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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12화 (112/138)

111회

chapter4그렇게 우물쭈물하며 주말을 보냈다.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고 반복적인 일상을 시작했다. 출근하고, 식사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운동하고, 고민하다, 잠에 든다. 그런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 주엔 우연히 정원이를 마주쳤다. 정원이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움츠러들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기색으로 지나갔다. 정원이는 이쪽을 눈치 채고도 그냥 지나갔다. 아는 체하지 않고 긴장하고 있는 나를 지나 제 갈 길을 갔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 순간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화해는커녕 정원이와 평생 말 한마디 못 나누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옛날이라면 나는 정원이를 끊어냈을 것이었다. 과거의 내가 바라보기에 이번 일은 내 잘못도 있고, 정원이의 잘못도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사과는 당연히 내가 먼저 했을 것이고, 정원이가 받아준다면 그걸로 끝. 정원이가 받아주지 않아도 그걸로 끝이었겠지. 정원이가 받아주면 여전히 친한 친구로 지냈을 것이요, 받아주지 않는 순간 정원이와 관계를 끊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일주일을 홀로 보내며 내가 느낀 것은 정원이가 내 일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연아를 만나러 가는 날조차도 그랬다. 나는 항상 정원이를 약속장소에 데려다주곤 했다. 정원이는 그때마다 미안했는지 가지 않는 날보다 유난히도 더 재잘거렸고, 나는 그걸 위안삼아 정원이를 데려다주곤 했다. 그래, 그조차도 일상이었던 것이다.

평일 날 오늘 한 업무를 함께 떠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차 조수석에 항상 태워가는 사람, 주말이 되면 나와 함께 노는 사람, 힘든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말할 사람, 힘든 일이 가장 많이 생기는 사람, 그 모든 것이 너였다. 정원이는 어느새 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 주차, 화요일. 드디어 나는 정원이를 불렀다. 네가 내 일상이 되어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조급한 마음이 가득했다. 너와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 퇴근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줘. 부탁이야.]

화요일 기상하자마자 친 메세지는 끝내 1이 줄어들지 않았다. 카톡을 차단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외면이요, 무시였다. 떨어지는 무저갱엔 끝이 없었다.

수요일이 돼서 나는 점심시간에 홍보팀을 찾아갔다. 그런데 정원이가 없었다. 마치 내가 홍보팀에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듯 했다. 홍보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정원이의 행보를 물어보자 홍보팀장님은 태연하게 답했다.

“밥 먹으러 갔어요.”

“그럼 언제쯤 돌아오겠습니까?”

“아마 점심시간 내내 안 돌아올 걸요?”

마치 내가 있는 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고개를 숙이고 홍보팀을 나왔다. 마치 나와 정원이가 싸운 것을 광고하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지만, 체면이나 사회적 위치와 같은 것은 이미 내게 뒷전이 되어있었다.

목요일이 돼서 나는 아예 정문에 서서 기다렸다. 주차장을 통하지 않고서야 정문을 통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세 시간, 네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특히나 내가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나선 것을 아는 총무과 인원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말을 걸때는 정말로 민망했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지만 정원이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10시가 지나고 나서 홍보팀에 올라가봤지만 불이 이미 꺼져있었다. 모두가 퇴근한 이후였던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나갔는지는 알 턱이 없었지만 정원이는 명백하게 나를 피해 도망간 것이었다.

금요일이 돼서 나는 아예 퇴근시간에 홍보팀 앞에 서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홍보팀이 단체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굉장히 작위적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다듬어 입을 열었다.

“다정원.”

만일 정원이가 없다면 굉장히 쪽팔리겠지. 홍보팀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미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내 무리의 사이에서 찾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정원이었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서 무리 사이에 잘 껴서 가면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부른 것이었다. 정원이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무리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나랑 얘기 좀 해.”

“할 말 없어.”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부탁입니다.”

정원이가 차갑게 거절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저자세로 부탁했다. 자존심, 사회적 위치, 회사에서 떠돌 소문, 지금 당장 우리를 보고 있는 대다수의 홍보팀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정원이 너였다. 내 일상에서 비어버린 부분이었다. 네가 사라진 그 날부터 허튼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긍정적인 감정이 모습을 삼킨지 오래였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너였다.

“……고개 들어.”

정원이의 목소리에 서린 가시가 한풀 꺾였다. 누그러든 것이 아니었다. 정원이는 내 돌발행동에 당황한 것뿐이었다. 사회적인 시선을 중시하던 내가 할리가 없다고 생각한 행동을 한 것에 놀란 것뿐이었다. 나 역시 그것을 알았다.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정원이가 대화를 허락했다는 것. 그 뿐이었다.

정원이는 홍보팀 개개인에게 모두 고개를 숙이며 보내고 나서 천천히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조심히 따라갔다. 평소와는 위치가 반대라는 생각이 들어서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것이 이주 만에 처음으로 웃을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원이와 함께 있자마자 생긴 작은 변화였다.

정원이는 카페에 가서 제 몫의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평소와도 같은 초코렛 프라푸치노가 아닌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나 역시 정원이와 같은 메뉴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정원이는 나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뭐가.”

예상했던 질문이었는데도 논타임으로 들어오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순간 벨이 울렸다. 나는 정원이 몫의 벨도 챙겨서 커피를 들고 왔다. 커피를 들고 오는 동안 다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정원이에게 커피를 넘겨주고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정원이 니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말했어.”

“내 기분이 어땠는데?”

“글쎄. 정확히는 알 수 없어. 그렇지만 그 순간에 니가 나한테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지.”

“배신감, 배신감이라.”

정원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틀렸나?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니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는데 들어주지 않았지. 그래, 그것도 잘못했어.”

“부탁? 아, 술자리.”

“어. 그거. 니가 원한다면…….”

“됐어. 됐다고 했잖아.”

정원이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 그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되는 기분이었다.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고 해서 여기서 기죽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힘들게 만든 자리였다. 두 번은 없을 지도 몰랐다.

“아무튼, 내가 다 미안해. 니가 원하는 게 뭐든 다 들어줄게. 니가 이연아씨 만난다고 뭐라고 안 할게. 아니, 다른 사람 만나도 돼. 뭐라고 안할게. 그러니까.”

“너, 음.”

정원이는 내 말을 끊고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입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 채고 나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정원이는 얼굴을 굳혔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이가 다시 나를 바라봤을 때 정원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화해하자. 너랑 화해하고 싶어. 아니지, 용서해줘.”

“너, 하아. 그래.”

정원이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화도 안나?”

“안나.”

“내가 억지 부린 건?”

“괜찮아. 내가 더 억지 부렸으니까.”

“내가 지금 하정원씨 보고 싶다고 하면?”

“정원누나한테 부탁해야지. 뭐, 많이 미안하지만.”

내 대답을 듣자 정원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그 상태 그대로 중얼거렸다.

“이전처럼은 안 돼.”

“물론이지. 비참한 기분 안 들게 할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야. 그래. 고마워.”

정원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상관없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앙금이 사라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풀어야겠지. 이제는 서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원이는 내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냐, 내가 미안해.”

그렇게 나는 그 날 정원이와 화해를 했다. 내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 일상을 찾기 위해 나는 그렇게 개처럼 배를 보이고 정원이에게 화해를 구걸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것뿐이었으니까.

***

바로 다음 날 토요일이 돼서 정원이는 이연아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미리 잡아놓은 약속이라 전날 취소하기가 애매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곤 나보고 정원누나를 만나러 가보라고 했다. 내가 그에 대해 질문하자 정원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쪽 분도 걱정하실 거 아니야.’

니가 지난 주 동안 어땠을 지는 대충 상상이 가니까. 정원이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정원누나와 약속을 잡았다. 술자리 때문에 싸운 건데 술자리로 불러도 될지에 대해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술자리 외의 장소에서 정원누나를 만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더 앞섰다. 대신 서진이를 함께 불렀다. 서진이 역시 내가 술을 산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술자리에 나왔다. 정원누나는 나를 만나자마자 얼굴에 근심을 가득 담고 말했다.

“걱정했어.”

“어? 그래?”

“어. 매 주 부르다가 저번 주에 아무런 말도 없이 안 불렀잖아. 뭔 일 났나 했어.”

“아, 하하, 미안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정원이와 싸운 얘기. 정원이와 싸운 계기. 정원이와 화해한 얘기. 차라리 화해를 해서 정원누나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마 싸운 상태 그대로였다면 정원누나에게 털어놓지 못했겠지. 그러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자 정원누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제대로 풀린 게 아닌 것 같은데.”

“그쵸?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죠? 야, 강휘야. 너 그거 좀, 어, 그런데.”

서진이도 정원누나의 반응에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 대해 답했다.

“뭐, 앙금이 좀 쌓였을 수야 있지. 천천히 풀려고.”

“그런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정원누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들만이 느끼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조금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실 처음 보자마자 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정원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누나. 미안해.”

“어? 뭐가?”

“나 정원이랑 화해하려고 누나 판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미안해.”

그러자 누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해한다는 미소였다. 마음 한 구석이 찔리는 기분이 드는 미소였다.

“강휘 니가 최대한 고민해서 그렇게 한 거잖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그리고?”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데.”

술자리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예상했던 반응이기도 했다. 정원누나라면 쉽게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래서 말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정원누나는 들어주겠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어주겠지.

물론 나는 정원누나가 정원이를 만나고 싶은지, 만나기 싫은지, 혹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정원누나는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결과는 최악이었지만. 결국 나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수긍할 뿐이었다.

“뭐, 그렇지.”

“아, 맞다. 강휘야. 그러고 보니 나 좋은 게 있는데.”

서진이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게 있다는 듯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나 아는 삼촌이 펜션 빈다고 놀러오라고 했거든? 날 잡고 갈까?”

“어? 아, 됐어. 나 혼자 가면 정원이도 싫어할 거 같고.”

“정원씨도 데려오면 되잖아.”

“어?”

서진이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니가 섭섭한 감정 풀고 싶다며. 그럼 펜션으로 여행 한 번 가서 풀어주면 되지.”

“그런가?”

“괜찮은데? 오, 서진이 좋은 생각인데.”

“하하. 그쵸?”

정원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는 정원누나까지 자신의 말에 긍정하자 기세등등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둘이 가기 껄끄러우면 아예 대규모로 가면 되지. 나랑 정원누나랑 너랑 정원이랑 어, 삼촌이 여덟 명까지 된다고 했으니까 몇 명 더 데려가면 되고.”

“으음. 나는, 으응. 그래. 좋네.”

정원누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고민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찮은 부분이었지만 서진이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나 역시 설득이 되고야 말았다.

“어, 일단 정원이한테 물어볼게.”

“그래.”

“정원이가 싫다고 하면 안 간다?”

“벌써부터 잡혀 사는구만. 그래, 알았어.”

그렇게 나는 어영부영 서진이의 페이스에 몰려버리고 말았다. 술자리 역시 마찬가지라 나와 정원누나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마시는 게 아닌 시끄러운 분위기로 술을 마셨다. 서진이 한 명이 얼마나 분위기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지를 몸소 다시 깨달은 날이었다. 서진이는 좋은 친구지만 굉장히 피곤하다.

[작품후기]해결이 된 듯 안 된 듯 찜찜하시다면, 예. 의도한 바입니다.

저번화... 를 쓰면서 아 이거 그대로 냈다간 어, 큰일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연참을 했습니다. 물론 이번 화도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화는 아니지만요.

오늘도 부족한 글 관심 가지고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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