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회
chapter4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어떠한 트리거를 통해 일은 발생한다. 이는 어느 종교에도 있는 말이었다. 불교에선 공을 쌓지 못하면 다음 생애에서 공을 쌓게 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선 사람에게 원죄가 있어 그것을 씻기 위해 기도를 드려야한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이 요구하는 일엔 원인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도 내가 저지른 잘못이 원인이 되어 불러일으킨 결과라고 생각이 들었다.
싸늘하다고 하기엔 미적지근한, 그러나 절대로 상냥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였다. 이연아는 정말 무슨 의도인지 그 말을 하고 나서 조용해졌다.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그녀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행을 가는 것을 원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본인도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정원누나는 자는 척을 하다가 결국 잠이 들었다. 이 공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부럽다. 나도 그냥 이 상황을 피해 한숨 자고 싶다.
정원이는 평소엔 잘 자면서 오히려 창문 바깥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그 상태였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한편 나는 아침부터 운전대를 잡고 절찬리에 벌을 받는 중이었다. 살가울 필욘 없지만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꼭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뒷목이 당긴다. 위장이 아프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문득 정원이가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조금 허리를 숙였다.
“몸 안 좋아?”
“아니, 괜찮은데.”
“근데 왜 이리 표정이 안 좋냐. 얼굴도 하얗고.”
그거야 정원누나가 깨고 나면 다시 찾아올 냉전이 신경 쓰여서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답할 순 없는 노릇이라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냥 운전 오래해서 그런가. 보기 안 좋으면 웃을게. 하하.”
“누가 그러라니.”
정원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정하야. 어. 어. 아니 잘 쫓아가고 있어. 근데 다음 휴게소 보이면 들어가자. 응? 아니, 그냥. 강휘 좀 힘들어보여서. 대단한건 아닌데. 한 시간 반이나 운전했으면 좀 쉬어도 되잖아. 응. 어. 알았어.”
정원이는 전화를 끊고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지?”
“네. 감사합니다.”
“미련 곰탱이.”
“누가 아니래냐.”
사실 미련하고 곰 같다는 말은 내가 정원이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는데 정원이 입으로 들었더니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휴게소에 차를 댔더니 성규네 차가 보였다. 옆에 빈자리도 있어서 그쪽에 댔다.
“으응, 도착했어?”
“아니, 잠시 휴게소. 뭐라도 먹을래, 누나?”
“그럴까? 으응!”
정원누나가 차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폈다. 나도 나와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등 뒤를 쿡쿡 찌르는 게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다. 정원이였다.
“어디 아픈데.”
“뭐? 아냐. 아픈데 없어.”
“나 또 화낸다?”
“사실은 속이 좀 쓰려서.”
“진작 말할 것이지.”
정원이는 정하 쪽으로 가서 무언가 말하더니 휴게소로 들어갔다. 이연아는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끼어들었다. 서진이가 내 쪽으로 와서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화장실 안가냐?”
“가긴 갈 건데.”
화장실 쪽으로 가며 뒤따라오는 정원누나에게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서진이에게 말했다.
“서진아, 부탁이야. 한 명만 좀 바꿔줘.”
“엉? 왜?”
“운전하다 죽어버릴 것 같아. 제발 살려다오.”
“응?”
그러자 옆에서 따라오던 성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네. 서진아, 아무 말 하지 말고 정하랑 정원누나랑 자리 바꿔줘.”
“아? 아아. 그거냐? 으하하, 미치겠네. 이걸 능력이 좋다고 해야 돼? 아니면 능력이 딸린다고 해야 돼?”
“놀리지 말고 자식아.”
“어허! 부탁하는 놈 태도가 그게 뭐냐!”
“제발 시발 놈아.”
“으하학! 그냥 계속 이렇게 타고 다니시는 건 어떠십니까?”
“부탁드립니다, 제발 시발, 제발.”
“좋다!”
서진이가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가 오면 그나마 낫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규에게 말했다.
“고맙다.”
“뭘.”
“그러고 보니 정원누나랑도 알고 있었어?”
“아니? 그냥 준비할 때 카톡에서 말하다가 친해졌는데?”
질린 눈으로 성규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너도 진짜 대단하다.”
“너만은 못하지.”
“아니, 진짜로, 임마.”
“나도 진심인데. 하하.”
성규나 서진이나 이게 친화력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과 쉽게 친해진다. 나로썬 평생 저렇게 못할 것이다. 물론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지만. 화장실에서 나와서 휴게소로 들어갔더니 정원이가 와서 약을 넘겨줬다.
“속 쓰릴 때 먹는 약이래. 밥 먹고 먹으라니까, 여기서 밥이나 먹고 가자.”
“오야. 땡큐.”
그렇게 다 같이 모여 음식을 먹었다. 가면 뭐부터 하니 아니면 일단 드러누워서 쉰다느니 어딜 가니 바닷가가 있다느니 그런 소릴 하며 떠들다가 밥을 다 먹고 나서 출발할 때가 되자 아직 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차피 정원누나와 정원이가 떨어지면 미묘한 신경전이 사라지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정원이가 생각해서 사준 거니까 한 알을 까서 삼켰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다. 차에 돌아와 보니 정하와 정원이가 뒤에 앉아있었고 조수석엔 이연아가 앉아있었다. 멍한 눈으로 이연아를 바라보자 이연아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의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걸 뭐라고 물어봐야 되나. 대놓고 자리선정이 왜 이따위냐고 물어야 할까. 내가 머뭇거리며 앉지 못하자 정하가 물었다.
“강휘 오빠, 뭐해? 출발해야지.”
“어, 어, 음.”
“왜?”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서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어, 정원이가 왜 뒤로 갔나 싶어서.”
“아, 그거?”
정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설명했다.
“나 저쪽에서 너무 신나게 놀다 와서 좀 자려는데 연아씨가 언니 계속 조수석에 있었으니 피곤할 테니까 뒤로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언니보고 뒤로 오라고 했어. 근데 나도 잘 거니까 조수석에 앉긴 뭐하잖아? 그래서 연아씨 앉혔지.”
“그렇구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이연아가 내가 오기 전에 정원이랑 둘이 뒤에 앉으려고 개수작을 부리려다가 이 꼴이 난 것이었다. 약을 미리 먹어둬서 다행이었다. 속이 다시 쓰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어색하게 보이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매고 악셀을 밟았다. 이연아 역시 어쩌다 이렇게 상황이 꼬였는지 이해를 못하는 얼굴이었다.
곧 정하가 선언했던 대로 잠에 들고 정원이도 피곤하긴 했었는지 잠이 들었다. 정원누나와 정원이의 미묘한 신경전도 충분히 힘들었지만 이연아와 둘이서 가는 것 역시 굉장히 속이 쓰렸다. 그래서 그런지 퉁명스럽게 불만 섞인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거 궁금한 거 없으십니까.”
“궁금한 거요?”
“오는 길에도 정원누나한테 툭툭 찔러보고 그랬잖습니까.”
“본의가 아니었어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가시 돋친 말이 오고갔다. 이연아가 정원누나를 갈구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본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불안해야 하는가.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운전을 하고 있자 이연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운전하는 사람 더 괴롭힐 생각 없어요. 아까도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고.”
“그렇습니까.”
“한강휘씨 척 봐도 여자랑 못 친해질 것 같은 성격이니까요.”
“아니, 하. 예. 맞습니다.”
얼굴이 두 배는 더 찡그려졌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 더 서글펐다. 이연아는 소리를 낮춰서 나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괜히 정원 오빠나 정하씨가 깨있으면 위험하니까요.”
“뭐가요?”
“괜한 소리 꺼냈다가 저만 이상해 질 수도 있잖아요.”
“아, 뭐. 그럴 수 있죠.”
그러니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 자리에서 나한테 쏘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좀 긴장이 풀린다. 괜히 내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몸에 긴장을 풀자 운전이 다섯 배는 편해졌다. 얼마나 지금까지 긴장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연아씨도 주무세요. 오늘 일정 기니까.”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어떻게 자요.”
“그거 예의 바르시네. 그래도 그냥 주무세요. 저 옆에 있는 사람이 자는 거론 잘 안 조는 타입이거든.”
“음, 그럼 염치 불구하고.”
이연아는 의자를 조금 젖히더니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게 편했다. 드디어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마 이연아도 나와 둘이서만 깨있는 것은 썩 불편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예의를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 못 이긴 척 눈을 감은 것이겠지. 서로 윈윈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더 가자 앞에서 달리던 성규네 차가 구석 길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서 5분 정도를 더 가자 펜션이 보였다. 도착지인 모양이었다. 따라 들어가서 차를 세웠다. 펜션은 나무로 지어진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었다. 앞엔 바닷가가 있었고 근처에 아무것도 없다는 점은 좀 신경 쓰이지만 우리끼리 놀기엔 참 좋아보였다. 히터를 끄고 창문을 조금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곧 셋 다 정신을 차렸다.
“으음, 도착했어?”
“어. 도착했어. 내려.”
“후아아암.”
정원이가 하품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나머지 둘도 비실비실 차에서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짐을 옮기는 것이었다. 다 같이 짐을 옮겼더니 금방 다 옮길 수 있었다. 펜션 안을 들어가 보니 나무로 지어졌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굉장히 신식이었다. 굉장히 넓고, 아주 큰 중앙공간을 제외하고서라도 방도 세 개나 있었다.
“야, 여기가 8명이서 지내는 곳이라고?”
“그렇다던데?”
“대단하네.”
구석구석 돌아봤더니 요리를 할 만한 부엌도 있었고 각각 잘만한 방도 꽤 상태가 괜찮았다. 시설이 신식이라 그런지 바깥이 꽤 추웠는데도 방 구석구석까지 따뜻했다. 무엇보다 바닷가가 한 눈에 보이는 게 최고였다. 한 눈에 봐도 하루 빌리기 비싸 보이는 펜션이었다.
“그래서 뭐하면 좋냐?”
“뭐든 괜찮지. 뭣하면 지금부터 술 마실래?”
“어우야. 오늘 늦게까지 마실 거면서?”
“뭐야, 뭐야? 강휘 지금 빼는 거야?”
서진이와 말하던 중에 정원누나가 어느새 옆으로 와서 나를 비웃었다. 조금 불이 붙는다.
“내가 언제 술 빼는 거 봤어? 오, 좋아. 소주 한 박스 사왔었지? 오늘 한 번 죽어 볼까?”
“죽어? 누가? 아, 강휘가 죽는다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을 모아놓은 곳으로 척척 걸어갔다. 정원누나와 바로 소주를 들고 와서 까려는 순간 성규가 와서 소주를 뺏어갔다.
“술은 저녁 바베큐 굽고 부터 마시자. 설마 벌써 초칠 건 아니지?”
“어, 어.” “무, 물론이지.”
정원누나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짜로 바로 술판을 벌일 생각에 가득 찼었지만 성규의 눈이 너무 무서웠다. 나나 정원누나나 꽤나 술을 좋아한단 말이야. 성규에게 등 떠밀려서 바닷가로 나왔다. 바닷가엔 이미 여자들이 나와 있었다. 서진이는 홀로 바베큐 정리 중이었다. 슬쩍 서진이 옆으로 갔다.
“뭐냐? 좀 쉬지 그러냐. 운전하면서 안 피곤하냐?”
“아니, 성규한테 쫓겨났어.”
“뭐하다가?”
“정원누나랑 술 먹겠다고 깝치다가.”
“으하하학! 너 진짜 심하네! 으하하학!”
서진이가 배꼽을 잡고 자지러지며 웃었다. 쪽팔린 걸 가리려고 꼬챙이에 고기를 끼우면서 손질을 했다. 그러자 서진이가 내 손에서 물품을 뺏어가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하여간에 운전한 놈은 오늘 일 못해. 저리가라. 훠이, 훠이.”
“내가 까마귀냐. 그리고 짐은 같이 날랐잖아.”
“그럼 그 무거운 걸 나 혼자 들리? 됐으니까 저리 가서 놀아. 놀기 싫으면 다시 들어가서 쉬든가. 얼른!”
“아니, 아이씨. 밀지 마. 알았어.”
서진이의 등쌀에 밀려 일도 못하고 바닷가로 밀려났다. 같이 쫓겨났던 정원누나 역시 어느새 여기로 와있었다. 바닷가로 가자 인기척을 느낀 정하가 나를 보고 그 너머에 있는 서진이를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 맞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구나.”
“어?”
“아냐. 강휘 오빠는 운전 했으니까. 바닷가 구경은 이따 더 하지, 뭐.”
그리고는 정하가 옆에 있던 정원이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더니 이연아와 정원누나에게 말했다.
“서진오빠 혼자 일하고 있대요! 도우러 가야지!”
“아, 서진이도 참. 같이 좀 쉬다가 일 하면 될 걸!”
“그건 확실히 그러면 안 되죠.”
정원누나와 이연아도 정하를 따라 서진이 쪽으로 갔다. 정원이는 사람들을 따라가려다가 정하의 눈짓에 얌전히 제자리에 서있었다. 도우러는 가야겠으니 가야하는데 정하의 눈빛 하나에 움츠러들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하가 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너랑 놀아주래.”
“뭐?”
“너랑 놀아주는 것도 일이래. 너 피곤하니까.”
“푸흡, 그것 참.”
정하다운 센스였다. 웃음을 참다가 정원이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고 결국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으하하하! 하하! 야 너, 푸하핫!”
“뭐, 뭔데? 나 뭐 묻었어? 왜 내 얼굴 보고 웃는데?”
“아냐, 아닌데, 으하하하!”
“아, 진짜 뭐냐고!”
오랜만에 속에서 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 만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상황이 너무 웃겨서, 정원이의 표정이 웃겨서, 그리고 정원이가 짜증을 내는 것이 웃겨서 그래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하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면 대성공이었다. 아침부터 속을 쓰리게 하던 우중충한 감정들이 시원하게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정원이는 짜증을 내다가 그래도 내가 계속 웃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퉁명스런 얼굴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내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그 자리에서 지켜봐주었다.
[작품후기]쉬어가는 화네요. 4부 뒤쪽 내용 빨리 쓰고 싶다...
오늘도 부족한 점 많은 글에 관심 가져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 이예은 => 이연아 / 서진이 => 서진오빠 / 있데요 => 있대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