

몇 개월이 지나 봄이 찾아왔다. 대한민국은 사계절이 있는데, 어째 봄과 가을이 너무 짧은 것 같다. 지금도 꽃샘추위라는 명목 하에 바람이 추위를 흩뿌리고 있었다. 냉정한 공기가 돌던 겨울이 남긴 한기가 아직도 내 어깨에 스치고 있었다.

몇 개월의 투약을 한 결과 나는 이제 병원에도 내 발로 갈 수 있게 됐다. 왕진이 얼마나 돈이 깨지는지 생각해보면 굉장히 긍정적인 변화였다. 투약도 꼭 먹는 것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게 됐고, 생각보다 버틸 만 했다.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데는 시간이 약이라는데 그냥 약이 약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가끔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허무함이 찾아올 때면 예전에 사진관에서 찍었던 사진을 지갑에서 꺼내곤 했다. 그러면 다시 조금 힘을 낼 기운을 얻었다.

회사에선 굉장히 무난하게 승진하고 있었다. 무단결근을 했던 것을 제외하면 문제를 일으켰던 것도 없고, 오히려 성과는 여러 방면으로 내고 있었다. 총무과를 나와선 비서과로 들어갔는데, 말이 비서과지 아버지 업무를 대신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적이 쌓이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여성들의 대쉬도 받았다. 대놓고 연락처를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식사 한 번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방법이야 여러 가지였다. 모두가 우리 회사에 다니는 사원이라는 게 문제였지. 덕분에 거절을 할 명분도 있었다. 현재 회사 일을 배우느라 너무 바빠서 개인적인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아직 새로운 연인을 맞이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모자랐다. 아마 이 마음의 여유는 평생 채워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술은 정원이와 헤어지고 나서 끊었다. 끊었다기보다 의사가 마시지 말라고 권고했다. 말이 권고였지 경고에 가까운 지시였다. 나도 내 증세가 호전됐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조금 마셔봤는데 바로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곤 다시는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대신 술이 당길 때는 제로콜라를 마셨다. 입안에 화학적인 맛이 쓸고 지나가는 좆같은 맛 덕분에 술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고 꽃놀이를 홀로 나와서 제로콜라나 홀짝이고 있는 것은 무슨 청승인가 싶었다.

요즘 여유가 생길 때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취미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옛날이었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청승맞은 꽃놀이나 즐기고 있는 거겠지. 한기가 꽃을 시샘하는데도 꽃은 만개하고 있었다. 꽃이 만개하는데 내 안에서 졌던 꽃은 아직 피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 역시 너무 감정에 지배된 탓이리라. 새벽도 아닌데 벌써부터 정신병이 도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제로콜라를 마시며 공원을 걸어 나왔다.

여유가 생길 때 안 하던 짓을 하는 이유는 정원이에게 마지막으로 한 당부가 그대로 나에게도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원이에게 잘난 듯이 친구를 사귀라, 바깥에 좀 나가보라, 그렇게 말해놓고 정작 내가 방구석에 쳐 박혀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고 싶진 않았다.

사실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돈 한 푼 없이 전국 여행을 하는 것이었는데 회사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한 달이나 회사를 쉴 수가 없었다. 사실 한 달이나 회사를 쉬려면 어느 시기인들 가능하겠냐 싶었지만.

봄이 지나 여름이 됐다. 여름이 되고 나서 수면제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덕분에 선잠에 드는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잠은 잘 수 있었다. 가끔은 너무 힘들었지만, 그런 다음 날엔 더욱 운동을 했다. 몸이 힘들면 결국 잠이 들게 되어 있었다.

여름이 돼서 가장 신경을 쓴 건 먹는 것이었다. 그간 제대로 안 먹어도 버틸 만 했는데 그러다 결국 회사에서 한 번 쓰러지고 말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몸 관리는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위를 먹은 모양이었다.

그 사건이 있던 후로 다시 맛있는 것들을 찾아다니던 취미를 되살렸다. 더위에 찌들어 입맛이 돌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잘 먹을 수 있었다. 운동을 해서 기초 대사량이 높아져서일까? 아니면 정원이가 남긴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기 때문일까.

여름휴가 시기엔 오랜만에 성규와 서진이를 불러서 놀았다. 얼굴을 보기 전까진 몰랐는데, 지난겨울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성규나 서진이나 내 사정을 알고는 있던 터라 만나자마자 여자 소개를 시켜준다고 그렇게 극성을 부렸다. 나는 지랄하지 말고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자고 하고 여행을 갔다가 본의 아니게 헌팅에 말려들었다. 내가 받은 게 아니라, 성규와 서진이가 나를 끌고 헌팅을 한 것이었다.

셋이 간 여행에서 나 혼자만 빠질 거냐는 말을 듣고 쭈뼛거리며 옆에 있는 둥 마는 둥 서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됐는지 애프터 신청까지 들어왔다. 무안을 주지 않고 빠져나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참고로 성규와 서진이는 숙소까지 걸어 들어왔다. 내가 내뺄 때 차를 들고 내뺐기 때문이었다. 자금 관리도 나였었고.

늦여름이 됐을 땐 해외로 출장을 나갔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꽤나 중요한 출장이었다. 다른 나라 기업과 처음으로 망이 이어지느니 마느니 하는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당연히 내가 주도를 한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를 필두로 하여, 각 부서 과장급들이 진심으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배웠다. 그 후론 어지간한 계약은 내가 하러 다니게 됐다.

출장을 갔을 때 마지막 날 하루가 비었었다. 아버지께선 자신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나보고 이 나라를 체험해보고 오라고 등 떠미셨다. 결국 나왔는데, 하필이면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아 다시 돌아가려다가, 이게 오히려 내가 원하던 무전취식 여행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향신료의 냄새와 눅눅한 공기, 그리고 습한 더위가 나를 덮쳤지만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바디랭귀지를 하며, 저쪽도 나도 서투른 영어를 하며 떠들고, 웃고, 팔고 있던 과일을 받아서 먹고, 갑작스럽게 춤추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나는 이렇게 웃을 수 있었다. 세상이 다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먹던 정신병 약이 반으로 줄었다.

가을이 돼서 서진이에게 연락이 왔다. 정원누나에 대한 소식이었다. 정원누나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나에겐 그냥 전해주는 것이었고, 올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고민을 했다. 마지막에 떠오른 건 정원이의 얼굴이었다. 그러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에 가서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원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조의금을 냈다. 조의금은 꽤 넉넉하게 담았지만 양 쪽 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예를 갖추기를 끝내고 육개장을 먹는 동안 정원누나가 내게 찾아왔다.

정원누나는 웬일로 왔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했다. 서로 근황을 나누며 느낀 것은 정원누나가 의외로 담담하다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님께서 오랜 투병을 하셔서 마음의 준비를 이미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정원누나는 내 근황을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와 정원이가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정원누나는 스러질 것 같이 미소를 지으며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다. 그렇게 다시 지웠던 정원누나의 연락처를 다시 핸드폰에 저장했다.

가을이 끝나기 직전, 겨울의 문 틈 사이에서 찬바람이 고개를 빼꼼 거리던 때, 은행잎이 지며 구리구리한 은행 터진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정원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제 한 번 다시 술 마실래?’

‘나 이제 술 안 마시는데.’

‘아, 그렇구나.’

‘아니, 정원누나랑 마시기 싫단 소린 아닌데. 하, 아니다. 술자리 잡자, 그래.’

정원누나의 목소리가 너무 쓸쓸해보였다.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귀천하셨다는 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술자리를 잡고 정원누나를 만났다. 정원누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소개팅 자리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정원누나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래서 정원누나와 웃으며 인사하고, 술을 따라주고, 그러나 나는 술을 받지 않고,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놀림 받고, 대신 차 태워주겠다고 대답하고.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계속 고민했다.

정원이와 나는 다시 만나지 못 할지도 모른다. 정원이는 정원이의 행복을 찾고, 나는 이렇게 내 행복을 찾는 게 서로에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정원누나가 술에 취해 내 어깨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엔 그 때 못 했던 거, 할래?”

정원누나가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많은 고민과 부끄러움, 그리고 망설임이 느껴졌다. 정원누나는 지금 힘들 때였다. 나와도 너무 잘 맞았다. 오늘 고개를 끄덕이면 그대로 정원누나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건 필연적인 예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정원누나와 마주보는 순간 나는 정원누나의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이 순간에도 정원누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과 이어지는 것이 정원이의 행복에 기여할까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원누나같이 좋은 사람을 대할 순 없었다. 적어도 내가 정원누나를 오롯이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 고민해야할 문제였다. 나는 아직 자격이 없었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나는 좋은 사람이야.”

“……넌 나쁜 사람이야.”

“알아.”

“풋. 그래, 대신 너 앞으로 내가 부르면 째깍째깍 나와. 벌이야.”

“어, 추후에 내 마마님이 안 생기면 그렇게 할게.”

“그럼 그 자리 내 거야, 요놈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 알면 알 수록 성격 더럽네.”

정원누나와는 그 후로 한 달에 두 번 꼴로 만나고 있다. 귀찮은 직장 동료를 떼기 위해 남자친구행세를 한 적도 있었고, 어느 땐 백화점에서 쇼핑을 과하게 한 후 짐꾼이 된 적도 있었다.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도 있었고, 가장 많이 불려나간 건 술자리였다. 그리고 정원누나와 술을 마실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정신병 약을 아예 먹지 않게 됐다.

그리고 사계절이 지나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작품후기]공지에 올렸듯 퇴고는 이후 천천히 진행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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