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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01화 (101/138)

100회

chapter4주말이 정원이와 내가 공유하는 시간이었다면, 평일은 좀 더 각자의 시간이었다. 주말에 제 존재감을 드러낸 이방인이 정원이의 평일을 잠식하는 것은 더욱 쉬웠을 것이었다. 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 정원이가 내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은 바래다주지 않아도 된다. 약속이 있다. 누구와 만날지는 뻔했다. 정원이가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면 이연아가 전부였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 상황을 꽤나 즐겼을 것이었다. 정원이가 사회적 관계를 넓히는 것은 정원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며, 나와의 관계가 병들거나 집착에 치닫지 않게 하는 좋은 현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의 관계도 별 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번 대담 이후 이연아를 적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썩 그렇게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도, 나는 분명히 이연아에 대해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연아가 한 선언 때문에? 아니, 좀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나는 이연아가 우리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이 싫었다. 그녀의 목적은 나와 정원이가 이루고 있는 관계의 파국이었다. 그녀는 정원이와 사귀는 것을 원했으며, 또한 나와 정원이의 관계가 조금은 더 얕아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정원이를 위한다는 탈을 쓰고. 물론 그 탈이 진실 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렇듯 고민을 하는 것처럼 이연아 역시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원이는 특별했다. 내가 정원이에게 일정선 이상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 같지 않으니까. 좀 더 단순하게 사랑을 나눌 수도 있겠지. 그녀가 그럴지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나는 이연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 안에서 이연아는 점점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찜찜한 무언가가 되어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 대부분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애매했다. 사실 털어놓는다고 하면 정원이의 특수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으며, 범위를 국한시킨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정원이와 이연아, 그리고 정하가 전부였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가 힘들었다.

사실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시간이 너무 남아서였다. 정원이를 매일 바래다주며 대화를 나누던 것이 어느새 습관처럼 일상에 담겨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원이를 바래다주지 않고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이 남아도 너무 남았다. 평일이라고 해서 항상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나보다. 이런 고민을 할 시간은 좀 부족해도 될 텐데. 별을 헤아릴 시간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침대에 누워 남아버린 시간동안 강탈당한 시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

“너 요새 뭐 나쁜 일 있었냐?”

“뭔 소리야, 또.”

“니 표정 진짜 안 좋은데. 얼굴 좀 펴. 이렇게. 어? 이렇게.”

다음날 퇴근길에 정원이가 주차장으로 내려오더니 내 얼굴을 보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까치발을 들고 내 얼굴에 손을 댔다. 양옆으로 쭉쭉 밀어대는 것이 무슨 찰흙이라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았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정원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뒀다. 내가 까치발을 들거나 도망간다면 정원이도 이렇게 맘대로 하진 못하겠지만, 나 역시 내 표정을 숨기고 싶었다.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마침 정원이도 그렇게 내 얼굴을 가지고 놀면서 그에 대해 질문했다.

“진짜 별 일 없었어? 응?”

“별 일 없어. 그냥 일이 피곤해서 그렇지.”

“총무과에서 견제 심해?”

정원이가 걱정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 때문에 내가 총무과로 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냐. 총무과장님도 생각보다 더 공과 사를 구분하시는 분이고. 적어도 내가 일하는 거에 대해 뭐라고 하진 않으셔.”

“근데 그렇게 힘들어?”

“그래.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럼 다 어색하고 힘들지. 그래도 다 겪어봐야 될 일들이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안하게 힘든 티라도 내지 말던가.”

정원이는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리다가 얼굴을 흔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다시 말했다.

“아니다. 힘든 티 내. 마음껏.”

“뭔 소리야?”

“너 힘든 데 그것도 모르는 거 보단 니가 힘든 티라도 내서 내가 아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그 답변에 내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정원이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뺨을 긁었다. 그러더니 차 문을 열고 들어가며 넌지시 말을 남겼다.

“너 힘든 거 말 안하다가 걸리면 진짜 화낼 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나는 너스레를 떨며 차에 들어갔다. 정원이는 고개를 돌리고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출발도 안 해서 보이는 건 주차장뿐일 텐데도. 귓가가 조금 붉은 게 귀엽다. 기특하다. 여기서 콕 찌르면 터질 것이 분명했고, 그 역시 즐거운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차를 모는데 집중했다.

왜냐하면 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무심코 말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너한테 기대버릴 것 같아서. 사실 그것도 썩 나쁘지 않겠지만,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아서. 내 감정을 단순한 질투라고 오해받기는 싫어서. 그래서 내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을 가지려고. 그래서 정원이를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 날 우리들은 전혀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간질거리는 마음이 가득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둘 다.

***

직장인들은 대부분 주말을 기다린다. 누구나라고 하지 않고 대부분이라고 한 것은 정작 나는 이번 주말을 별로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주말도 이연아가 정원이를 데려가는 것을 담담하게 수긍해야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토요일이 돼서도 이연아는 별 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정원이는 핸드폰을 쥐고 있었으나, 자신이 즐기던 여러 가지 폰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었고 나는 폰 게임을 하면서도 힐끗힐끗 정원이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정원이와 눈이 마주쳐서 뭐라고 변명을 할지 고민했는데 정원이가 먼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냥 오늘 니가 입은 거 잘 어울려서. 헤헤.”

“아, 그러냐.”

마침 정원이도 나 몰래 나를 힐끗거렸던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하며 옷을 살짝 들어 어필을 했다.

“누나랑 같이 가서 샀는데 괜찮은가보네?”

“응, 잘 어울려. 솔직히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게 좀.”

“어? 평소가 뭐 어때서.”

“너 진짜 얼굴 값 못하는 건 알지?”

정원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얼굴을 조금 찌푸리자 정원이도 같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몰랐어?”

“아니 뭘.”

“너 평소에 입는 옷 진짜 완전 으. 그나마 여름엔 뭐 다 그렇게 입으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겨울옷은 진짜 심해.”

그 말을 듣자 조금 억울해졌다. 옛날에 자기도 그렇게 옷을 잘 입고 다니던 건 아니면서 조금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는 잘 입고 다니는 줄 아냐?”

“내가 어때서! 이거 봐! 얼마나 예쁜데!”

정원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감 있게 포즈를 취했다. 그래봐야 츄리닝인 주제에. 게다가 정원이가 나대자 옆에 누워있던 정하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거 내가 골라준 거야.”

“……아무튼 예쁘잖아!”

“에휴, 그래. 잘났다.”

정원이는 다시 허리를 굽히고 쪼그라들어서는 자리에 앉았다. 하긴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집안에서 편하게 입고 있는 것인데도 꽤나 귀여웠다. 똑같은 츄리닝이라도 핏이 맞으니 패션이 된다. 아니, 그냥 정원이가 입으면 뭐든지 그럴듯하다고 생각이 들지도 몰랐다. 내가 정원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나 스스로 납득하는 중에 정원이는 내가 자신을 비웃기라도 한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요새 밖에서 입고 다니는 것도 예쁘잖아!”

“그거도 내가 골라준 거야.”

“다 니가 골라준 건 아니잖아!”

“……아.”

정하가 천천히 생각을 더듬는 듯 하다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좀 사들고 왔었지?”

“그래! 나도 귀여운 거 고를 수 있다고!”

정원이는 옷장을 뒤적거리더니 저번에 샀다는 옷을 꺼내서는 기세등등했다. 전체적으로 화사한 색감과 두터운 느낌이 드는 것이 정원이가 평소에 입는 옷 스타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이라. 순간적으로 뇌리를 찌르는 장면이 기억났다. 저번 주 내가 봤던 그 때. 그 때 산 옷일까. 그 때 정하가 의혹에 쐐기를 박는 말을 꺼냈다.

“언니 옷 골라주는 후배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아, 그걸 또 말하냐, 이 지지배야.”

“왜? 언니가 스스로 골랐다고 하려고 했어?”

“으씨.”

정원이가 정하에게 투덜거렸지만 그 동안 나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역시나 저번 주에 옷을 골라주던 사람은 이연아였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미묘한 기분이 들끓고 있었다. 분노라기엔 너무나 작고 짜증이라기엔 조금 다른. 뜨겁고 불편한 어떠한 감정이 마음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야, 정원아.”

“어, 왜?”

“나 옷 사긴 했는데 좀 부족하긴 하거든? 내일 옷이나 같이 봐주라.”

“어? 어, 정하가 낫지 않을까?”

정원이가 멍청한 얼굴로 대꾸를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정원이와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가서 아무 말도 없이 정원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지자 정원이는 숨조차 멈추고 눈이 동그래져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묘한 감정이 들끓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그런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가까스로 삼키고 나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니가 봐달라고.”

“어? 어, 응.”

정하가 뒤에서 작게 하여간에 언니 멍청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이는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가 내 가슴을 두 손으로 밀치고 당황한 모습으로 더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니, 왜, 왜, 왜, 왜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그러냐! 깜짝 놀랐잖아! 그, 그냥 봐주면 되지. 그게 뭐 별 거라구! 그냥 거, 거기서 말함 되지!”

항상 느끼지만 옆에서 누가 감정이 격해져 있으면 바라보는 사람은 오히려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나 역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퍽이나 당황하고 있었으나 정원이의 반응을 보며 평온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가 너보고 봐달라고 했지, 정하보고 봐달라고 했냐. 니가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그렇지.”

“그, 그래도!”

“아이 씨!”

우리가 말싸움을 하려고 하자 정하가 갑자기 짜증을 냈다. 우리는 바로 열려던 입을 다물고 고장 난 로봇처럼 정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를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사랑싸움할거면 밖에서 하랬지!”

“야, 다정하 너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하아, 그런 거 아니다.”

“아니시겠지! 어휴, 속 터져.”

정하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먼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이 데이트 하는데 나 안 따라갈 거니까 강휘 오빠도 그렇게 정색하지 말고!”

“정색?” “데이트?”

그리고는 다시 정원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니도 눈치 없이 강휘 오빠 속 긁지 말고 그냥 강휘 오빠 멍청한 옷 입게 하지 말고 옷이나 봐줘!”

“멍청한 옷?” “눈치 없이 속을 긁어?”

우리는 누가 뭐랄 것 없이 멍청하게 서로를 바라봤다가 정하를 바라봤다. 정하는 할 말이 있으면 하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우리가 대답 없이 멍하니 정하를 바라보고 있자 정하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우리는 정하가 누워 있다가 일어날 때 기세에 밀려 반 발자국 정도 뒤로 밀려났다. 정하는 마치 으르렁거리는 맹수마냥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은?”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였다. 그제야 정하는 다시 드러누워서는 핸드폰을 두드렸다. 요새 한창 밖에 돌아다니더니 아직도 남자를 사귀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게 좀 눈을 낮, 이크. 정하가 내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나를 째려봐서 정하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정원이를 슬쩍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정색했었냐?”

“뭐? 진짜 몰랐어?”

“내가 언제.”

“너 얼굴 들이 밀었을 때 완전 씹 정색 했거든?”

“그러냐?”

“완전.”

정원이가 방금 정하에게 했던 것처럼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에 수긍을 더해도 이것보다 더 하진 않으리라. 덕분에 조금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표정에 드러났나. 나름대로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정원이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설마 그런지도 몰랐던 거야?”

“어, 어.”

“내가 괜히 쫄았겠냐, 어?”

“쫄았냐?”

“아, 아니! 안 쫄았거든!”

“쫄?”

“아니라고!”

정원이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구체적으로 나를 퍽퍽 때리며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정원이에게 맞아주며 비웃었고, 정원이는 그것에 호응하듯이 힘을 더해가다가 결국 제 풀에 지쳐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나를 때리고 씩씩거렸다.

나는 그제야 정원이를 달래며 미안하다고 하며 내심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던 것을 어느새 잊어버린 정원이를 보며 안도를 하고 있었다.

[작품후기]이 소설도 어느덧 100화가 됐네요. 사실 처음엔 한 80화쯤에 끝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감개가 무량합니다. 첫 장편 연재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100화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독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십이사자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오늘도 부족한 점이 많은 글 관심 가져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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