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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07화 (107/138)

106회

chapter4처음 소주병을 들었을 때부터 오늘 술자리는 길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고, 이제는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자리를 더 길게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따뜻한 분위기가 지나간 자리엔 미적지근한 온도가 남을 뿐이었다. 어색하게 몸을 빼자 정원누나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니가 제일 힘들 거야. 알지?”

“어.”

“너무 힘들면 부르고.”

“땡큐.”

“고마울 게 뭐 있니. 어차피 술값도 니가 내는데.”

“그래도 고맙다고.”

“그래.”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하고 가게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며 서로 돌아섰다. 차를 산지 얼마나 됐다고 자연스럽게 택시를 부르게 됐다. 옛날 같았으면 술을 마시든 뭘 하든 기어이 지하철을 타고 갔을 텐데. 사실 차를 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을 벌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택시에 타서 핸드폰을 보며 의미 없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정원이의 카톡을 켜봤다가, 정원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그러나 결국 용기를 내진 못하고 손가락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방금 정원누나에게 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창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정원누나 때문에라도 더 전화를 걸기가 어려웠다. 정원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해주었을 때 원인 모를 조그마한 균열이 느껴지던 것을 떠올렸다. 그 작은 균열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정원이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정원누나의 도움을 받아 정원이에 대한 태도를 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망설임의 형태는 다양했다. 새로운 형태의 망설임이 생겼다.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내 자신이 한심해서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싶진 않았다. 최소한 오늘 정원누나에게 털어놓은 문제는 끝맺어야했다. 정원이의 의견을 존중한다. 정원이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나 역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친구로 대한다. 연인 행세를 하는 비틀린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면 그 역시 유지한다. 이연아를 친구로 여긴다면 그것으로 좋다. 혹여나 정원이가 그 이상으로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이연아를 연인으로써 인정하고 나와 친구로 지내고 싶어 한다면 그래,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원이가 나를 이연아보다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면, 참고 있었던 새까만 감정이 다시 치솟는다. 정원이에 대한 집착이,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는 자신과 부정하는 자신이 다투기 시작한다.

그것 역시 인내하겠다.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다.

상반된 감정이 나를 흔들었다. 머리를 흔들어 감정을 털어냈다. 쓸데없는 걱정을 털어냈다. 설령 정원이가 이연아와 사귀겠다고 해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은 나일 것이다.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얕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아니, 그렇게 확신하려고 했다. 그렇게 집착하는 내 자신을 달랬다. 망설임을 묶었다. 마음 한 편으로 밀어 넣는다. 피곤했다.

오늘 생긴 다른 쪽의 망설임은 아직은 크지 않으니까, 이 역시 마음 한 편으로 쑤셔 박았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내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키고, 감정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토대로 그렇게 나는 또 다시 문제를 쌓아올렸다.

***

마침내 정원이와 옷을 보러 나왔다. 그런데 정작 정원이는 만나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제 술 마셨니?”

“몇 잔밖에 안 마셨는데. 오늘 상태 괜찮아.”

“으음, 뭐 그러려니 하자.”

정원이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꺼내려던 말을 삼키는 듯 했다. 나는 그 반응에 대해 트집을 잡으려다가 왠지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 두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웬 백화점이냐?”

정원이는 신촌이나 홍대 같은 곳에서 싼 옷을 대충 집어서 사곤 했다. 옷 잘 입는 사람들도 그렇게 입는다곤 하지만, 정원이는 반대로 그렇게 산 옷들은 조합하지 못하곤 했다. 즉 스스로 수렁으로 빠져드는 타입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해, 굉장히 쓰레기 같은 핏의 옷을 사곤 했다. 나라고 크게 다른 것은 아니어서 굳이 지적하진 않았지만, 하여간에 정원이가 나를 백화점으로 부른 것 자체가 굉장히 신기했다. 정원이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정하랑 연아한테 옷을 고르는 것에 방법을 배운 게 있어.”

“뭔데.”

정원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옷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전시대에 걸린 무난한 옷을 세트로 사면 돼.”

“허어.”

그것 참 묘하게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요즘 정원이가 입는 옷은 대부분이 정하의 선택이었다. 최근엔 이연아씨의 선택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즘 정원이가 입고 다니는 스타일을 보면 정원이가 나보다 옷을 더 잘 입는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정원이라도 그만큼 정하나 이연아가 옷을 골라줬다면 보는 눈이 늘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원이는 더 기세등등해져서는 힘차게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처음 보이는 가게로 바로 들어가서 마네킹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저거부터 입어봐.”

그 모습이 굉장히 기시감이 들었다. 불안한 느낌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히 물어봤다.

“혹시 다 입어보게 할 생각이냐?”

“그럼? 안 입어보고 사려고?”

정원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곳엔 내가 알고 있는 정원이의 모습은 없었다. 이미 인형놀이를 극한으로 당한 결과 그것을 즐기게 된 괴물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두려움에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정원이는 그런 내 팔을 붙잡으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옷 봐달라고는 니가 말했다?”

“어, 어?”

“잔말 말고 입어.”

“어, 어.”

나는 멍청하게 대꾸하며 정원이가 고른 옷을 입었다. 겨울 패션답게 조금 겹옷이었다. 검은색 슬렉스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위에 검정색 가디건이 걸쳐져 있었다. 입고 나니 전체적으로 깔끔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핏이 맞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물론 조금 색감이 단조로운 감은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게도 꽤나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탈의실에서 나오자 정원이가 순간적으로 멈춰서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 같은 반응에 방금까지 거울을 보며 들었던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다.

“그렇게 이상한가?”

“아니? 아니, 아니, 아니? 거, 거봐! 역시 강휘 넌 그렇게 칙칙한 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칭찬으로 들어도 되냐?”

“물론이지.”

“그럼 이거 바로 사면 되지?”

“미쳤냐?”

정원이가 처음 봤을 때 보였던 싸늘한 얼굴을 했다. 누나가, 누나가 자꾸 떠올랐다. 벌써부터 다리가 아픈 느낌이었다. 옷을 본지 겨우 10분도 안 됐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정원이는 핸드폰으로 내 모습을 찍더니 말했다.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딴 거 보러 가자.”

“사진은 왜 찍는데?”

“그, 그냥 가장 괜찮은 거 고르려고 찍어본 건데?”

“그러냐.”

그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 후로도 정원이는 나에게 여러 옷을 입혀봤다. 다만 누나와 차이점이 있었다면 누나는 적당히 둘러보다가 옷을 골라서 내게 입혔다면 정원이는 그냥 옷 가게를 지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마네킹이 있다면 들어가서 내게 입혀보는 식이었다. 덕분에 누나보다는 둘러보는 게 훨씬 빨랐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정원이는 마지막으로 입힌 세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일단 지금 입고 있는 건 사자.”

“지금 거?”

“응, 헤헤. 이거랑 처음 거는 너 진짜 잘 어울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흰색 목 폴라티에 청바지, 그리고 베이지색 롱코트였다. 색이 옅은 것은 아무래도 정원이나 나나 남자 패션에 대해 너무 밝거나 특이한 색은 꺼리기 때문일 것이었다. 깔끔한 느낌이 들고 무난한 패션을 원하는 점이 비슷했다.

만족스러운 듯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정원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마치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달콤한 태도였다. 정원이의 저런 식의 반응이 나를 헷갈리게 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정원이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조금씩 다가와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래에서부터 올려봤다. 어느새 내 소매를 쥐고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옷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야. 마음에 들어.”

“마음에 안 들면 말 해두 되는데.”

“아냐, 진짜로 마음에 들어.”

나는 미소를 지어 정원이를 안심시키고는 탈의실로 도망쳤다. 정원이가 흡족한 듯 웃고 있던 얼굴을 떠올렸다. 정원이가 친구로 남아달라고 말한 때를 떠올렸다. 정원이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중얼거린 고해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감정을 다잡았다. 그래, 정원이는 별 생각이 없는 거야.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옷이 어울린다고 말했을 뿐이야. 이상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

탈의실을 나서고 계산을 했다. 정원이가 추천한 첫 번째 매장에서 골랐던 옷 역시 샀다. 그리고는 더 안 봐도 되겠냐는 정원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정원이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거 두 세트면 되겠냐?”

“아니 어차피 누나랑도 몇 벌 샀다니까.”

“음, 뭐 니가 좋다면 됐긴 한데.”

“됐고. 니 옷이나 좀 보자.”

“으응?”

정원이가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뭔가 기분이 나빠져서 노려봤더니 정원이도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옷 존나 못 입잖아.”

“이런 씹, 나도 마네킹 걸려있는 거 골라주면 될 거 아냐.”

“그치만, 옷 이미 많고.”

“제발 한 벌만 사자.”

“아니, 대체 왜 그렇게 필사적인 건데.”

정원이는 질려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차라리 방금 전까지 보이던 불안해하는 모습보단 나았다. 결국 내가 어르고 달래자 못 이긴 척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래. 어차피 내 생각보다 빨리 고르기도 했구.”

“그래, 고맙다, 고마워.”

“그치? 고맙지?”

정원이는 재잘거리며 쫓아왔다. 그렇게 여성복을 고르려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마치 방금 사서 입고 있는 옷과 세트인 것처럼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정색 플레어스커트, 그리고 라인을 살리는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는 마네킹이 보였다. 홀린 듯이 걸어가서 점원에게 정원이의 사이즈에 맞는 것으로 달라고 했다. 정원이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핑계를 대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울릴 것 같아서.”

“응.”

정원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탈의실을 들어가던 정원이의 귓불이 조금 붉은 것 같았다. 정원이가 탈의실에 가있는 동안 매장을 둘러봤더니 작은 악세사리가 보였다. 조그마한 은색 팔찌였다. 지금 사는 옷과 어울릴 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정원이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원이가 나오기 전에 몰래 사서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정원이가 곧 탈의실에서 나왔다. 정원이가 부끄러운 듯 천천히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때?”

“예뻐.”

내가 답하자 정원이는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왠지 커, 커플룩 같네.”

“……그러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입히면서 이런 반응이 나올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쉽사리 대응하지 못했다. 그저 겨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행히 정원이는 내 반응을 보자마자 후다닥 탈의실로 도망갔다. 나는 그 모습을 눈을 찡그리고 바라봤다. 부끄러워하는 네 모습이 너무 눈이 부셨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런 죄악감이 어제의 감정과 섞여 넘실거렸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듣는 사람도 없는데도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쓸었다. 감정을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양이었다. 정원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나, 실없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들끓었다. 모든 순간이 위기였다. 오늘을 잘 마칠 수 있을까. 마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감정을 다잡는 동안 정원이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방금 고른 옷을 계산했다. 내가 사주려고 했더니 제 카드를 내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니가 사게 하려고 했는데, 나도 꽤 마음에 들었으니까 됐어. 애시당초 내 옷 사는 건데, 뭐.”

“그러냐.”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에서 저녁을 해결하려고 했더니 정원이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술 먹자.”

“왜?”

“하여튼 간에. 오늘 차 끌고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정원이가 나오기 전에 미리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말을 듣고 차를 끌고 나오지 않긴 했었다. 그러나 다소 갑작스러웠다. 내가 미묘한 표정을 짓자 정원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나랑은 마시기 싫어?”

“그럴 리가 있겠냐? 내일 월요일이라서 좀 고민한 거지. 그래. 마시러가자.”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내가 그렇게 답하자 정원이가 그제야 얼굴을 풀며 내 등을 떠밀었다. 이동하는 동안 내가 제 몫의 짐을 들어주려하자 정원이는 굉장히 미안해하면서도 순순히 넘겨줬다. 이전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정원이 나름대로 지금의 자신에게 익숙해져가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의 정원이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 정원이를 돕겠다던 다짐은 틀리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정원이에게 적당히 대꾸를 하며 술집으로 향했다.

[작품후기]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오늘 글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

강휘가 삽질하는 걸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는데 이게 영 힘드네용...

오늘도 부족한 점이 많은 글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가계 -> 가게 수정 완료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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