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회
chapter4정원이에게 고해를 들은 날 나는 긴 시간을 고민했고, 나름대로 잘 대처를 했다고 생각했다. 정원이가 깨자마자 어색하지 않게 대했고, 오히려 장난을 치며 평소처럼 대했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이 일생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정원이의 감정이 조금씩, 조금씩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고해를 듣는 것은 신이요, 인간이 아닌 데엔 이유가 있었다.
반차를 쓰고 난 날 이후로도 정원이를 바래다주는 것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집이 아닌 곳에도 데려다 줄 정도였으니 더 했다고 해도 좋았다. 이연아는 평일에도 정원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원이가 약속이 있다고 혼자가려고 했지만, 나는 그 약속장소까지만 이라도 정원이를 데려다주겠노라고 했다.
이연아는 예전에 다정원이 살던 곳에서 정원이를 부르곤 했다. 자신의 직장과 거주지가 그 쪽이라 그런 것일까. 정원이는 자신에게도 익숙한 동네라서 편하다고 말했다. 둘이서 공유하는 공간이라. 언제는 나도 자주 가던 동네이건만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이연아는 정원이를 부를 때 별 것 아닌 핑계를 댔다. 요즘 들어 자주 쓰는 핑계는 옷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정원이는 그 말을 하면서 일요일 약속은 확실하게 기억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외엔 자기 일 좀 봐달라거나, 달콤한 디저트 카페를 찾았다는 등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이연아는 주말에 하루정도는 나와 다정원을 떼놓고 싶어 했다. 정원이가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 주 토요일 역시 약속이 잡혔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을 짐작했다. 나는 알겠노라고 말하고 정원이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정원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게 정원이를 바래다주는 것이었다면, 반대로 평소와 달라진 것은 내가 정원이를 대하는 태도였다. 정작 당일엔 잘 대처를 했으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감정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몸이 멈칫하고 얼굴이 굳어버리곤 했다. 사실 토요일에 정원이가 약속이 있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안도한 것은 바로 나였다.
감정이 곪아 가는 것도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절대로 안 된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고민을 길게 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인정하기로 했다.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러한 생각에 쐐기를 박은 것이 정원이를 이연아와의 약속장소에 데려다준 다음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날 정원이는 하루 종일 신나보였다. 점심을 먹을 때도 콧노래를 불렀고 퇴근을 할 때도 가벼운 걸음으로 통통 뛰어왔다. 물론 퇴근할 때는 항상 기뻐 보이긴 했지만 오늘은 그것보다 더했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아, 알겠어? 흐흐. 말해줄까, 말까.”
“지랄을 해요, 지랄을.”
“나 친구 생겼지롱!”
가볍게 물어본 말이었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어제 정원이가 이연아를 만나고 왔다는 점이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불안함을 부정하며 가까스로 태연하게 물었다.
“누군데?”
“연아. 연아가 선배 우리 친구 맞죠? 그러더라구. 괜히 혼자 걱정했어.”
“그래?”
일단 웃었다. 웃지 않고선 표정이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는 정원이가 재잘거리는 것을 맞대응했다. 잘됐네. 그렇구나. 응. 그러냐. 그런 영혼 없는 대꾸에도 정원이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정원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곪아있던 상처가 터지려하고 있었다.
친구, 친구라는 말을 하였는가. 그녀는 잔혹하고 또한 영악했다. 나와 정원이를 유일하게 이어주던 그 관계에 너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기로 했는가. 우리의 관계를 유일하지 않게 하려는 것, 그것이 네 최후의 수단이었는가. 유일성을 상실하게 하려 하였는가.
아니, 이것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와는 또 다른 새로운 관계였다. 또 하나의 유일한 관계였다. 오히려 우리의 사이보다 더 깊을 수도 있었다. 정원이에게 있어서 남자사람친구는 많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했었다. 동향친구들이 그랬었다. 물론 그 관계는 지금에 와서 색을 바랬지만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러나 정원이에게 있어 여자사람친구는 유일했다. 정원이의 인생에 유일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정원이가 그렇게 신나있었던 거겠지. 이연아는 나와 동일한 선상으로 서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의 관계 사이에 침식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정원이가 나보다 이연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나는, 아니. 너무 나간 생각이었다. 그래, 그렇지 않을 거야. 적어도 아직은 그렇지 않을 거야.
이대로 가다간 언제 정원이에게 이런 꺼림칙한 감정을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들키게 된다면 정원이에게 추궁을 당할 것이요, 결과는 그 날의 고해를 내가 들었다고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해결책을 찾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니, 적어도 이 감정을 토해낼 상대가 필요했다. 곪은 상처가 썩어버리기 전에.
문제는 내 주위에 내가 상담을 할 만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가족과 동성친구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었다. 정원이에 대한 고민을 여자고민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결국 동성친구들이 답을 내릴 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 중에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라고 해봐야 정하와 누나와 정원누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내 고민을 듣고 정원이에게 말하지 않을 사람은 정원누나가 유일했다. 결국 이런 걸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 정원누나밖에 없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흡사 소개팅녀에게 썸녀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상황이었다. 내 꼬락서니가 꽤나 우습고 비참했다.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카톡 1:1 메시지에 오늘 술이나 한 잔 할래요? 라고 쳤다. 곧 바로 메시지 옆에 있던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고 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답변이 날아왔다. ‘좋아.’ 긍정의 메시지였다.
나는 이 답변에 대하여 안도해야할지 껄끄러워해야할지 조차도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이 새로운 고민을 낳는 셈이었다. 일단은 내가 그쪽으로 가기로 했기에 시간이 충분하진 않았다. 다행히 고민을 길게 할 틈도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준비하고 나갔다. 차는 가져가지 않았다.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정원 누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늦었나 싶어 핸드폰을 바라보니 아직 약속시간 전이었다. 다행히 내가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인기척을 내고 정원 누나가 이쪽을 바라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많이 기다렸어?”
“안녕? 나도 방금 왔어.”
“와, 나 늦은 줄 알았잖아.”
“헐레벌떡 뛰어오는 거 보니까 손해는 아닌 거 같긴 한데?”
정원누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아, 혹시 좀 이른가?”
“아니? 완전 좋은데?”
“어차피 내 돈이니까.”
“어차피 네 돈이니까.”
지난번에 정원누나가 마지막으로 핑계거리 삼았던 이야기를 공유하며 웃었다. 지난번에 맥주를 마셨던 곳으로 이동했다. 낮부터 술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였다. 이곳에 들어오자 정원누나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나도 여기 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아, 지역 주민 추천이면 여기가 맞긴 했네. 저번에 서진이랑 마실 때 왔었어.”
“서진이가 추천한 거였어?”
“아니, 그냥 들어온 거였는데?”
그러자 정원누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마시기 좋거든. 난 또 알고 온 줄 알았지.”
“뭐 저번에 마셔보니 괜찮아서 온 거긴 해.”
“그렇구나.”
맥주를 시키고 감자튀김을 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서로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씹어댈 것이 비단 감자튀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원누나는 자신의 직속상사를 한참을 씹어댔다. 자꾸 치근거린다고. 아직도 그런 게 남았냐고 대꾸했다가 정원이의 사례를 떠올렸다. 그래. 아직도 그런 사람이 남긴 했지. 내가 혼자 물었다가 혼자 납득하자 정원누나는 뭘 혼자 북치고 장구치냐며 웃었다.
나 역시 가벼운 이야기들을 꺼냈다. 회사에서 업무가 바뀌어서 고생한 이야기나 이쪽은 상사가 일은 빡세게 주는 사람이지만 인간적으론 괜찮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정원누나는 부럽다며 술을 넘겼다. 물론 모두가 괜찮은 것은 아니라 나 역시 씹어댈 대상은 있었고, 그 말을 들으며 정원누나는 깔깔 웃었다. 맥주가 가벼운 만큼 나누는 이야기 역시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깥이 어두워지자마자 가게를 나섰다. 이번에는 정원누나의 선택에 맡긴다고 했더니 굉장히 구석진 실내포차를 갔다. 분위기 자체는 아저씨들이 모여서 소주를 나눌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더니 정원누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부터 소주 마실 거고, 게다가 앞으로 할 얘기도 걔에 대한 거 일거 아니야.”
“어, 뭐, 그렇죠.”
“어? 또 존댓말 쓰네.”
“아, 미안. 역시 윗사람한테 반말하는 게 영 익숙해지지가 않네.”
정원누나가 얼굴을 찌푸리자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내가 부를 때부터 정원누나는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뎅탕과 무뼈닭발을 시키자 일단 술이 먼저 나왔다. 나온 소주를 까서 서로 따라주고 들이켰다. 이제야 술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본론을 털어놓을 기분이 들었다. 회사이야기가 가볍고 친구이야기가 무겁다니 뭔가 위치가 역전된 느낌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깐 한 병은 계속 서로 따라주며 건배를 하고 들이키기만 했다. 정원누나는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안주도 없이 두 병째를 까기 직전에서야 입을 열었다.
“너무 달리면 내일 지장이 있을까봐.”
“오, 약하게 나오는데.”
“대신 안주거리를 드리지, 뭐.”
“무슨 안주거리?”
“술 값요, 술 값.”
“그건 안주 아닌데?”
그 반응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말을 정정했다.
“그래. 안주 아니고 그냥 술 대신 얘기하는 거로.”
“말 문 막히면 마시고?”
“좋네요, 그거.”
그러자 정원누나가 한 잔을 따라주면서 미소 지었다. 품격 있는 장난꾸러기의 미소였다.
“존댓말해도 한 잔씩 하기야.”
“그럼 다음 잔부터 마셔야하는 거 아니야?”
“빼도 되고.”
“아이.”
센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소주로 들이 막았다. 이 누나 참 사람 잘 다룬다. 그런 놀리는 얼굴로 말하면 남자로써 참을 수가 없었다. 소주를 마시고 나자 안주가 나왔다. 사실 그렇게 늦게 나온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려서 느리게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오뎅탕을 한 입 떠먹고 나서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고 걔를 대하기가 좀 어색해서.”
“갑자기?”
“음, 내가 저번에 걔랑 어떤 관계가 될 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었나?”
“그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어.”
“그런가.”
직접적으로 말했든 간접적으로 그녀가 느꼈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설명하기에 불편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걔도 날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우연찮게 알아버려서. 이전처럼 못 대하겠어.”
“으흥?”
그녀가 눈을 빛냈다. 다정하게 등을 밀어주듯이 추임새를 넣는다. 세상에서 내 얘기가 제일 궁금하다는 것처럼 눈으로 보채고 있었다. 이 정도로 기대를 받으니 쓰디 쓴 말도 어렵게나마 뱉을 수 있게 된다.
“하아,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내가 걔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어. 나는 걔를 친구라고 생각해. 근데 걔한텐 내가 유일한 친구야. 그게 걱정돼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니, 그게 아니야. 그렇다고 하면 난 걔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걸 기뻐해야하는데 나는 걔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 아니, 정확히는 이연아와 만나는 게 싫어. 대체 왜일까. 왜 그런지 모르겠어.”
“잠깐만, 잠깐만? 이런 말 하긴 뭐한데, 어.”
내가 하는 신세한탄을 차분하게 듣던 그녀가 잠시 고심하는 듯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원이라는 애랑 썸 타는 거 아니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대부분의 사실을 밝힐까. 정원이의 이전 과거까지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현재 상황을 모두 알리고 도움을 받을까. 적확한 반응을 얻기 위해선 그게 맞을까. 그녀 역시 내 투정을 받아주고 있는 바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진실 된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내 문제만은 아니라서, 정원이와 공유하고 있는 문제라서. 고민하다가, 그리고 또 고민하다가, 그러던 참에 그녀가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아, 말해주기 힘든 거면 말 안 해도 되고. 감안하고 들을 테니까.”
“하아.”
그녀는 사람을 참 잘 다뤘다. 정원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투정을 부리고 그것을 어필한다면, 그녀는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가 하고 싶게 자극했다. 상대방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그것을 존중함으로써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해서 하게 만들었다. 정원이가 사람과의 대화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그것이었으며, 정원누나가 사람을 잘 다루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나 역시 정원이에겐 해주었으나, 정원누나에겐 하게 되었다.
“정원이랑은 음, 연인 행세를 하고 있어.”
“행세?”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 연인 역할을 해주고 있어.”
“으으음.”
그녀가 눈을 감고 신음소릴 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계속해봐.”
“음. 정원이가 요즘 이연아라는 여자를 만나고 있는데, 걔가 나한테 선전포고를 했어. 내게서 정원이를 뺐겠다고.”
“어,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걔는 레즈야?”
“흠. 애매하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정원이는 연애대상으로 보이는 것 같아.”
“정원이도 모르겠고?”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비참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녀가 마치 산파를 도와주듯 내게 질문했다.
“어, 정원이는 그 여자가 좋대?”
“아직까진 연인으로써의 호감은 없어 보여. 이번에 친구가 됐다고 하더라고.”
“친구라. 너도 친구고?”
“……어.”
내가 쉽사리 대답을 못하자 그녀가 그 부분을 다시 자극했다.
“정원이도 널 친구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넌 정원이를 친구라고 생각해?”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겠다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모르겠다는 말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왠지 이 순간 대답을 하지 않으면 끝까지 어영부영한 채로 태도를 정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고민한다. 정원이는 나의 친구인가. 정원이. 나를 보며 울었던 정원이. 나를 보며 웃었던 정원이. 나에게 화를 냈던 정원이. 내게 용서를 빌러 왔던 정원이. 나를 용서해줬던 정원이. 내게 안기던 정원이. 새하얀 프레지아 향기. 한겨울의 향기.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지 말라던, 정원이. 나의 정원이.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정원누나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 친구야. 정원이는, 정원이는 내 친구야.”
“허으음.”
그녀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 답이 틀린 걸까? 내가 당혹해하자 그녀가 나를 달래듯이 안심시켰다.
“아니, 아니야. 그냥 그렇구나 싶어서. 어, 그럼 하나 더. 연인 행세는 계속 하고 싶어?”
“……정원이가 원한다면.”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와.”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탄한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로맨틱하네.”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끄럼을 감추려 고개를 돌리고 뒷목을 주무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일단, 그래. 넌 정원이에게 연인행세를 해줄 수 있는 친구로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는.”
말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정원이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정원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정원이가 원하기 때문에 정원이가 이연아와 친구가 되는 것을 내버려 둘 것인가. 그래, 그것이 정원이가 원한다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혀엔 껄끄러운 떫은맛이 났다. 쓰디쓴 소주의 맛이 혀끝에 남아있었다.
“정원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
“그게 니가 원하지 않는다고 행동이어도?”
“응. 그래도.”
나는 내게 해답을 맺을 수 있게 해준 그런 고마운 은인을 보며 아스라이 웃어보였다.
“그래도, 나는 정원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거야.”
나는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해낼 수 있다며, 힘낼 수 있다며, 덕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에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웃어보였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웃어보였다. 아픈 얼굴로, 내가 느낀 쓴 맛의 소주를 같이 마신 사람의 표정으로, 내 감정에 공감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런 얼굴로 나를 닮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까울 정도로 멍청하긴.”
그녀는 가만히 내 잔에 소주를 따라서 내 손에 들려주고 제 잔에도 소주를 따라 내 손에 있는 잔에 짠하고 부딪쳤다. 그리고는 잔을 깨끗이 비우고 멍하니 있는 나를 바라봤다. 자신을 따라서 마시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처럼 깨끗이 잔을 비웠다. 그러자 그녀는 자리에서 아주 조금 일어나서 손을 뻗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러운 그리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착하다. 착해.”
그 손길을 받아들이며 나는 내가 정원이를 쓰다듬던 장면을 떠올린다. 그 때와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위안을 받으며, 나는 뜻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그리고 그 손길조차 조심스럽고 떨려서, 결국 나는 그 손을 떨쳐내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작품후기]정원이의 고해와 강휘의 고해. 두 형태의 고해가 남은 화가 됐네요. 누군가는 끝맺지 못했고 누군가는 끝맺었다고 착각했지만, 들어준 사람들은 신이 아니기에 마음고생을 퍽이나 하겠죠.
그건 그렇고 어, 정원누나 좋지 않나요? 저도 머릿속에서 미리 짤 때는 상황 정도만 짜고 대사는 지들이 알아서 하는데, 정원눈나가 너무 눈나인 거에요. 정원눈나...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술은 -> 술을 고쳤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