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19화 (119/138)

118회

4부 막간아침에 눈을 뜨니 강휘의 얼굴이 보였다. 멍청하게 자고 있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하긴 뭐 잘생기기도 했으니까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자꾸 나온다. 항상 나는 아침이 괴로운 타입인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오늘만큼 행복한 아침은 없었던 것 같다. 정신이 들 때까지 한참을 강휘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정신이 들자 아래가 조금 쓰렸다.

‘아파.’

사실 조금 쓰린 정도가 아니라 아팠다. 그렇게 큰 게 들어간다는 게 인체의 신비다. 아기도 낳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할 건 없지만, 그래두 좀. 게다가 첫 경험인데 부드럽게 천천히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심하게도 당했다. 먼저 도발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안하면 강휘를 묶어둘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ts미소녀 최고라고 외치던 나와는 달리 강휘는 완전히 오타쿠는 아니었다. 반 쯤? 일반인과 오타쿠의 선상에 있는 친구였다. 그나마도 나 때문에 이쪽 문화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고. 하여간 강휘에게 있어 내가 성이 바뀌었다는 요소는 사랑하는데 있어 거부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내심 그게 가장 두려웠다.

이전엔 내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여유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여자가 된 것을 인정하자마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 이전에 자각했더라면 좀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휘의 곁엔 이미 좋은 여성이 있었다. 얄궂게도 나와 이름이 같은 정원이라는 언니였다.

정원 언니는 강휘랑 너무 잘 맞았다. 옆에서 보기에도 둘은 천상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대로 두면 강휘를 빼앗길 것 같았다. 나한텐 이제 강휘밖에 없는데. 그래서 강휘를 도발한 것이었다.

“으음.”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강휘가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눈을 꿈뻑꿈뻑거리는 모습을 보니 다시 한 번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어진다. 깨문다고 하니까 온 몸이 쓰리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아린 고통에 더해 온 몸이 쓰렸다. 아마 어제 남긴 키스마크나 깨물린 자국이 가득할 것이다. 왠지 억울해져서 강휘를 약하게 쥐어박았다.

“일어났냐?”

“어, 잘 잤어?”

강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미소를 지었다. 치사하다. 진짜로 치사하다. 나만 나쁜 사람 만들고. 왜 때리냐고 짜증이라도 내지.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강휘가 웃는 것만 봐도 부끄러우니 아마 평생 강휘를 이기진 못할 것 같다. 방금 느꼈던 억울한 감정이 섞여 다시 한 번 쥐어박으며 툴툴거렸다.

“잘 잤겠냐? 누가 그렇게 깨물고 박아대고 그랬는데?”

“음, 미안해?”

“미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큭큭, 사실 안 미안해.”

능글맞게 받아치는 게 이쪽이랑은 달리 여유가 넘쳤다. 짜증을 내려는데 강휘가 천천히 나를 껴안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요새 운동한다더니 품이 넓기도 참 넓다. 가슴에 머리가 닿아있노라니 강휘의 심장소리가 들려 점점 안정이 됐다. 강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많이 아팠어?”

“……응.”

“미안해. 다음엔 아프지 않게 잘 해줄게.”

“……네에.”

“웬 갑자기 존댓말? 하하, 귀엽긴 하다야.”

강휘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강휘는 머리를 참 잘 쓰다듬어준다. 뭔가 머리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살살 쓸어주듯이 쓸어준다. 성감이랑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뭔가 폭신하고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포근해져서 팔을 벌려서 강휘에게 더 적극적으로 안겼다. 그러자 다리 아래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강휘가 당황한 모습으로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다, 다음이 아니라 지금 할래?”

“됐네요, 이 사람아!”

아직 아프다고! 방금, 말, 했잖아!

물론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생리현상이야 나도 알고 있고. 게다가 우리 어제 알몸으로 자기도 했고. 지금도 이불 하나 벗기면 둘 다 몸 맞대고 있을 거고. 아, 혹시 나 안기면서 달라붙은 거 굉장히 부끄러운 건가? 음, 맞는 것 같다. 나도 조금 몸을 떼서 뱅글 돌아누웠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귓불에 강휘의 손길이 느껴졌다.

“꺅!”

깜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강휘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째려보자 강휘가 어색하게 뒷목을 만지며 눈을 돌렸다.

“아니, 그렇게 놀랠 줄은 몰랐는데.”

“으, 으, 으!”

“민감하긴 한가보다, 거기?”

“야아아악!”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민감하다고! 그리고 진짜 지금은 못한다고! 아! 프! 니! 까!

그렇게 한참을 투닥거리다가 이불에서 나와서 샤워를 했다. 같이 샤워하자는 놈팽이 놈을 쥐어박고 먼저 씻으려다가 일어나니 더 아파서 먼저 씻으라고 보내버렸다. 강휘가 나오고 나서야 고통이 익숙해졌다. 샤워를 하러 들어와 이물감이 들어서 대체 뭔가 생각해봤더니 어젯밤에 강휘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던 게 생각이 났다. 음, 잊자. 여성청결제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에요.

샤워를 하고 나오자 달콤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강휘가 아침을 하고 있었다. 강휘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삐지지 마. 내가 미안하다니까.”

“안 삐졌다고!”

강휘가 알았다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나를 진정시키듯 흔들었다. 저거 굉장히 사람을 바보취급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꼭 하지 말라고 언젠간 말해놔야겠다. 그보다 먼저 말해야할 게 있으니 그건 다음으로 미뤄두자.

작은 식탁을 꺼내서 앉아 기다렸더니 강휘가 곧 토스트와 잼, 그리고 우유를 들고 왔다. 내가 빵을 집으려 했더니 웃으면서 자기가 직접 빵에 잼을 발라서 넘겨준다. 얘는 이게 얼마나 사람 마음을 흔드는 행동일지 모르겠지? 언니가 잘 가르쳤어. 물론 나한테만 해야겠지만. 그러고 보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움, 야, 우리.”

“야, 먹고 말해, 먹고.”

“넹.”

우물우물, 꿀꺽.

“우리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

“뭔데?”

“너 정원언니 만나고 와.”

그러자 강휘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무 앞 뒤 끊어내고 말했나 싶었다. 더 자세하게 전후맥락을 밝히도록 하자.

“정원언니한테 가서 우리 사귄다고 말해.”

“……알았어.”

강휘가 무언가 다짐하는 눈치였다. 생각을 알 법하다. 다신 만나지 않으려는 거겠지. 한 번 친해진 사람 진짜 끔찍이도 아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강휘를 바라보며 최대한 내 감정을 전하려고 담백하게 말했다.

“정원 언니랑 만나도 돼. 술 마셔도 되고. 근데 앞으론 나랑 같이 가. 둘이선 안 돼.”

“너는.”

“나는 연아 만나러 갈 거야.”

강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휘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연아를 만나러 간다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연아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는 강휘를 안심시키려고 밝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아, 방금은 둘이서 만나야 된다고 했지만, 나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오늘만 마지막으로 각자 보고 오자. 응? 괜찮지?”

“하아, 그래. 알았어.”

강휘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스트를 내려놓고 강휘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끊어내라는 거 아니야. 그쪽에서 그만 만나자고 하면 모를까, 절대로 니가 먼저 정원언니한테 그만 만나자고 하지 마. 알았지?”

“그래.”

“응, 좋아.”

다시 토스트를 들고 먹었다. 말을 하느라 토스트가 다 식어있었다. 식어도 맛있지만, 다 먹고 말할걸. 뒤늦은 후회가 뒤따랐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준비를 했다. 최대한 단정하게 옷을 입었다. 강휘가 선물해준 옷이었다. 강휘에겐 내 향수를 뿌려줬다.

집을 나서기 전 서로를 마주보고 있자니 강휘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용케 같이 가겠다는 소리를 안하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 마음을 다시 다잡기 위해 나는 조용히 말했다.

“키스해줘.”

“그래.”

강휘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애달픔을 느끼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입술을 맞춘다. 힘내. 너도 힘내. 나는 괜찮아. 나도 괜찮아. 허기진 마음에 한가득 감정을 들이 붓는다.

***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바라보니 정원오빠의 카톡이 와있었다. 복잡한 심경이 드네.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는 우리가 재회한 그 카페. 장소만 봐도 정원오빠가 다짐을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카톡을 받은 순간부터 최대한 자신을 화려하게 꾸몄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순간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여자의 감 때문이었다. 또한 이런 느낌은 틀린 적이 없었다.

나 자신을 꾸미는 동안 천천히 감정을 정리해갔다. 정원오빠가 그렇게 좋았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고. 애달픈 기분도 단 한 번도 든 적 없었고. 사람이 좋은 거야 알고 있었지만 호감의 영역이었고. 오히려 바뀐 후에 그런 생각이 더 들었으니 아쉬울 건 없고.

바뀐 후라고 생각하니 정원오빠는 너무 귀여워서 어딜 가든 눈에 띄었어.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사귀게 되면 레즈비언 같을 텐데 너무 눈에 띄는 건 좋진 않지.

사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도 확실하진 않았잖아? 어떻게 보면 연민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나조차도 여자를 보면서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진 잘 모르겠으니까. 그리고 나보단 정원오빠가 더 힘들 거 아니겠어? 그 사람 친구도 거의 없으니까.

이렇게 마음을 하나하나 접어가는 동안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정원오빠는 오늘도 예쁘게 차려입고 그 때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랑 산 옷은 아니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시켜 자리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고민하던 건 해결 됐나요?”

“평소 너답지 않네. 인사부터 하고,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그러다 얘기 꺼내곤 했잖아.”

“그러네요. 결론은 났나요?”

정원오빠는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평소 마시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 또한 재회했을 때 시켰던 음료였다. 내 몫의 커피가 오고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자 정원오빠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언니야.”

“네?”

“나, 정원언니라고.”

그 말을 듣고 모든 것이 납득이 갔다. 그렇게 된 거구나. 돌아가고 나서 내린 결론은 결국 그것이었구나. 그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 커피만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정원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로를 보지 않는 방법도 이렇게나 차이가 났구나. 이렇게까지 맞지 않는 사람이었구나.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다가 우리의 끝을 알리는 말은 내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네요.”

“뭐?”

“겨울이라고요.”

정원오빠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저 표정을 난 퍽이나 좋아했는데. 이젠 별로 그렇지도 않네.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정원오빠는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강휘씨를 만났겠지? 핸드폰을 바라봤다. 재미없는 사진이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사진을 정원오빠에게 보여주려 했다. 정원오빠가 나를 붙잡았더라면, 혹은 미안하다는 말을 했더라면 나는 이 사진을 정원오빠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뭐, 알아서 하겠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삭제했다. 이젠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나의 정원오빠는 이미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강휘씨의 정원언니였다. 그렇다면 이건, 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

강휘에게 카톡이 왔다. 오늘 꼭 만나지 않아도 되지만 술 한 잔 하고 싶다. 할 말이 있다는 메시지였다. 만나고 싶으면 그냥 나오라고 하면 되지, 이렇게 말미를 남기는 것 역시 강휘다운 메시지다. 쓴웃음이 나왔다.

장소는 우리가 자주 가던 선술집이었다. 사실 강휘라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카페를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까지 잔인하진 않구나. 괜히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마음은 애초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강휘와 첫 만남을 가진 그 순간부터 나는 계속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강휘는 너무 멋진 남자였다. 너무 멋져서, 괜한 욕심이 났다. 심지어 그는 연애상담을 하곤 했다. 연애상담을 해주다가 이어진 커플이 얼마나 많은지 강휘는 알까?

어떻게 차려입고 나갈까 고민을 하다가 평소만큼만 차려입었다. 내 입장에서야 처음 만났을 때만큼 차려입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강휘에게 괜한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평소처럼 가서 평소처럼 술 마시고, 평소처럼 이야기를 들어주자. 그런 다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약속장소에 가자 강휘가 미리 술상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안주가 딱 따뜻한 정도를 보니 내가 나올 시간을 예상해서 주문을 해놓은 것이었다. 안주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주로 세팅이 되어있었다.

“한 잔 할 거지?”

첫 잔은 진로. 그것까지 완벽하다. 진짜, 너무, 좋은, 술친구야. 생각하면선 이를 악물 필요도 없는데 생각조차 이를 악물고 하게 된다. 아무 말 없이 잔을 받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술을 따라준다. 그리곤 자신의 빈 잔을 들고 내게 진로 병을 넘겼다. 나 역시 강휘에게 술을 따라주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다. 그리곤 원 샷. 서로 쉬지도 않고 다시 세 잔을 연거푸 마셨다.

친구든 모르는 사람이든 이렇게 마시면 항상 핀잔을 줬다. 천천히 좀 달리라고. 그러나 강휘는 당연하다는 듯 속도를 맞췄다. 세 잔을 마시고 나면 서로 안주를 먹을 시간을 가진다.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이때다.

“어젠 잘 들어갔어?”

“어. 누나야말로 원래 태워다 주려고 했는데.”

“성규가 연아씨랑 다 데려다 주더라. 하긴 너 성규보단 그럼 운전 덜 한 셈이네?”

“하긴 뭐 나야 정원이랑 정하 데려다주고 바로 들어갔으니까, 하하.”

강휘가 웃으며 술을 따라줬다. 7잔이 되는 순간 한 병이 딱 떨어진다. 나 역시 당연하다는 듯 다음 병을 까서 강휘를 따라주었다. 첫 잔 이후로는 건배를 하지 않는다. 한두 잔을 마셔야 마실 때마다 건배를 하지. 그렇게 추가로 세 잔을 연거푸 마시니 두 병째가 바닥난다. 이제 강휘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다. 시작은 ‘누나, 할 말이 있는데’다.

“누나, 할 말이 있는데.”

“쿡쿡,”

“어 왜?”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말 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질 말을 예상하니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재미없는 말이겠지. 강휘는 빈 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나 정원이랑 사귀기로 했어.”

“와. 축하할 일이잖니.”

“응, 고마워.”

강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축하를 했으니 강휘가 씁쓸한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 역시 이상할 게 없었다. 숨을 들이켰다. 이미 각오하고 나온 거였잖아. 정신 차려, 하정원.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 고생하는 거 실시간으로 다 듣고 언제 서로 사귀나 했는데, 이제야 사귀는 구나. 감개가 무량하네.”

“응, 그렇지.”

“기억나? 너 처음에 만날 때도 나한테 정원이 얘기 꺼냈었잖아.”

“그랬지.”

“하긴 그 땐 내가 먼저 말하라고 하긴 했었으니까, 나도 별 생각 없긴 했는데, 아하하.”

“하하.”

“서진이가 진짜 나쁜 놈이야. 그렇지?”

“응. 누나 말이 맞아.”

“서진이가, 나쁜, 놈이야. 하아. 나쁜 놈.”

점점 말이 느려졌다. 목소리도 점점 낮아졌다. 텐션이 낮아졌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나 남자보는 눈이 정말 없나봐.”

“……미안.”

“미안하다고 하지 마. 우리 그런 사이면 안 되니까.”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서로 술을 주고받는다.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안주를 먹고, 다시 한 잔. 평소보단 조금 빠른 페이스였다. 원랜 두 병째부턴 페이스조절을 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말릴 강휘도 말없이 내 페이스에 쫓아왔다. 네 병째를 비우고 나서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정리됐다.

“정원이한테 잘해줘.”

“물론이지.”

“나랑은 이제 그만 만나고.”

“……꼭?”

“응. 꼭.”

강휘는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입을 조금 떼고 소리 없이 많은 언어를 내뱉는다. 응, 그것도 알고 있어. 고민하고 있는 거지? 나는 차분하게 강휘를 기다려주었다. 강휘는 나를 마주 보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래, 잘했어.”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휘는 자신의 몫만을 계산했다. 나머지 남은 돈을 내가 계산했다. 이것조차 우리가 항상 가지던 술자리의 약속이었다.

그런 배려가, 호의가, 마지막까지 이 자리를 아름답게 마치려는 네 모습을 보니 마지막까지도 미련이 남았다. 진짜, 차라리, 덮칠걸. 강휘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나.”

“응?”

“고마웠어. 진짜로.”

“……가, 이 못된 녀석아.”

“응, 정말, 고마워.”

강휘가 등을 돌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에 담았다. 좋은 술친구도 사라졌구나. 나, 진짜 남자 보는 눈이 없을지도. 찔끔 눈물이 나오는 걸 눌러 담았다. 오늘따라 더 겨울이 시리게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캔 맥주라도 더 사가자. 내일 출근해야하든 말든, 오늘은 더 마셔야겠어.

***

정원누나와 술자리를 끝내고 걸어 나오며 핸드폰을 바라보니 6시였다. 술자리치곤 굉장히 빨리 끝난 셈이고 처음 만난 시간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오래된 셈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정원이에게 전화를 했다.

[어.]

“끝났어?”

[응. 끝났어. 너는?]

“나도 끝났으니까 전화 걸었지.”

[끝?]

“어 끝.”

그러자 핸드폰 너머로 정원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럴 필요 없다니까.]

“정원누나가 그만 만나자고 하더라.”

[그렇구나.]

정원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간 공백이 있었다가 정원이가 돌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휘야, 혹시 잠깐이라도 만나지 않을래?]

“내일 출근인데?”

[그래두.]

“몸은 이제 좀 괜찮고?”

[아이씨! 혼나볼래?]

“알았어, 알았어. 나도 보고 싶어.”

[바보.]

전화를 끊고 정원이네 집 근처에 있는 카페를 갔다.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겠지. 아예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집은 정하가 들어와서 자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제야 어젯밤 정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원이가 단단히 준비를 했었구나.

카페에 들어가자 역시나 집이 근처인 정원이가 앉아있었다. 정원이에 앞엔 초코렛 프라푸치노와 컵 표면에 물이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둘 다 정원이 앞에 놓여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정원이를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어, 안녕?”

“응. 왔어?”

내가 잔과 자신을 바라보자 정원이가 탁자를 조금 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라고?

“여기 앉아.”

“니가 앉던 자린데?”

“앉으라면 앉아.”

내가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앉자 내 무릎 위에 정원이가 앉았다. 핀잔을 주려는데 정원이가 침울해져 있어서 그냥 그 상태로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정원이는 내게 안겨서 초코렛 프라푸치노를 쪽쪽 빨아먹더니 고개를 숙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냐, 진짜로 괜찮아.”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라. 응, 나 솔직히 조금 기뻐서.”

정원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 진짜 나쁜 건 아는데. 솔직히 너 정원언니 안 만난다는 소리 듣고 조금 안심했어. 응, 미안해.”

나는 그런 정원이를 보고 아무 말 없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정원이는 그대로 내게 안겨 있다가 몸을 흔들었다. 내가 순순히 풀어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나도 연아랑은 다신 안 만날 거니까. 그거 말하려고 불렀어.”

“그래.”

“씨잉, 너 술 냄새나. 그거 마시고 얌전히 집에 돌아가.”

“알았어.”

정원이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웃었더니 정원이가 다시 다가와서 내 뺨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뱅글 돌아 도망을 갔다.

“내일 봐.”

“야, 너.”

“그거 다 마실 때까지 움직이면 나 내일 너랑 얘기 안 할 거야!”

“아이씨, 야! 다정원!”

결국 그 날 정원이는 잡을 수 없었다. 멍청하고 성급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속을 버린 것은 덤이었다. 다음 날 정원이는 정신 차리라고 그랬다며 웃는 낯으로 말했고, 나는 그런 정원이에게 복수로 에스프레소를 선물했다. 정원이의 찡그린 표정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작품후기]4부 끝! 4부와 관련된 얘기는 어, 한 30분뒤에 4부 공지가 올라갈 예정입니다. 사실 지각한 거 역시 이거 올릴 시간도 빡빡했어서... 넹... 죄송합니다...

미성년자 독자 여러분, 116화 117화 추가 됐습니다. 노블에서 보신 분은 특별히 더 보실 필욘 없습니다.

오늘은 참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조회수 10만을 찍은 것도 정말 감사할 일이고, 후원자 분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많은 관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LazyManX님 어제에 이어 저 쪽에서의 후원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

ㅇㅅㄱㄷ님 후원과 관심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더 힘내겠습니다! :)

yunving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깜짝 놀랄 만큼 큰 선물이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

아드밀란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항상 코멘트도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십이사자님 항상 후원 감사드립니다. 사실 후원도 정말 감사드리지만 지속적인 관심,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이루실라님 후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5부는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외에도 부족한 점이 많은 글에 관심 가져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붇는다 -> 붓는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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