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회
chapter4정원이가 여자의 몸이 되고나서 정원이는 감정을 잘 주체하지 못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감성적이라는 미국의 어느 대학의 연구결과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하면, 어느새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당황을 하면 그 모습을 보며 급속도로 빨리 평정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정원이 덕분에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한다는 것에 익숙해 진 것이었다.
이 경우엔 서진이였다. 서진이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나와 하정원씨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점점 패닉에 빠지고 있었다. 나는 서진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가 하정원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어, 오랜만이네, 요.”
하정원씨가 어색하게 말을 높였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처럼 했다가 갑작스럽게 나를 마주친 것이다. 당황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내가 당황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연하게 테이블에 있던 빈 잔을 손에 쥐고 하정원씨에게 넘겼다.
“일단 앉으세요. 저 아직 술 덜 마셔서.”
“어? 아, 그래요.”
“그리고 말 왜 높이고 그래요? 저번에 말 놓기로 했으면서.”
하정원씨가 잔을 받자마자 술을 따라줬다. 하정원씨는 허둥지둥하면서도 술을 따라주자 바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첫인상과 달리 타고난 술꾼이다. 나는 이어서 서진이에게도 술을 들이밀었다. 서진이가 얼 타고 있어서 한 마디를 더했다.
“야. 술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왔는데 술 안 받냐? 일단 건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어? 어? 어. 아. 어.”
서진이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잔을 잡았다. 내가 술을 따라주는 동안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이 잔을 잡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나는 잔을 들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풀었다. 그리고 서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서진이를 위하여.”
“아하하, 위하여!”
“위, 위하여!”
하정원씨도 건배사를 듣고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서진이는 내 고얀 건배사를 듣고도 허둥지둥 잔을 부딪쳤다가 바로 술을 넘겼다. 웬만하면 서진이에게 설명을 맡기고 싶은데 아직 서진이에겐 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정원아, 너 챙기느라 쓸데없이 눈치가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써먹을 데는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하정원씨에게 물었다.
“서진이가 뭐라고 하고 불렀어요?”
“예? 아. 큰일 났으니까 빨리 오라고요.”
“겨우 그거 듣고 온 거에요?”
“……좀 더 말한 건 있는데 별로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요? 하하, 짐작은 가는데.”
내가 내 잔을 채우려고 하자 하정원씨가 술을 채가고 내 잔을 채워줬다. 그리고는 다시 병을 내게 넘기고 자신의 잔을 들었다. 그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애써 지워내고는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서로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털어 넣었다. 하정원씨는 술을 마시고나서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강휘씨는 왜 존댓말 쓰고 그래요?”
“예?”
“저번에 분명히 둘 다 말 까기로 한 거 아니에요? 아니지, 아니야?”
“저 그 때도 말까는 거 좀 힘들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놓고 나보고 왜 말 안 놓냐고 그러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색하게 웃다가 다시 잔을 채워줬다. 하정원씨도 내 잔을 채우고 다시 잔을 맞댄다.
“말하기 곤란하면 술을 채우네.”
“술 고프시지 않아요? 저는 이미 세 병이나 마셔서.”
“오, 벌써부터 밑밥 까는 거에요? 실망인데.”
“어? 저 안 마신다고 했던가요?”
바로 서로의 잔을 채우고 들이켰다. 그렇게 연달아 들이키고 나니 이제야 좀 술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서진이를 바라보자 서진이는 우리 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추스를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고, 실제로도 이미 정신을 차린 눈치였다. 나는 서진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닥치고 있을 거야. 내가 설명해야겠냐?”
“아, 아니. 내가 설명해야지.”
서진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내가 조금 오해를 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뭔 오해. 정원이?”
“어? 이제 말 놓게?”
“아니요, 음.”
하정원씨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정원이. 하정원씨가 오해를 할 법 했다. 사실 서진이가 오해를 한 것도 이름 때문이었지. 해명에 앞서 호칭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이마를 찡그리고 어떤 것을 선행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은 서진이에게 눈짓을 했다. 내가 먼저 호칭에 대해 정리를 하겠다는 표시였다.
“저번에 말한 좀 어, 썸타고 있는? 아니, 음. 뭐라고 관계를 정의하기 힘든 친구가 있는데요.”
“으음.”
하정원씨가 꺼질 것 같은 신음소릴 냈다. 원래 하정원씨를 보지 않으려고 한 이유도 정원이 때문이었다. 하정원씨가 내게 정원이를 위해서라면 여기서 더 만나면 안 된다고 말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걔도 이름이 정원이에요. 다정원.”
“어머, 그랬었지, 참.”
하정원씨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빈 잔을 내밀었다. 꺼내기 힘든 말은 한 잔을 들이키면 말 할 의욕이 나곤 했다. 나는 어느새 비워진 빈병을 흔들고 세 병을 더 시켰다. 그리고 새 병을 까서 빈 잔을 채워주었다. 하정원씨는 나와 서진이에게도 잔을 채워주었다. 가볍게 잔을 대고 술을 마시자 하정원씨는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요. 그래도 말 놓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말 놔.”
“그렇게 불편해요?”
“강휘씨만 말 높이니까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이잖아!”
“아니, 그게 무슨.”
어이가 없어져서 하정원씨를 바라봤더니 진심인 것 같았다. 기가차서 숨을 내뱉었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말 놓지 뭐. 정원누나라고 부를까?”
“아니, 나이 많아 보이는 게 싫다니까?”
“그럼 어떻게 해. 저 정원이라고 그냥 부르면 자꾸 이쪽 정원이 생각나요.”
“으.”
하정원씨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말 놓고 정원누나라고 불러. 서진이도 그렇게 부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서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으하하, 그게, 나도 이것 때문에 좀 꼬여서.”
“아니, 그건 아니지. 너 혼자 지레짐작한 거잖아.”
“야, 강휘야. 좀 봐주라. 니가 정원누나 일이냐고 하니까 맞다며.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하겠냐. 아, 이놈이 정원 누나랑 정원씨랑 양다리 걸치다가 걸렸구나. 그래가지고 난리나 가지고 술 땡겨서 나 부른 거구나. 아 이거 완전 난장판이구만. 이렇게 생각 안 하겠냐고, 어? 게다가 그 후에도 내가 말한 거 너도 다 긍정했잖냐. 내가 이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 안 그러냐?”
“안 그런데.”
서진이가 봇물 터진 것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하긴 오늘따라 서진이 치곤 조용하다 싶더라니 제 나름대로 내 기분을 맞춰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진이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장을 토로했다. 나는 그런 서진이의 주장을 단칼에 부정하고 말했다.
“넌 정원이 이름 정원인거 알잖아.”
“그렇지.”
“그리고 니가 먼저 지레짐작하고 정원 누나한테 연락한 거고.”
“그렇……지?”
“게다가 양다리는 시발. 당사자 둘 앞에 세워놓고 임마. 야, 안 그래도 정원이 때문에 술 땡겨서 부른 건데.”
“잠시만?”
“예?”
정원누나가 내 말을 끊고 끼어들더니 말했다. 표정 역시 미묘한 표정이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정원이라고하니까 나 부르는 것 같아서 헷갈리네?”
“흠. 그럼 이쪽 정원이는 다정원이라고 하죠, 뭐.”
“이쪽은 나 아니야?”
“아무래도 전 다정원쪽이 이쪽이에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정원누나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을 피하던 서진이를 같이 노려봤다. 서진이는 아주 잠깐 모른 척을 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제가 죄송합니다! 제 오해였슴다!”
“오냐.” “그래.”
나와 정원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서로 술을 따라서 마셨다. 서진이가 그런 우리를 보며 멍청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응이 좀 밍밍하다?”
“왜. 그럼 화라도 내줄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왜 마지막이라며 인사를 했는가. 대수로워지는 순간 이 자리는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 그래,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게. 의식하지 않고.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뭐 어때. 술 상대 한 명 더 는 거지. 정원누나정도면 상타치고.”
“어? 상타치라니 무슨 말이야?”
“아, 죄송. 주량도 꽤 잘 맞고 말도 잘 통한다고.”
“아. 그건 동감이야.”
정원누나는 내게 술을 따라주며 웃었다.
“근데 그렇게 말해놓고 미리 마셨다느니 뭐니 하면서 빼는 건 아니지?”
“저 지금까지 누나 술 뺀 적 있어요?”
“아, 또 존댓말.”
“아, 이거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되네.”
“강휘 쟤 나 아는 척도 한 달 걸렸어, 누나.”
“옛날 얘길 꺼내고 그러냐.”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정원누나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상상이 너무 잘 되서 웃겨.”
“에휴, 술이나 한 잔 더?”
“그래. 후후.”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술잔을 나눴다. 한참을 술잔을 나누다가 서진이가 먼저 곯아떨어졌다. 서진이의 술버릇은 더 시끄러워지는 건데 그래서 서진이가 취한 시점에서 정원누나와 나는 눈을 맞추고 서진이가 아예 뒤질 때까지 연거푸 술을 먹였다. 오늘 정원누나를 부른 벌주, 오늘 내 상대를 못한 벌주, 먹일 핑계야 많았다.
그렇게 서진이가 곯아떨어지고 나자 신기할 정도로 나누던 말이 사라졌다. 물론 서진이가 시끄러웠던 탓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서로 말을 꺼내는 것을 어색해하고 있었다. 덕분에 애꿎은 빈 술병이 쌓이는 속도만 가속되고 있었다.
먼저 힘들어진 것은 나였다. 생각해보니 이전에도 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먼저 술자리를 시작했던 내가 더 빨리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라도 잔을 뺄 수는 없었고, 속도를 늦추려면 필연적으로 말을 꺼내야 했다. 나는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몇 잔 째 말도 없이 마시고 있네.”
“그러게?”
“술이 그렇게 고팠어?”
“뭐? 오늘 서진이도 강휘가 불렀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누나도 계속 마시길래.”
그러자 정원누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몇 가지의 의미가 담긴 복잡한 표정이었다. 어색함, 미련, 그리고 다른 미묘한 감정. 누나는 주제를 돌리려는 듯이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 서진이는 왜 불렀는데?”
“어, 그냥 술 먹으려고 부른 거지.”
“거짓말.”
정원누나가 피식 웃더니 술잔을 든 손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너 아까 서진이한테 안 그래도 그 애 때문에 술 땡긴다고 했었어.”
“아, 그랬나.”
그런 말을 했었던가.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술을 안 받으려고 했더니 곤란한 질문을 주고받게 됐다. 이번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세한탄이 될 건데 괜찮아?”
“혹시 술자리 내 돈 내니?”
“에이. 여기 다 서진이가 내지.”
“그럼 얼마든지 들어줄게.”
그것 참. 배포가 하해와 같이 넓었다. 말을 꺼내지 않기에도 어색한 분위기였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항상 정원이에 대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자 하면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한참을 입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원이, 아니, 그래. 누나가 부르는 것처럼 그 애라고 할까. 그 애랑 좀, 아니지. 그 애랑은 문제가 없어. 그 애랑은 문제가 없는데.”
말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묻어두었던 감정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나조차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는데 말로 쉽게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원이와 아예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원이가 요새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그게 좀 걸려서.”
“남자?”
“아니, 여잔데. 하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가 정원누나의 시선을 느끼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정원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예의가 아니네.”
“아냐, 신경 안 써. 그나저나 말 끊지 말고 계속 말해봐.”
“어, 혹시 즐기고 있어?”
“완전.”
말마따나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작별을 할 때 남았던 미묘한 감정의 잔여물이 사라져있었다. 그래, 방금까지 정원누나가 나에게 내비치던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숨긴 것일까. 아니면 털어낸 것일까. 덕분에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때의 감정을 털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뒷목을 주물렀다. 정원이에 대한 감정도, 정원누나에 대한 감정도 완전히 내비치기 곤란했으나, 더욱 곤란한 것은 후자였다.
“그래. 그 애가 요즘에 친하게 지낸다는 여자가 나한테 선전포고를 했었거든.”
“뭐라고 했는데?”
“자기도 정원이를 좋아한다고.”
“으엑?”
정원누나가 이상한 신음소릴 냈다. 그러더니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그 애 레즈비언이니?”
“그 애? 정원이? 아, 음.”
애매한 문제였다. 정원이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는 문제였다. 심지어 본인도 모르는 문제였다. 그것은 정원이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에 기반하고 있었으나 그것까지 밝힐 순 없었다. 나는 미묘하게 사실의 일부만을 드러내기로 했다.
“모르겠어. 일단 지금까지 여자랑 사귄 적은 없는데. 그래서 더 미묘하기도 하고.”
“미묘하다니?”
“사귀지만 않는다면 그 여자가 정원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뭐? 아, 아니지. 일단 들어나 보자. 뭐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 여자가 나한테 그랬거든. 정원이가 나에게 너무 의존한다고.”
“으음.”
정원누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전 남자친구랑 안 좋게 헤어졌다고 했었나. 의존이 이유 중 하나였다면 그 때의 기억을 자극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 정원누나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 강휘 니가 잘못한 거 아니야. 그냥 예전에 해어졌던 때가 생각이 나서.”
“어, 미안합니다?”
“아냐. 뭐, 아직은 조금 아프긴 하지만. 됐어. 얘기 계속해.”
정원누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털어내듯이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화제도 돌릴 겸, 이어서 이야기를 했다.
“그 애가 원래 좀 사람들이랑 관계를 잘 못 만들기도 하고, 안 좋은 사건이 있어서 좀 고립되긴 했어. 나하고만 친하기도 하고. 근데 그 여자가 그런 점을 언급하더라고. 그거 문제라고.”
“치사하네.”
“어? 왜?”
“걔 너한테 입 턴 거잖아.”
“어?”
내가 멍청하게 대꾸하자 정원누나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조금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단어를 고르며 최대한 나를 이해시키려는 듯 한 어조였다.
“걔 너한테 그 애, 음. 정원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수 쓴 거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곱씹었다. 수를 썼다. 이연아가 내가 정원이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누나의 의심은 타당했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서 그게 어떻단 말인가. 이연아의 의도와 상관없이 과연 정원이가 나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것이 정원이에게 좋을까. 내가 정원이에게 이연아와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확답할 수 없었다.
입을 떼려다가 다시 닫았다. 감정이 너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도 정원누나에게 꺼내버릴 것 같았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정원누나는 나와 비슷한 류의 인간이다. 너무 잘 맞아서, 그것이 문제였다. 이만 선을 그어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음, 그래. 신세한탄 들어줘서 고마워.”
그리고는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병을 정원누나의 잔에 채우고 내 잔에도 채웠다. 정원누나는 내가 자작하자 순간 나를 흘겨봤지만 이내 잔을 들었다. 이만 대화를 끝내자는 내 의도를 알아챈 것이었다. 서로 잔을 맞대고 못 다한 말을 끝내 삼켰다. 서둘러서 자리를 정리하려고 서진이를 깨우기 위해 흔들었다. 그 때 뒤에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휘야 혹시 연락처 교환할래?”
내가 뒤를 돌아보자 정원누나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꺼내는 본인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작고 자신 없는 목소리와 불편한 듯 몸을 꼬는 행동이 모두 그런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좀 오지랖 떠는 것 같긴 한데, 너무 고민 생기면 연락하라고.”
“그건 좀 미안한데.”
“술 사주면 되지. 너도 아까 그랬잖아. 나 좋은 술 상대라고.”
“하하.”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선을 그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내 눈에서 그런 심란함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내 태도에서 불안함을 느낀 것일까. 이전에 분명히 서로를 위해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헤어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오지랖이 넓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남을 챙기는 것을 퍽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런 모습은 내가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 역시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녀의 핸드폰에 연락처를 남기자 그녀는 썩 즐겁지는 않은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심이야. 너무 안고 있지 말고. 벽에 대고라도 말하고 싶으면 불러.”
“술 값만 내면?”
“그건 당연한 거고.”
나 역시 그녀를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담은 그런 미소였다. 쓴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연락처를 교환했다. 사실 누구라도 좋았다. 정원이에 대해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언젠가 정원누나에게 연락을 하리라. 그것도 근시일내에.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오늘 털어놓지 못한 말이, 감정이 그런 확신을 불러왔다. 하정원씨에 대해 아직도 위험하다고 여기는 주제에, 내 감정을 조금이라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게, 기댈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유혹이 너무 달콤해서.
[작품후기]어우, 지각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변명이 아닌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글이 제가 납득이 안 될 정도 였어서 그래서 조금 시간을 더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부족한 점이 많은 글 관심 가져 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지적해주신대로 하정원눈나는 정원이 이름을 알고있었숨니다...치명적인 오류네요.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