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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16화 (116/138)

115회

chapter4행복한 시간은 되돌아 볼 때 가장 아름답다. 다정원에게 있어 행복했던 시간은 지금 떠올려보면 한강휘와 함께 설익은 감정을 나누던 시기였다.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이 바뀌고 다정원의 옆에 남아있던 것은 오직 한강휘밖에 없었다. 그를 중심으로 다정원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었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한강휘와 논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날이 바닷가에 놓인 유리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의 관계가 정리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친구로 족했다. 이전에도 친구였고, 그도 다정원도 친구로 남아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아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친구라기엔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존재했다. 가장 비슷한 것은 서로 칭찬을 하거나, 혹은 술을 마시지 않고 마음속에 숨겼던 진심을 토로할 때 정도가 있겠으나, 그 역시 정확히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감정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리구슬을 빛나게 하는 것은 분명히 그 감정이었다.

다정원은 고민했다. 자신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정원이 크게 변했듯, 다정원의 주위 역시 급변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진행되며 다정원은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다른 사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에 휘말리면 내면의 잔잔한 흔들림보다 더 큰 감정이 잇달아 찾아왔다. 그래서 한강휘에 대한 감정을 쉽사리 정리할 수 없었다.

정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애매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서로 그 애매함을 즐길 수 있었다. 이는 분명히 정리가 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리고 그 애매함을 달콤하게 즐기고 있었던 그 순간이 다정원에게 있어선 행복한 시간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행복한 시간은 한 여자가 찾아오며 흔들렸다. 이연아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녀는 다정원의 예전 회사 후배였으며, 다정원이 아직 ‘그’였을 때 그를 사랑한 여자였다. 이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다정원을 흔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다정원이 감정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을 줬다. 작게는 여자의 몸이 되어 불편한 점들, 애매한 점들, 여성의 대화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크게는 다정원이 한강휘와 다퉜을 때, 혹은 한강휘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있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잘 깨닫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생각들을 이연아는 그저 들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정원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감정의 시소가 한쪽으로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다정원은 그녀의 부탁을 막연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정도로 큰 부탁도 아니긴 했다. 그저 자신과 쇼핑을 하자. 혹은 자신과 맛있는 것을 같이 먹으러 가자. 이런 가벼운 것들이었다. 그런 부탁을 한 것이 주말인 것은 사실 서로가 직장인이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주말은 한강휘와 만나서 노는 날이었지만, 그렇게 하자며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만나서 노는는 날이다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이연아는 한강휘보다 많이 덜 친했고, 덜 친한 만큼 부탁을 거절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연아가 들어준 상담은 그런 부담감을 더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정원은 여성을 대하는 데 있어 서툴렀다. 주말 이틀 모두를 이연아가 부탁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이 모든 이유가 다정원이 이연아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 정도로 다정원이 이연아를 불편해 할 만한 요소가 많은데도 다정원은 이연아와 점점 친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연아가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줬고, 더 많이 양보했다. 그것 말고도 이유야 많았다.

첫 째 다정원에게 있어 한강휘에게 느끼는 감정을 토로할 상대는 이연아가 유일했다.

둘 째 다정원의 세계에서 한강휘와 관련이 없는 이는 이연아가 유일했다. 물론 이연아도 완전히 한강휘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가 매우 미미했다.

셋 째 이연아는 그를 언젠가부터 정원오빠라고 불렀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남자로 여기지 않았는데, 이연아만이 자신의 남성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달콤한 마약이 되어 다정원이 이연아에게 쉽게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정원이 이연아와 친해질수록 한강휘와는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연아가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를 일부러 잘못 끼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예전이었다면 웃고 넘길 일도 이제는 조금 찡그린 표정이 보였다. 이전이라면 찡그릴 정도의 일은 이제 화를 냈다. 불협화음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그런 만큼 이연아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되면 한강휘와는 좀 더 삐걱거린다. 이연아에게 고민을 토로한다. 이연아는 다정원에게 더 많은 것을 ‘부탁’하기 시작한다. 그런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정원은 눈치 채지 못했다. 다정원은 인간관계에 있어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관계가 천천히 무너져내려가는 것을 다정원은 눈치 채지 못했다.

다정원이 인간관계에 미숙한 점은 이연아와의 대화에서도 드러났다. 이연아는 은근히 다정원에게 한강휘에게 느끼는 감정이 여성적인 것이며, 다정원에게 있어 남성적인 부분은 이미 많이 사라졌노라고 속삭였다. 다정원은 그것에 굉장히 흔들렸다. 그리하여 이연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점점 움직이고 있었지만 다정원은 그 사실조차 몰랐다.

이러한 것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이연아가 다정원에게 연인행세를 하자고 했다. 제 아무리 둔감한 다정원이라도 이런 큰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리가 없었다. 다정원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연아는 이미 모든 수단을 준비해둔 것 같았다. 이연아는 우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저 역할극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다정원은 남성의 역할, 자신은 여성의 역할, 그것을 통해서 다정원이 잃어버린 것을 찾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연아는 자신이 이전에 다정원을 사모했노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연아의 최종 수단이었다.

그러나 다정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쉽사리 들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연인행세. 그 단어의 조합이 다정원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다정원에게 있어 연인행세라는 것은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마치 한강휘와 자신만의 비밀기지와 같은 그런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런 결심이 흔들리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 날은 한강휘가 하정원과 술을 마시고 온 다음날이었다. 그건 상관없었다. 자신 역시 이연아를 만나고 있었다. 비는 시간동안 한강휘가 누구와 술을 마시든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감정이 상했을 뿐이었다. 그 날이 마법에 걸린 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다정원이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삐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강휘가 화를 내는 순간 다정원은 크게 기분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다정원은 그 순간 원인을 하정원에게로 돌렸다. 한강휘가 하정원과 만나면서 자신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정원은 한강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물론 다정원 역시 원인을 하정원에게 돌리는 것도,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타당하지 못하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감정은 이미 다정원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연아가 한강휘를 제외하면 유일한 자신의 인연이라는 것 역시 다정원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 후 다정원은 이연아의 제안을 수락했다. 감정의 널뛰기를 견디지 못한 자포자기의 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 날부터 이연아의 행동이 조금은 더 과감해졌다. 패착이었다. 다정원은 이내 죄책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법의 시간이 끝나고 이성과 판단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어느새 배신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죄책감이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한강휘가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다정원은 필사적으로 피했다.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해야 했다. 한강휘가 먼저 사과해선 안 됐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한강휘를 정면에서 바라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과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좀 더 감정이 식고 부끄럼이 잦아들면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강휘는 기어이 자신을 찾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아주 비굴하게. 다정원은 그 순간 자기혐오에 빠졌다. 틱틱대던 행동은 한강휘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한강휘는 여행을 제안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에 가서 다 털어놓자. 그리고 용서를 구하자. 강휘도 먼저 용서를 구했으니까, 아마 받아줄 거야. 다정원이 오판한 것은 단 하나, 하정원이 같이 여행을 간다는 점이었다. 다정원은 자신의 구원군인 이연아를 불렀다. 물론 이연아 역시 다른 의도로 여행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다정원은 알 수 없었다.

하정원은 좋은 사람이었다. 배려심이 몸에 자연스럽게 묻어나고, 자신과 비슷한 경향을 가진 것 같았다. 말도 생각보다 잘 맞았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다정원이 그렇게 판단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정원은 한강휘의 눈빛에서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한강휘가 멀리 가버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물론 하정원 역시 그런 한강휘를 내심 반기고 있는 느낌도 다정원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다정원은 하정원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한강휘와 가장 친한 것은 자신이며, 한강휘와 공유하고 있는 경험 등을 은근슬쩍 내세웠다. 한강휘와 하정원이 말할 때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이 다정원에게 있어 자기혐오와 한강휘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증폭시켰다는 점이었다. 다정원은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정원과 한강휘는 어디까지나 친구였다. 그 단단했던 전제가 물렁물렁해지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마침내 다정원이 한강휘를 쫓아 바닷가를 걸을 때 자신조차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복잡한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다정원은 한강휘와 이전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짚었다. 그래, 그때가 행복한 순간이었다. 다정원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구슬을 떠올렸다.

한강휘와 둘이서 바닷가를 걸으며, 한강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때 느꼈던 복잡한 기분이 다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감정이 용솟음쳤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몸을 빙글 돌리는 척을 하며 잠시 진정할 시간을 가지려했다. 그러나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쪽에 숨어있던 하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원은 알고 있다. 하정원이 우연히 같이 산책을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정원은 알고 있다. 하정원이 오늘 하루 종일 힘들어보이던 한강휘를 걱정해서 나온 것을 알고 있다. 다정원은 알고 있다. 자신이 느끼는 질투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정원은 알고 있다. 하정원이 한강휘에게 호의를 넘어선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정원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응. 그래. 역시 잘 모르겠어.”

그러나 다정원은 정작 자신의 감정은 알 수 없었다.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눈을 감게 한 것은 눈이 마주치면 너무 부끄러우니까. 한편으로 지금까지 고생했던 강휘를 위해 상을 줘야겠다며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핑계를 대고는. 그래도 눈을 감고 인상을 찡그리는 강휘가 귀여워서, 그래서.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숨결을 나눴다. 입을 맞추는 순간 느껴지는 것은 짜릿한 쾌감과 지독한 자기혐오. 서툴게 코를 부딪치자마자 기분 좋은 것을 탐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가 기운다. 한강휘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다정원은 하정원의 앞에서 서툴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한강휘와의 인연을 과시했다.

***

다정원은 입맞춤을 마치자마자 빠르게 펜션의 한 방으로 도망갔다. 술이 너무 취해서. 핑계는 그것으로 족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와 다정원은 침대에 누웠다. 다정원의 내면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미쳤어! 대체 내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지금까지 강휘를 괴롭게 했으니까 사, 상을 준다니! 뭐가 상인데! 으아아아! 나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치만 강휘가 눈 감고 겁먹고 있는게 쪼금 귀여워서 그만, 이 아니라!

그리고 또! 정원언니가 보면 뭐! 내가 강휘한테 뭐라도 되는 것처럼, 우린 그냥 친구인데! 강휘 얼굴 내일부터 어떻게 봐! 어떻게 보냐고 다정원 이 미친놈아!

아, 맞다. 방금까지 술이랑 고기 먹었는데 입 냄새 나진 않았을까? 강휘도 나도 처, 첫 키스일 텐데. 나, 나는 그런 거 못 느꼈으니까, 괘, 괜찮을 거야. 강휘 입술 부드러웠어. 으아아아악! 아니야! 아니야! 잊어! 잊으라고!’

다정원이 베개를 껴안고 몸부림을 쳤다. 키스를 한 순간부터 다정원은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갱신하고 있었다. 당장 지금 하는 모든 생각이 이후 다정원이 느끼기에 부끄러워서 다시 몸부림을 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만일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 누군가가 듣는 순간 다정원은 수치심에 목을 매달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지랄발광을 하다가 멈추게 된 것은 작은 노크소리 때문이었다.

똑똑

“정원오빠. 얘기 좀 해요.”

이연아, 그녀가 감정을 순식간에 가라앉게 만들었다. 또 하나의 자기혐오가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작품후기]시간이 모자라 예약을 못했네요. 금방 금방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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