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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02화 (102/138)

101회

chapter4아침에 눈을 뜨니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대체 아침부터 무슨 소란인가하고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켰더니 창문에 바람이 부딪히고 있는 소리였다. 태풍이 불만한 계절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바람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보니 잠이 확 달아날 정도로 시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 후 일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으나 창문을 여는 순간 머리카락이 조금 휘날릴 정도의 세기를 지닌 바람이었다. 덕분에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창문을 슬금슬금 닫고는 핸드폰을 바라보니 평소 출근 시간에 일어나버리고 말았다. 주말을 시작하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었고, 약속시간으로부턴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있었다. 다시 눈을 붙여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시린 바람이 이미 잠기운을 날려버린 후였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괜히 창문을 열어봐서는.

그렇다고 무엇을 할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라서 침대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소리가 듣고 싶다느니 그런 이상한 감성이 북받쳐 올랐다던가, 무언가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멍하니 있는 와중에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입까지 멍청하게 벌리고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어제는 신기할 정도로 잠이 잘 왔다. 요즘 들어 잠이 안와서 오랜 시간을 뒤척이고 그 동안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생각에 지칠 때쯤 정신을 잃는 식으로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러나 어제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피곤이 쌓여서 결국 어제 터지고야 만 것일까.

오늘 일어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란스러운 바람소리에 눈이 떠지기야 했지만 오늘은 꽤나 상쾌하게 기상을 한 것이었다. 조금 텐션이 높았다면 기상창을 외치며 벌떡 일어났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병신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상이 깔끔했다는 것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비틀면서 억지로 일어나는 게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어젯밤 잠을 푹 자서 그런 걸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몸이 편하고 불편한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후관계가 반대였다. 잠을 뒤척이다가 생각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겨서 잠을 뒤척이는 것이었다. 그 생각의 주체는 정원이였다. 정원이가 바뀌게 된 그 순간부터 정원이는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우정과 연민이 대부분의 감정을 차지했다. 그저 정원이를 도와야겠다, 친구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원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그 때부터 줄곧 고민하고 있었다. 조금 어긋나서 싸웠을 땐 더욱 정원이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정원이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한다면 내 대부분의 고심에 빠졌던 시간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버린 셈이었다.

그 후에도 회사일이니, 혹은 정원이와 연인 행세니 하며 내 생각의 주체는 어느새 정원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번엔 오롯이 정원이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청객이 한 명 내 머릿속에서 제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연아였다. 그러나 이연아 역시 정원이와 관련된 인물이니 어떻게 보면 이연아에 대한 생각 역시 정원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할만 했다. 그렇다면 돌고 돌아 역시나 정원이가 내 생각의 주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그런 고민이 없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골치가 무겁던 판에 오랜만에 고민 없이 마음을 놓고 푹 잠을 잔 것이었다. 이 역시 다정원의 탓이었다. 이렇게 내 생각이 정원이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저께라면 조금 불쾌한 감정이 들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자아를 주체적이고 어쩌고 하던 이전의 내가 들었다면 얼굴을 찌푸렸을 것 같다.

굿 모닝, 빠빠빠, 빠빠.

“아.”

핸드폰에서 기상 벨이 울려 바로 꺼버렸다. 어느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원래 일어나려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어젯밤 고민을 하지 않은 대신 맑은 머리로 생각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일단 생각을 접어두고 샤워를 했다. 정신은 이미 든 지 오래지만 샤워를 하니 잠겨있던 상념까지 씻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아침을 차려서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저번 주에 옷을 샀으니 입을 옷이야 많았지만 그래도 옷장 앞에 서서 고민하게 된다. 결국 고른 옷은 누나와 처음에 골랐던 옷이었다. 누나에게 그렇게 갈아입히면서 살펴봐놓고 결국 첫 가게냐고 핀잔을 준 게 우스워지는 선택이었다. 가족들은 이제야 슬슬 일어났다. 나는 부모님께 아침인사를 했다. 누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인사를 받고는 물으셨다.

“정원이 만나러 가니?”

“예.”

“잘 놀다 오렴. 너무 늦으면 연락하고.”

“예?”

성인이 되고나서 집 안에 통금시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웬일로 연락을 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께선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혹시라도 그쪽에서 보내고 올 거면…….”

“내일 출근 날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얼굴이 홧홧해져서 챙길 것을 서둘러 챙기고 나왔다. 차를 타고 시간을 확인하니 생각한 시간보단 조금 이르게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는 미리 가도 괜찮지 않을까. 차에 시동을 걸고 느긋하게 주행을 시작했다. 조금 이르게 나왔다고는 하나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고 적당히 차가 막혔다. 시간을 때운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원이네 집에 도착해서 차에 내리려는 순간 정원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매한 시간이다. 내가 정시에 출발했다면 막 출발했을 시간. 어째서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었을까.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정원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휘야, 혹시 출발했어?]

“어? 어. 그렇지?”

[미안한데 오늘 약속 다음 주로 미룰 수 있을까? 응? 진짜 미안해!]

나는 멈칫했다가 열었던 문을 조용히 닫고 물었다.

“왜?”

[아니, 그게. 으음.]

정원이가 한참동안 신음소릴 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정원이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내 머릿속은 예언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연아구나.

[그게, 연아가.]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정원이가 말하는 것을 일단 들어주곤 했으니까. 정원이는 내 한숨소리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을 순간적으로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원이가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 미안해.]

정원이는 불안에 채이고 있었다. 아직 울음이 섞여 있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아마 더 입을 다물고 있다면 시간문제일 것이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휘저으면서도 의식적으로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이연아씨가 왜. 무슨 큰일 있대?”

[으, 응. 나도 오늘 약속 있어서 못 간다고 했는데, 연아가 병원에 혼자 가야 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걱정이 돼서.]

“그래…….”

[미, 미안해. 갑자기 약속 끊어서 정말로 미안해.]

내가 말끝을 끌자 그에 맞춰 정원이가 사과를 해온다. 나오려는 한숨을 다시 삼켰다. 그리고는 정원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 아픈데 너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큰 병이래?”

[아니, 그건 아직 못 물어봤어…….]

“그렇구나.”

[미안해.]

“아냐, 니가 미안할 게 뭐 있냐. 어쩔 수 없지. 그래. 옷은 다음 주에 보면 되니까. 다음 주에 사자.”

[응. 진짜, 진짜 미안해.]

“사과 안 해도 된다니까.”

[응.]

정원이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끝까지 다정하게, 부드럽게를 되뇌며 마지막 인사를 뱉었다.

“내일 보자.”

[응. 내일.]

그런 이유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다. 나와의 약속이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본인한테 밖에 부탁을 못 한다는 것을 무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원이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한다. 그런데도 전화를 끊고 백미러를 바라보니 얼굴에 표정이 사라져있었다. 일단 출발하자. 괜히 정원이가 내 차를 보기라도 한다면 더 미안해할 테니까.

목적지도 정하지 못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시간이 붕 떠버리고 말았다. 집에는 정원이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 괜히 일찍 들어가면 무슨 일인지 물어볼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정원이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 가족들도 캐묻지는 않겠지만 걱정을 하고 말 것이다. 잠시 기분을 전환할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버리겠네.”

참지 못한 감정이 혼잣말로 삐져나왔다.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으니 조심할 것도 없었다. 참았던 한숨을 마음껏 내쉬었다. 신호동안 잠시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가 신경질적으로 악셀을 밟았다. 그리고는 주차장이 있는 카페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그 모든 행동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삐져버린 아이처럼 신경질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해는 했다. 납득도 했다. 그러나 감정이 널뛰고 있었다. 차라리 거기까지 간 거 병원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할 걸 그랬나. 이연아가 정말로 몸이 아픈 건지 확인이라도 해야 했나. 기대했던 것만큼 짜증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한숨을 있는 대로 내쉬다가 기도를 하듯이 고개를 손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가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눈을 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핸드폰을 들어 성규에게 카톡을 날렸다.

[나 : 술 ㄱ?]

곧 성규에게서도 카톡이 날아왔다.

[성규 : ㅈㅅ 약속 있음.]

[나 ; ㅇㅋ]

되는 일이 없었다. 오늘 아침엔 뭐든지 다 잘 풀린다고 생각했었나. 그걸 떠올리니 퍽이나 우스웠다. 그러고 보니 서진이가 도와줘서 고맙다고 술 한 잔 산다고 했었지. 서진이에게 연락해보자.

[나 : 술 ㄱ?]

서진이는 성규와는 달리 십 분여가 지나고 나서야 메세지를 확인했다.

[서진 : ㅇㅋ 몇 시?]

그래도 긍정을 담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걸 보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렸다.

[나 : 지금 ㄱ.]

[서진 : ???? 낮술?]

[나 : 꼽?]

[서진 : ㅅㅂ; 술고래쉑. ㅇㅋ. 어디?]

그것을 보고 조금 고민하다가 차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어차피 지금 차를 몰아서 집에 대놓기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리운전 맡기면 되지. 그럼 이 쪽에서 서진이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나 : 니네 집 근처 ㄱ?]

[서진 : ?? 술이 글케 고픔? ㅁㅊ놈임?]

[나 : ㄴ?]

[서진 : ㄴㄴ. 오셈. 나야 좋지.]

[나 : ㅇㅋ. 준비해라. 곧 간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카페를 나와 차를 타고 서진이네 집 근처로 차를 몰았다. 서진이가 사는 곳이 부천이던가. 술 마시기에는 꽤나 좋은 곳이었다. 서진이네 도착하기 직전에 공전화를 걸고 끊었더니 서진이가 나와있었다. 눈치 빠른 녀석이다. 서진이가 차에 올라타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씨. 진짜 얼마나 마시려고 이렇게 달아올라 있어?”

“뭐 임마? 하하.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얼마나 마시겠냐.”

“아니 근데 뭔 벌써 부르고 그래? 아직 점심 좀 지났다, 야.”

“거기서 밥도 먹으면 되지. 낮술이 뭐 별 거냐.”

“하아니. 이놈이 진짜 미쳤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웃어넘기고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댔다. 서진이가 내리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거면 우리 집에 대고 오지 그랬냐? 아니 근데 술 마시자 해놓고 차는 왜 끌고 왔어?”

“몰라, 이놈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낮술환영이라고 적힌 곳에 들어가 바로 맥주와 감자튀김을 시켰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맥주를 원 샷 했다. 서진이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술이 센 친구는 아니었고 나 역시 강권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일단 잔이 비워졌으니 맥주를 한 잔 더 시키고 입에 감자튀김을 넣었다. 짭짜름한 것이 술이 당기는 맛이었다. 곧 맥주가 나오고 다시 반잔을 들이켰다.

서진이와는 두런두런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이런 식으로 누굴 신경 쓰지 않고 술을 제대로 마신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그렇게 몇 잔을 들이키면서 서진이와 시시덕거렸다. 그래도 맥주나 계속 마시기엔 애매하다. 맥주가 술은 아니지 않는가. 적당히 배가 차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서진이가 계산하려는 것을 막고 내가 카드를 내밀자 서진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대체 얼마나 비싸게 뜯어가려고.”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낄낄거리는 웃음으로 받아쳤다. 떠들면서 마셨더니 어느덧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마신 것은 아니지만 초겨울답게 낮이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는 데야 어두운 편이 더 나으니 나쁜 건 아니었다. 마침 준비를 마친 곳이 보여 바로 들어갔다. 이번엔 서진이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그랬더니 서진이가 알아서 뭔가를 시키고 곧 소주가 테이블에 놓였다.

“오. 죽여보시겠다?”

“니가 소주 몇 잔 마신다고 죽냐? 지랄 말고 그냥 건배나 하자.”

“오냐, 건배!”

잔을 마주치고 바로 첫 잔을 들이킨다. 그렇게 한 잔이 한 병이 되고, 한 병이 두 병이 되자 이제야 좀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서진이와 나누던 시답잖은 말이 하나씩 줄어든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얘기. 회사일이 어쩌고, 게임이 어쩌고.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걔는 어떻게 지낸다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가 하나씩 하나씩 저물어갔다. 어느새 왁자지껄하게 웃던 분위기는 어느새 주위로 흘러가고 입은 술만을 들이 키고 있었다. 마침내 세 병을 다 비우자 서진이가 새로운 병을 까서 내 잔에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뭔데.”

“뭐가?”

“뭔 개 같은 일이 있어서 불렀냐고.”

“허어.”

내 친구들은 왜 이렇게 하나 같이 귀신같은지 모르겠다. 성규도 그렇고 말이야. 아니, 태진이는 좀 눈치가 없긴 하지만, 아니다. 성규랑 서진이만 좀 눈치가 빠른 편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에 성규를 불렀다가 서진이를 부른 나는 제발 좀 물어봐달라고 녀석들을 부른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정작 말을 꺼내려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자 서진이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여자 문제냐?”

“으잉?”

내가 당황하자 서진이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술 마시자고 하면 보통 그 문제지. 왜, 정원 누님 문제야?”

“와, 너 진짜 대단하긴 하구나.”

“뭐? 진짜야?”

“뭐야, 그냥 찔러 본거냐.”

괜히 낚인 기분이 들어서 조금 억울했다. 그래서 입을 꾹 닫고 술잔을 들었더니 서진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술잔을 들었다. 일종의 벌주였다. 서로 잔을 대고 들이킨다. 서진이가 강하게 눈치를 줬다. 뭐라도 얘기해보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천천히 에둘러서 말을 꺼냈다.

“그냥 요즘에 좀 그래서.”

“요즘에 뭐?”

“그냥. 말도 잘 안 맞고. 상황도 좀 안 맞고 그래서.”

“뭐? 아. 하긴 뭐. 니 상황이 상황이니까. 니가 나쁜 새끼지.”

“그러냐? 하아. 그래. 내가 개새끼지.”

답답한 마음에 술을 따라 들이켰다. 아무 말도 안 꺼냈지만 서진이가 나보고 나쁜 새끼라고 하는 걸 보니 다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쪽도 할 말이 있었다. 끙끙대며 술 때문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서진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명할 게 있냐는 듯 한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 여자들끼리 만날 순 있지. 그래도 하아.”

“뭐야? 벌써 그 쪽 둘이 만났어?”

“어? 뭐야. 너 그 쪽도 아냐.”

“저번에 만났잖아.”

“그랬냐?”

서진이가 이연아씨를 언제 만났는지 모르겠다. 옛날에 나랑 정원이가 회사 다닐 때 언제 한 번 본 적이 있었나? 근데 옛날에 만난 걸 저번에 만났다고 하던가. 하긴 나름대로 발이 넓은 서진이다. 그 때 봐두고 연락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근데 서진이가 정원이를 예전에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이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가 다시 서진이에게 물었다.

“니가 봐도 내가 개새끼냐?”

“음, 솔직히 말해도 되나?”

“어.”

“개새끼 맞지. 어, 너답지 않게 음. 지금이 전성기라 그런가?”

“뭔 소리야, 시발? 아, 그래. 니 말이 맞다.”

단호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친구인 서진이가 보인 반응이라면 내 쪽으로 치우친 반응이 나오기 쉬울 텐데도. 하긴 서진이가 보기엔 이런 식으로 정원이와 이연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진 내가 이상한 녀석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정원이와 나는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생각할 테니 평생 여자를 사귄 적이 없는 내가 여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것이 전성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진이 입장에서야 정원이와 이연아가 만난다고 해봐야 여자 둘이서 만나는 것일 테고, 내가 정원이와 사귄다는 것만 아는 서진이는 내가 정원이에게 보이는 것을 과한 집착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서진이에게 그냥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답답한 심정이다. 다정원이라는 특수한 케이스에 대해서 속을 털어놓고 싶었다.

서진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이연아가 정원이에게 진심이라는 것을 알면 조금 다른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예민하게 과한 집착을 한다고 생각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원이에 대해서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연아가 나한테 견제구를 날렸다는 것이라도 밝혀둘까. 속이 답답해지며 목이 타서 술잔을 들었는데 갑자기 테이블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야! 이서진! 진짜 급하다는 게 무슨, 엇?”

“으잉?”

“어? 뭐야, 둘 다. 반응이 이상한데?”

작은 키, 귀여운 인상에 맞는 애교 있는 목소리.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다신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

하정원씨였다.

나는 술잔을 든 채로 기이한 소리를 내고 술을 흘릴 뻔 했다가 황급하게 술잔에 입을 댔다. 겨우 술을 쏟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술잔을 내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하정원씨였다. 당황이 소리의 형태를 띠고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뭐시여?”

“엉?” “엥?”

그제야 지금까지 서진이와 나눴던 말들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말이 꼬였지? 개새끼, 그 쪽, 여자 문제. 정원, 정원 누님. 정원 누님. 아.

“너 설마 하정원씨 얘기 한 거였냐?”

“서진!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 응? 엥?”

서진이는 나와 하정원씨 사이에서 당황한 채로 굳어 있었다. 나는 이 꼬여버린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다가, 덕분에 술이 확 깨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뒤따라오는 두통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작품후기]이 상황은 작가 혼자서 낄낄거리면서 생각했던 장면이긴 해요. 그래서 일부러 같은 정원으로 이름을 만들었던 건데... 의외로 하정원을 다시 출현시켜달라는 반응이 많더라구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데이켈릭타스님 큰 금액 후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충성충성! 정말 감사드려용!

오늘도 부족한 점이 많은 글 관심 가지고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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