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회
chapter5돌아오는 길, 정원이가 내 눈치를 보며 재잘거렸다. 내 팔을 잡고 아양을 떨었다. 애교를 부리고, 어떻게든 자신을 보라는 듯 보챘다. 나는 그런 정원이에게 적당히 대처하고 있었다. 정원이가 봐달라고 하면 봐주고, 팔을 잡고 아양을 떨면 머리를 쓰다듬었고, 아양을 떨면 웃었다.
정원이는 내가 그런 대처를 하면 할수록 점점 무언가에 쫓기듯이 관심을 끌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정원이는 내 미숙한 대처에 대해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더 잘 해냈다면 정원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겠지. 그러나 나에겐 이게 최선이었다. 이명처럼 의사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환자분은 실제로 임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상상임신 증세입니다. 물론 앞으로 월경도 하지 않을 것이고, 배도 부풀어 오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임신하시진 않으셨습니다. 현재 심리적인 부분에 대한 검사를 추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검사가 끝나면 환자분께도 전달해드릴 예정입니다.’
‘안 됩니다.’
홀린 것처럼 곧바로 대답했다. 의사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실 수도 있으니 조심히 전달하셔야 합니다. 이상증세를 보이시면 바로 저희 측이나 국정원 측에 연락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곧 정원이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성격장애에서 의존성 성격장애. 망상장애에 부정망상, 피해망상, 우울장애도 있고, 불안장애도 일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수많은 정신병이 정원이에게 있었다. 한 사람에게 이 정도로 여러 가지의 정신병이 있을 리가 있겠냐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의사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며 정원이에게 상상임신에 대하여 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극단적인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약물치료를 통해 정신병을 호전시키고 천천히 사실을 밝히자고 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겐 정원이를 각별히 신경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언제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회상을 하던 도중 정원이가 불안한 듯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무슨 일, 있어?”
“어? 아, 아니야. 그냥. 내가 애 아빠가 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
“아, 그렇구나.”
거짓말.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적막이 흘렀다.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정신이 없었다. 정원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운전할 뿐이었고, 정원이는 핸드폰을 두드릴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정원이에게 미소 지으며 밥을 차려줬다. 정원이는 밥을 먹고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샤워를 하는 것 같았다. 곧 물소리가 끊기고 정원이가 나왔다. 그리곤 내 앞에 섰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다. 새하얀 나신이 내 눈앞에 있었다.
정원이는 그렇게 발가벗은 채로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정원이에게 옷을 입으라고 말할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 있는 거지.”
정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떨리는 몸. 그 모습을 보고 너스레를 떨려던 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뭐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눈을 피하다가 이불을 들고 와서 정원이를 덮어주었다. 정원이는 이불 끝자락을 부여잡은 채로 불안한듯 자신을 끌어안았다. 정원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마, 말해줘.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정원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고 있는 의심, 불안, 초조. 여러 감정이 정원이의 눈동자 속에서 섞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버리고 말았다. 정원이에게 사실을 숨길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안 돼. 말하지 마. 지금은 안 돼. 아직은 너무 일러. 하지 마. 그러지 마. 제발.
“임신한 적이 없대.”
“……뭐?”
정원이의 몸이 굳었다. 떨리던 몸이 멈췄다.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 방금, 머, 뭐라고.”
“우리 아이 없다고. ……상상임신이래.”
쐐기를 박았다.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정원이는 들어버리고 말았다. 확답을 들은 정원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정원이의 시간만이 굳어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나 자신이 미웠다. 얼버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닌 척 할 수도 있었다. 정원이가 이상한 점은 느끼겠지. 그러나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입술을 맞추며, 정원이의 성감대를 어루만지며, 그것으로 정원이의 신경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대체, 왜, 나는.
그 순간 정원이와 눈이 마주쳤다. 정원이는 무너지고 있었다. 맑고 깊었던 눈망울이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고 하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벽에 자신을 가두려고 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저런 정원이의 모습은 이미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정원이에게 다가갔다. 너무 서둘러서 넘어졌다가, 다시 기어갔다. 필사적으로 정원이에게 다가갔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미친 듯이 기어가 정원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원이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되는대로 말을 주워 담았다.
“괘, 괜찮아. 실제로 아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직 늦지 않았잖아. 아무것도 늦지 않았어. 어머니의 반대가 걱정돼?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손가락질할 게 걱정돼? 아니면 내가 널 버릴까 봐 걱정돼? 니가 정신병이 있어서? 아니야. 괜찮아. 우리라면 해낼 수 있어. 아니, 나는 해낼 수 있어. 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니가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하면 회사도 그만두고 곁에 있어 줄 수 있어. 너만 바라봐달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과 연도 다 끊을 수 있어. 니가 잘 못 한 거 아니야. 내가 너를 너무 몰아세워서 문제였던 거야.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야.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우리잖아. 아니야. 나는 나보다도 니가 소중해. 너를 위해서 뭐든지 할게.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어오면 되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고소하면 되고, 그도 아니면 이사 가서 둘이서 살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이사 가자. 걔네가 올린 근황에 있는 거 우리가 지금 어디쯤에서 살고 있냐 그런 거잖아.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고 다른 데로 이사 가지, 뭐. 아버지께서도 너 아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니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널 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 약속할게. 내가 너를 버리는 순간 난 죽어도 돼. 니가 죽으라면 죽을게.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그리고 어차피 애가 생겼다고 한 지 한 달도 안 됐잖아. 지금 애 만들면 되지. 뭐가 문제야. 어머니께서도 모르실 거야. 결혼하고 난 다음에 몇 달 정도 지나서 뭐. 어쩔 거야? 그걸로 이혼하자고 하면 내가 그냥 호적 파고 올게. 괜찮아. 니가 원하지 않으면 어머니께 계속 한 소리 들으면서도 견디면 되지. 아니야, 어차피 상상임신 한 거였잖아. 망상이었잖아. 아니야, 니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너를 몰아세운 게 문제였던 거야.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래. 다시 임신하면 되잖아. 아, 그래. 맞네. 지금 임신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어. 정원아. 우리가 어제까지 행복했던 것처럼, 아니지. 지금까지 행복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이 행복할 수 있어. 아이만 생기면 되지. 그래. 부족한 게 결실이라면, 맺으면 되지. 이상할 거 없잖아. 그래. 하자. 배란제라도 사 올까? 아니면 일단 하고 이따가 사 올까? 어떻게 할까. 오늘 배란일인가? 아니야. 정원아 몰라도 돼. 그냥 매일 하자. 휴가 쓸게. 나 휴가 안 썼으니까, 휴가 쓸 일 많아. 괜찮아. 같이 이겨내자. 사랑해, 정원아, 사랑해. 사랑해. 너밖에 없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해. 사랑해. 너도 나만 사랑해 줘. 정원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해.”
사랑을 속삭이며 정원이의 이불을 벗겨낸다. 정원이가 약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이는 약하니까 이런 바닥에서 하기엔 힘들지도 모른다. 정원이를 안아 올려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놨다. 정원이가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정원이는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자신의 몸을 보이길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정원이의 얼굴을 쓸었다. 정원이에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정원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구나. 정원이에게도 이 일은 충격적이었으니까. 그럴 기분이 들지 않겠지. 내가 너무 서두른 것이리라. 차분하게 천천히 하자. 분위기를 잡고, 다시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정원이와 사랑을 나누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정원이를 달래주자.
정원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원이의 눈물을 손으로 훑어 닦아주었다. 정원이가 고개를 저었다. 정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원이가 몸을 뒤로 조금 뺐다. 정원이가 진정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정원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강휘야, 이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정원아, 아이가 문제였던 거잖아. 그럼 만들면 되지.”
“어떻게 그래!”
갑자기 정원이가 소리를 질렀다. 정원이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참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늦어선 안 됐다. 너무 늦으면 어머니께 의심을 사고 만다. 한 번 의심을 사면 그 틈에서부터 관계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그래선 안 됐다. 차분하게 정원이에게 설명했다.
“물론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거 알아. 지금은 혼란스럽겠지. 그래도 정원아 어머니께 인정받으려면 빨리 임신을 해야 해.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겨우 3주야. 니가 헛구역질을 할 때부터라고 치면 한 달 안에만 임신해도 괜찮아. 너도 나랑 어머니가 싸우는 건 싫잖아.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정원이가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입을 다물었다. 정원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성의 판단이 아니리라. 감정이 앞선 것이겠지. 지금 정원이는 불안정했다. 인정했다. 정원이는 지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정원이를 안자. 안고나서 정원이를 달래주고, 정원이가 들을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 정원이가 소중하게 쥐고 있던 이불을 손에서 빼앗아서 던졌다. 정원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무슨 짓, 윽.”
“괜찮아. 너도 이해해 줄 거야. 지금은 일단 내 말 들어줘. 부탁이야. 정원아. 제발.”
“너, 흑.”
나는 정원이의 머리를 쓸었다. 어깨를 쓸고, 정원이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 정원이가 내 얼굴을 밀어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제발, 강휘야, 제발.”
“아니야. 정원아. 지금은 일단 해야 해. 시간이 없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해야 해.”
“제바알, 제발, 강휘야. 흑, 제발!”
정원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를 떠밀었다. 나는 밀리지 않게 버텼다. 껴안았다. 입술을 맞췄다. 혀를 넣었다. 정원이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억지로 틈을 벌렸다. 정원이가 신음을 흘렸다. 정원이의 어깨를 쓸었다. 허리를 쓸었다. 다시 손을 쓸어 올려 귓불을 만졌다.
사랑스럽고 애틋한 너를 위해 나는 마음을 다했다. 짭조름한 맛이 났다. 정원이의 눈물이었다. 정원이는 울면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정원이와 맞닿아 있던 입술에서 탄식이 흘렀다.
그때부턴 일사천리였다. 정원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의 가슴을 쓸어도, 만지작거려도, 그리고 귓불을 유린해도, 엉덩이를 쓸어도, 입을 맞추어도 그리고 마침내 비밀스러운 곳에 닿아 희롱할 때도 정원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정원이도 이해했구나. 승낙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정원이를 위해. 정원이에게 진심이 전해지도록, 정원이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정원이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정원이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정원이와 눈이 마주친다. 정원이의 눈에 서린 감정이 곧장 내게로 전해져온다. 혼란, 후회, 불안, 초조, 그리고 두려움. 두려움? 정원이가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맺혀가고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원이의 눈빛에서 보이는 수많은 감정 중에 두려움이 있었다. 정원이가 내 손길을 두려워한다. 명백한 사실이 내가 뒷걸음질 치게 했다. 내가 주춤거리자 정원이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대체 왜 그러는데.”
“흑, 내가 원한 건, 흑, 이런 게, 훌쩍, 아니야.”
정원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두 손을 들어, 내 가슴을 밀쳤다. 너무나도 약한 몸짓이었지만 나는 맥없이 밀려 나갔다.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는 손짓이었다. 거절. 정원이는 나를 거절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정원이를 바라본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원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원이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정원이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처럼 정원이 역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정원이는 오열했다.
“흐윽, 흐아아앙!”
정원이의 울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정원이는 오열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마치 댐이 터진 것처럼, 참고 있던 감정이 터진 것처럼 정원이는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을 닦지도 않고 울었다. 정원이의 감정이 흘러넘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정원이의 눈물도 닦아주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정원이를 울린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 사실이 나를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정원이는 한참을 울었다. 더 이상 정원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원이가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정원이가 혼란스러운 만큼이나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정원이가 혼란스러운 만큼? 나는 지금 정원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그 사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원이는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
울음을 그치고 나서 정원이는 고개를 숙였다. 죽은 것 같았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우리는 서로 움직이면 죽을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조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자리에 묶여있었다. 그러던 와중 금제가 풀렸다. 정원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원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원이는 천천히, 쉰 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미, 안해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원이가 무슨 의도로 나에게 사과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정원이를 바라봤다. 정원이가 나를 보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흘렸던 눈물이 무색할 정도로 정원이는 다시 울면서 내게 사과했다.
“미안, 해. 훌쩍,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흑, 미안해. 내가, 훌쩍, 너무 미안해. 흑. 미안해. 흐어엉, 미안해.”
정원이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천천히 다가갔다. 정원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정원이가 우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원이가 쓰러질 것 같았다. 정원이가 걱정됐다.
그러나 그 순간 정원이가 나를 바라봤다. 오지 마. 정원이가 말하는 것 같았다. 슬프게도 그것만큼은 이해가 됐다.
“흑, 이럴 줄, 훌쩍, 몰랐어. 니가, 이 정도로, 흐윽, 망가졌을 줄, 흐윽, 몰랐다고.”
정원이는 오열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만 생각해서, 미안해, 흑, 나만 힘든 줄, 알았, 훌쩍, 미안, 해.”
정원이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내 가슴을 툭, 툭, 무겁게 내리찍었다.
“힘들면 말하라고, 흑, 못 해서, 흑, 미안해.”
툭, 툭.
“내가 그만큼, 훌쩍, 강하지 못 해서어, 흑, 미안해.”
툭, 툭!
“전부 너한테, 흑, 미뤄서, 흐으, 읏. 미안, 해.”
툭! 툭!
흐어어엉
정원이는 내 가슴을 때렸다.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지 마.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원이는 내 가슴을 때렸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입을 열 수 없었다. 정원이의 말을 끊을 수 없었다. 정원이는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다시 울었다. 지쳐서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다. 나는 정원이를 껴안아 줄 수 없었다. 허락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안아줄 수 없었다.
내 셔츠가 모두 젖을 때쯤 정원이는 고개를 들었다. 굳은 얼굴. 결의를 다진 눈빛. 아니, 정원이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정원이는 고민하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었다. 다짐하고 있었다. 꺼리고 있었다. 결의하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정원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정원이는 천천히 입을 뗐다. 작게, 그러나 무겁게.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정원이는 선언했다.
“우리, 헤어지자.”
[작품후기]도중에 나온 강휘의 말은 소설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벽돌입니다만, 불편하신 분들이 많으시다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정신병 명칭 좀 수정했습니다. 알아본다고 알아봤는데 역시 얕은 지식이라 음... 죄송합니다. 추가 수정사항 말씀해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