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08화 (108/138)

107회

chapter4정원이와 술을 마시러 가는 게 언제였지? 굉장히 오래간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회식을 제외하면 최근 술을 마신 것이 모두 정원누나와 마신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두 번의 술자리는 내게 감정을 무던히도 요동치게 했었다. 그래서 더 멀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이네 집 근처로 이동해서 술 마실 만한 곳을 골랐다. 정원이는 고기를 먹자고 했지만 새로 산 옷을 들고 고기 냄새를 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원이도 내 의견을 듣고 나서 별다른 이견 없이 동의했다.

정갈한 분위기의 주점에 도착했다. 따로 칸막이가 있는 것이 이전에 정원이가 징징 짜던 곳이 생각나는 곳이었다. 물론 그곳은 그 후로 근처에 얼씬거린 적도 없었다. 정원이 역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너도 그 생각했지?”

“어.”

“끄응.”

정원이가 눌린 것 같은 신음소릴 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정원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설마 오늘도 그러겠냐.”

“말이 씨가 된다던데.”

“쓰읍.”

나도 정원이도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발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주점에 들어가서 간단한 국물 요리와 고기 요리를 시켰다. 정원이에게 무슨 술을 마실 건지 물어봤더니 오히려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항상 레몬사와 시켜서 줘놓고 왜 갑자기?”

“아니, 그냥. 딴 거 마시고 싶진 않은가 싶어서.”

“음, 그런가? 어, 그래. 그럼 꿀 막걸리 마실래.”

“꿀 막걸리? 어디보자. 있네, 그래.”

“응, 연아랑 저번에 마셨을 때 괜찮더라.”

그렇구나. 이연아랑 술도 같이 마셨었구나. 어제 다짐한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속이 들끓는 것을 가라앉혔다. 미소를 지어 얼버무렸다.

사실 정원이가 다른 사람과 술 마신 거에 대해서 화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 역시 당장 어제 정원누나와 술을 마시고 오지 않았는가. 내가 정원이와 진짜 연인관계였으면 어제 일에 대해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사과하기엔 이상했다. 그래, 내가 화를 내기에도, 정원이에게 사과하기에도 이상한 관계였다.

술은 꿀 막걸리만을 시켰다. 내가 술을 꿀 막걸리만 시키자 정원이가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니 취향엔 별로 안 맞을 텐데.”

“뭐, 어때.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지.”

“언제부터 그랬다구.”

“옛날부터 그랬어.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상관없고.”

“누가 뭐라니. 그냥 니 취향에 안 맞을 거라고. 너무 달아서 여자애들한테 잘 팔린다고 했거든.”

“이연아씨가?”

“거기 주점 직원? 직원이라고 그러나? 아무튼 서빙 하는 사람이 그랬어.”

“아, 그래?”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주문을 바꾸지 않았다. 정원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고집불통.”

“아니 왜 그렇게 질색하냐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말 죽어라 안 들어쳐먹는다고 생각한 거지.”

“뭐 어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정원이도 그 이상 뭐라고 하진 않았다. 결국 음식과 술이 나오고 한 잔씩 서로 따라주고는 잔을 부딪쳤다. 꿀 막걸리라고 해도 그냥 막걸리와 크게 색깔이 다르거나 하진 않아서 조금 안심하던 차였다.

“건배!” “건배!”

“윽.”

내가 침음을 삼키자 정원이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거 봐. 안 맞을 거랬지?”

“아니? 맛있는데? 먹을 만한데?”

“아, 이 진짜. 에휴. 븅신. 이 형님이 참는다.”

정원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억지로 한 잔을 넘기고는 물을 들이켰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애당초 나는 단맛을 썩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싫어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입안에 끈적일 정도의 단맛을 좋아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술은 더욱 그랬다.

한편으로 이름부터가 꿀 막걸리인데 안 달아서야 되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빈 잔을 내밀자 정원이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 이거 나는 맛있으니까 그렇게 인상 쓰고 마실 거면 그냥 딴 거 먹으라고!”

“아, 왜 짜증을 내고 그러냐.”

“니가 이상하게 고집 부리잖아!”

정원이가 소리를 높였다가 애써 참는다는 듯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에 꿀 막걸리를 가득 따르고 원 샷을 했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렇게 원 샷을 하고 나서 정원이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술 마시는 건데 왜 삔또 상해있냐고. 나 너한테 뭐 잘못했었냐?”

나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이 도리어 유치하고 답답하게 고집을 부리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스스로 반성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 삔또 상한 건 아니고, 고집 부린 건 맞아. 그냥 마셔보고 싶었는데 더 고집 피워서 미안하다.”

정원이는 내가 사과한 것을 보고 더욱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로 뭐 꼬운 거 있는 건 아니지?”

“어.”

“근데 왜 그러냐구.”

칭얼거리는 말투에 고개를 살짝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원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이 바보야.”

“미안해.”

“미안하다고?”

정원이가 눈을 흘기더니 손을 들어 소주 두 병을 시켰다. 그리고는 그 병을 손짓하며 말했다.

“그럼 이거 한 병 이 자리에서 원 샷 해.”

그걸로 용서하겠다는 말투였다. 솔직히 어제도 술을 마셔서 달리기는 곤란했지만 괜한 고집을 피우다가 분위기를 잡친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소주를 까서 바로 원 샷을 했다. 다 마시고 나서 소주를 거꾸로 들어 머리에 올리자 정원이가 엄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어린아이를 혼내는 말투였다. 내가 미묘한 표정을 짓자 정원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안 그래. 안 그럴게.”

“진작 그럴 것이지.”

그제야 정원이가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눈이 살짝 풀린 것이 아까 홧김에 들이킨 한 잔 덕분에 정원이도 술기운이 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감정이 널뛰는 걸까. 하긴 나도 소주 한 병을 들이켰더니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것 같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마신게 마지막이 대학교 때 아니었던가? 정원이랑 마실 때도 많이 마시기야 했었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마시진 않았었다. 젊은 날에 치기로 배운 교훈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굴하게 웃으며 정원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원이는 안주도 먹지 않고 다시 막걸리를 따라서 원 샷을 했다.

“야, 너 그렇게 달리면 내일 힘들어.”

“쉿! 나 아직 너 용서 안 해조써!”

“하아.”

드디어 혀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아마 저기서 두어 잔 더 마시면 픽하고 죽어버리겠지. 차라리 그게 나을까? 그렇게 생각했더니 정원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울상을 지었다.

“힝. 어지럽따.”

“그러게 그렇게 마시지 말라니까.”

사실 내가 꿀 막걸리를 마신 건 대부분의 이유가 내가 이유 없이 부린 고집 때문이었지만 아주 조금은 정원이가 다 마시기 힘들기 때문에 마신 것도 있었다. 사실 이제는 그 쪽에 더 무게가 실릴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정원이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자신의 옆자리에 손바닥을 두어 번 툭툭 쳤다.

“온나.”

“뭐?”

“내가 몬 가게쓰니까, 니가 일루 온나.”

인상을 찌푸렸다가 바로 풀었다. 내가 부린 패악질의 대가는 술 취한 녀석의 뒷바라지였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벌써부터 후회가 됐다. 이런 마음과는 반대로 얌전히 정원이가 두들기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나도 조금 주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어나는 순간 나 역시 머리가 핑 돌았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이는 내가 자신의 옆 자리에 앉자 만족한 듯 환하게 웃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얼굴을 굳혔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원이가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중대 사안을 발표하듯 말했다.

“내한테 하나만 더 말해주면 니 용서해주께.”

“뭔데.”

“니 요새 내한테 서운한 거 인나?”

정원이가 간신히 짜내듯이 말을 꺼냈다. 대답이 궁해졌지만 나는 태연한 기색을 했다. 술 취한 어르신들을 달래는 것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차분한 태도로 정원이에게 말했다.

“없어, 그런 거.”

“근데 와카노.”

“와카노? 뭔 소리야.”

“와 그라냐고.”

정원이는 화를 내는 것 같기도,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술에 의해 감정이 널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정원이는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술의 힘을 빌어 진심을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이 술자리는 처음부터 정원이가 내게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내가 쉽사리 대답을 못하고 있자 정원이가 짜증을 내듯이 재차 말했다.

“니 와 요새 자꾸 내 눈치 보냐구.”

“눈치를 본다니.”

“보잖아!”

정원이는 소리쳤다가 제 소리에 자기가 놀란 양 흠칫했다가 입을 가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안정되자 칭얼거리며 말했다.

“니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바보가 아이라고. 보인단 말야.”

“뭐가.”

“니 요새 자꾸 먼 말 할라다가 말잖아.”

숨을 삼켰다. 모르는 줄 알았더니 모른 척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요즘 나는 정원이와 말할 때 한 번씩 미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주로 이연아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리고 정원이가 나를 정말 연인처럼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하곤 했다. 어제 술자리를 가지며 잘 해보겠노라 다짐했지만, 이미 정원이는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한테 불만 있나? 아님 내 요새 니한테 먼 잘못핸나?”

내가 대답을 못하자 정원이가 나를 당겨서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 정원이의 떨리는 목소리만 들렸다.

“왜 안 말해주는데. 그게 글케 말하기 힘드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내 무섭다. 진짜 무섭다고. 내가 방금 바보가 아이라고 했는데, 내 바보 맞다. 니 왜 화를 내는지 진짜 모르겠다. 근데 니 나한테 먼가 화내고 있잖아. 아님 그냥 요새 힘든 일 인나? 뭐라도 속 시원하게 말해도. 내가 니한테 겨우 요거바께 안 된나.”

정원이가 내뱉는 말은 불안과 떨림이 가득했다. 내가 이렇게나 정원이를 불안하게 했는가. 정원이는 모른다고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는 동안 정원이도 내 균열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가. 아니, 확신하고 있었는가.

아니, 정원이기에 더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었다. 이연아를 만나기 전에 나는 분명히 정원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었다. 다짐할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정원이가 원하면 옆을 내어주고, 정원이가 원하면 끌어안아주고, 정원이가 원하면 무엇이든 해주는 상태였던 것이었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라고 바라본 이연아의 한 마디 덕분에 나는 그것에 거리낌이 생겼다. 그 거리낌을 대상인 정원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정원이가 주먹을 쥐고 내 가슴을 통, 통 하고 쳤다.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듯 가볍게 노크하듯이, 통, 통 하고 쳤다. 그러나 내겐 그 두드림이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완전히 뒤집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이는 그렇게 한참을 두드리다가 결국 움직임을 멈췄다. 결국 제 술버릇을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진 것이었다.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정원이가 이렇게 자는 척을 할 순 없겠지. 방금까지 그렇게 뜨거운 감정을 부딪쳐오던 정원이라면 더욱.

나는 그런 정원이를 품에 안고는 고개를 숙여 정원이에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내 본심. 그리고 내 억지. 내 고집. 조심스럽게 그것을 하나하나 펼친다.

“나는 정원아.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니야. 단지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운 거야. 솔직히 모르겠어. 너를 이렇게 껴안고 있으면 니가 너무 소중해서 놓아주고 싶지 않아. 평생 내 옆에서 가둬놓고 싶어. 너를 이연아한테 보내지 않고 평생 가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내가 이걸 참느라 얼마나 힘든지 몰라. 이게 잘못됐다는 건 알아.

그래서 난 참을 거야. 니가 원하니까 난 너의 가장 친한 친구 한강휘로 남아있을거야. 아마 오늘이 지나면 너에게 말해주지 않겠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번엔 니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더 조심히 연기할 거야.

그러니까 미안해. 니가 원하는 말은 너한테만은 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해.”

네가 듣지 못할, 그러나 네가 깨면 하지 못할 그러나 너에게 전하고 싶은 그런 모순적인 말을 나는 담담히 내뱉고 있었다. 네가 손대면 부서지는 것처럼 소중히 끌어안으며, 네가 듣지 못할 고해를 하고 있었다. 술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켜서일까. 그래서 내뱉을 수 있는 걸까. 머리가 어지럽다. 감정이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작품후기]아마 정원이가 뒤지지 않았다면 그 다음은 어제 누구랑 술 마시러 갔냐고 물어 봤을 겁니다. 그럼 강휘도 정신을 좀 차렸을까요...

무지갯빛황혼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부족한 점이 많은 글 항상 관심 가지고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