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회
chapter4날이 조금 쌀쌀해졌다. 겨울이 어느덧 고개를 내밀고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계절이 모두 다르다고 하지만 같은 계절인 겨울도 초겨울과 한겨울은 달랐다.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숨기지 못하고 그러나 한편으론 완전히 메마르지 않은 가로수 내음이 도시를 물들였다. 초겨울의 정취가 느껴졌다. 초겨울의 정취는 한겨울에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부끄럼이 많고 조금은 새침때기였다. 가을옷을 입고 다니기엔 조금 쌀쌀하고 본격적인 겨울옷을 꺼내자니 오후에 더운 것도 그런 탓이었다.
그럼에도 겨울은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할 법했다. 더위에 특별히 약한 것은 아니지만 계절 특유의 분위기도 입는 옷 스타일도 겨울을 더욱 좋아했다. 곰곰이 지나온 길을 더듬어보면 내게 있어 좋은 일은 대부분 겨울에 있었다. 사실 다른 이유는 핑계고 단순히 그래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초겨울을 알리는 건 비단 도시에 깔린 분위기나 체감되는 기온 같은 모호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원이가 손을 흔들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호들갑을 떨면서 먼저 차에 들어갔다. 인사를 받아 손을 들었던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정원이는 온몸으로 겨울을 표현하고 있었다.
“추워!”
“너 원래 겨울에 약했나?”
“아니? 원랜 여름에 더 약했던 것 같은데? 근데 일단 지금은 너무 추워!”
그리고는 제 몸을 껴안고 오두방정을 떨면서 부들부들 떠는 꼴이 우습다. 그런 내 헛웃음을 봤는지 정원이는 제 나름대로 힘을 더해 내 팔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남자가 센스도 없게! 미리 히터 좀 틀어놓고 그러면 얼마나 좋니, 어?”
“나는 그렇게까지 춥진 않은데.”
“난 추워! 이거 봐. 오늘 이렇게 추울 줄 모르고 완전 얇은 옷 입었다니까?”
정원이가 두 팔을 들고 보란 듯이 어필했다. 자세히 보니 팔엔 닭살이 조금 돋아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개선식마냥 자랑스레 드러내는 정원이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면서 히터를 약하게 틀고 내 외투를 벗었다. 어차피 히터가 켜지면 나에겐 조금 더울 게 분명했다. 벗은 코트를 정원이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정원이는 내가 외투를 덮어주기 위해 저를 품에 감싸자 쫑알거리던 입을 드디어 멈추었다. 그리곤 내가 다시 멀어지자 고개를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
“어, 음. 고마워.”
“난 별로 안 춥다고. 히터 틀면 조금 더울 것 같고.”
“그래도 고마워, 자식아. 사람이 고맙다고 하면 그냥 어 그런가보다 하면 됐지, 그걸 또 하여간에.”
“아니, 아, 알았다, 알았어. 흠, 흠. 그런가보다.”
“아니 그런가보다고 말하란 게 아니고! 하여튼 간에 한 마디를! 에휴.”
정원이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핀잔 가득한 말을 들으면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 오늘은 조금 정원이를 바래다주는 길을 돌아서 갔다. 정원이가 평소와 다른 길로 간다는 질문을 하자 오늘은 그 쪽이 막힌다며 핑계를 댔다. 정원이는 그 말을 듣고 납득한 건지 는 모르겠으나 그냥 알았다고 답하고 평소처럼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팀장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요즘 들어 혼도 안 나고 슬슬 팀장님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인정해주는 기분이 든다. 그럼 원래 팀원들은 어땠는데? 원랜 좀 눈을 피했다고 해야 하나, 일이 일이었으니까. 아, 그렇지 뭐. 옛날에 팀장님은 칭찬을 잘 안 해주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자주 들으니까 일할 맛이 난다. 근데 너 총무과로 옮기지 않았냐. 거기선 어떠냐. 그냥저냥 할만하다. 아하, 너도 처음에 나처럼 눈칫밥 먹고 있구나? 그냥 그런가보다 해라. 너는 했냐.
적당히 대답을 해주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다보니 평소보다 길을 돌아갔는데도 어느새 정원이네 집에 도착해있었다. 정원이는 더 말을 못해 아쉬운 듯 하면서도 차에서 내려서 손을 흔들고 집으로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회사원들에게 집은 언제가도 즐거운 곳이다. 그런데 정원이는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려다 허둥거리더니 다시 내 차로 뛰어 돌아왔다.
“야! 너 외투는 왜 달라고 안하냐?”
“아, 나도 차 안에 있었으니까 까먹었지.”
“까먹을게 따로 있지.”
“너도 까먹고 입고 갔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원이가 입을 샐쭉하니 내밀었다가 외투를 벗으려하기에 나는 차에서 내려서 정원이의 어깨를 잡고 밀었다.
“왜?”
“춥다면서. 집 앞에서 벗어서 줘.”
“오.”
정원이는 이상한 소리로 감탄을 하더니 이내 옆구리를 툭 찔렀다.
“센스 좋은데.”
“누구 덕분에?”
“어? 내 덕분이냐?”
“아니 누나 덕분에.”
“아이씨, 진짜!”
정원이가 투닥거리는 것을 웃음으로 받아치며 허리를 가볍게 밀어 걸음을 독촉했다. 마침내 집 앞에 도착해서 정원이에게 외투를 받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내일 봐.”
“그래 내일 봐. 내일은 출근할 때 좀 따뜻하게 입고.”
“알았어요, 엄마!”
“하아, 그래. 너 좋을 대로 불러라.”
“히히. 조심히 들어가.”
“오냐.”
정원이가 집에 들어가고 나는 그 앞에서 잠시 서 있다 차로 돌아왔다. 차는 조금 졸릴 만큼 따뜻했다. 차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문을 열어 허리만 조금 숙여 히터를 꺼둔 뒤에 다시 나와 초겨울의 한기를 즐겼다. 그 와중에 그냥 서있기에는 나도 조금 쌀쌀해서 외투를 입었다. 외투를 걸치자 화하게 프레지아 향기가 났다. 초겨울의 내음은 정원이를 조금 닮았다.
그 날, 내가 이연아씨를 마주한 날로부터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정원이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이연아씨가 정원이에게 어떠한 언질을 주던, 혹은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던 정원이가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 점이 어려웠다.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하면 내가 정원이를 평소처럼 대하기가 퍽이나 어려웠다. 무언가 리미터가 걸린 느낌이었다. 정원이는 평소처럼 내게 최소한의 거리감도 없이 대하고 있었고, 아마 이연아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랬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서로 신경도 쓰지 않다가 어느새 두루뭉술하게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핑계 삼으며 서로에게 기대는 미래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래서 곤란했다. 정원이의 모호한 태도가 곤란했다. 정원이의 모호한 태도를 눈치채버린 것이 곤란했다. 이연아씨가 내게 건넨 말이 가시가 되어 내 무의식을 찌르고 있었다. 무심결에 하던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정원이의 행동을 받아주던 내 둔감함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도 정하지 못한 정원이와의 관계와 정원이에 대한 태도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정원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정원이를 무엇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새로운 문제가 겨울을 타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초겨울은 확실히 가을보다 조금은 더 쌀쌀했다.
***
새삼스럽게 자각을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았다. 정원이와 주말에 만나서 평소처럼 놀다가 정원이가 내 배를 깔고 누워서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 관계가 정말 친한 친구와의 관계가 맞는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마침 정원이가 졸고 있어서 내 생각을 방해하지 않아 더욱 그런 고민은 깊어져 갔다.
연인과 당신은 무엇을 하며 보내십니까. 누군가는 같이 밥을 먹는다고 할 것이다. 밥을 해줄 수도 있겠지. 누군가는 서로 아무것도 아닌 일을 떠든다고 할 것이고, 그 얘기를 나누기 위해 항상 배웅을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손잡으면 두근거려서 항상 손을 잡는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힘들 때는 손을 내밀어 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이 술 먹고 같이 자는 것도 연인과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쉬는 날에 얼굴 찌푸리지 않고 영화 보러 같이 가는 사람이요? 설마 양가 부모님들도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계신가요? 주위에서 혹시 둘이 놀면 적당히 빠져주진 않나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관계와도 같았다. 이렇듯 정원이가 내 배를 깔고 누워있는 와중에도 그런 새삼스러운 자각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누구보다도 서로와 가까우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서로를 꺼리고 있었다. 조심하고 있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 같다. 우리는 연인 같은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연인이 아니었다. 어려운 관계였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런 관계를 우리는 적어도 친구관계라고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이런 우리를 친구로 보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또한 나조차도 그런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성친구는 나도 정원이도 가진 적이 없었다. 하정원씨라면 친구가 되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씩 삐걱거리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 둘만이라도 확고하게 우리의 관계를 정할 수 있었다면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 텐데. 하지만 너도 어떨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정원이가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들었다가 하품을 하며 일어날 때까지도 나는 그런 생각을 이어갔다. 정원이가 내게 편하게 기대는 것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겼다. 정원이는 일어나서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제 딴에 미안함과 민망함을 감추려는 웃음이었다.
“많이 잤어?”
“조금.”
“조금? 조금 잤다고, 아니면 조금 많이 잤다고?”
“조금 많이 잤다고.”
“음, 조금 미안하네.”
“조금이 조금 많이 들어가네.”
“조금이 조금 조금하지.”
정원이는 미안함과 부끄럼을 감추려고 장난을 쳤다. 나 역시 이를 알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정원이는 곧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더니 화장실로 흐느적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내 앞에 마주 앉아서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밥.”
“허어.”
분위기를 한껏 잡고 하는 헛소리는 이렇게나 사람을 맥 빠지게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엄지손가락을 뒤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밖?”
“음. 고기?”
“맨날?”
“뭐 어때.”
“그래, 뭐 어떠냐.”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 정원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원이가 내 손을 맞잡자 힘을 주어 일으켰다. 대충 방을 치우고 집을 나섰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고깃집에 도착해서 삼겹살 3인분과 제로콜라 한 캔, 그리고 콜라 한 병을 시켰다. 이곳에 자주 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정원이의 평가가 좋았기 때문인데, 그게 다 제로콜라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로콜라를 파는 고깃집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정원이가 제로콜라를 받자마자 컵에 따르며 물었다.
“넌 이거 안마시냐?”
“줘도 안 마신다.”
“진짜 맛있는데.”
“넌 진짜 에휴, 말을 말자.”
“달라고 해도 안 줄 거거든?”
“그럼 애초에 물어보지 마라.”
한 소리를 하고는 고기를 구웠다. 고기가 구워지고 정원이부터 한 점씩 넘기고 나도 적당히 내 몫을 챙겼다. 정원이는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거리면서도 열심히 제 몫의 고기를 비워냈다. 그리고는 제로콜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정원이가 먹는 모습만 보면 저 둘의 조합이 최고의 조합처럼 보일 정도였다. 맛있게 먹는 녀석을 보는 것은 꽤 좋아했다. 그런 점에서 정원이는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고기를 한 점씩 넘기다가 대수롭지 않게 정원이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요새 만나는 사람 있냐?”
“어? 말이 되냐? 내가 남자를 만난다고?”
정원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핀트가 조금 어긋난 것 같아 고개를 젓고 재차 물었다.
“아니 남자가 아니더라도.”
“어, 왜?”
정원이가 미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고기를 한 점 더 잘라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요즘 친해진 사람 있나 싶어서.”
“회사에서? 음, 회사에선 다 고만고만한데.”
쉽게 다른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친구다웠다. 그래도 홍보팀장님과는 좀 친해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 지금은 홍보팀장님은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겠지. 홍보팀장님은 정원이의 입장에선 과거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 테니, 요즘 친해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회사에서라. 그러자 정원이가 다시 입을 뗐다.
“음, 에이. 뭐 어때. 연아 기억해?”
“기억하지.”
“연아랑 요새 좀 만나고 있어.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있고.”
분명히 이연아를 생각하며 물은 것이 맞았다. 그러나 너무 뜬금없었다. 특히나 말을 돌리는 것 같던 방금이라면 더욱 그랬다. 정원이의 반응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원이가 눈을 샐쭉하게 하며 쏘아붙였다.
“니 방금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뭐가.”
“말 안하면 한 대 칠 것 같았다구. 걱정 마세요, 남자 안 만나니까.”
“그런 거 아니다.”
“당연히 아니겠지.”
정원이가 날 놀리듯이 실실 웃으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어차피 이연아씨를 만난다고 해도 그러냐 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며, 주의를 주기에도 경고를 하기에도 이상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그랬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정원이에게 고기를 한 점 더 잘라주며 투덜거렸다.
“정말로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거로 너무 놀리지 마라, 좀.”
“에이. 나도 장난으로 말한 거지. 와이 쏘 씨리어스?”
“하나도 안 닮았어.”
“엥? 좀 비슷하지 않았어?”
“전혀.”
그리고는 정원이와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주제를 돌렸다. 어차피 이연아를 만난다고 말해도 아무것도 못할 거면서 물어보기는 왜 물어보았는지. 마음만 불편해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 정원이가 이연아를 언급할 때 별 감정의 미동이 느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위안을 느끼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원이가 내가 느끼는 미묘한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정원이는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정원이는 평소처럼 즐겁게 웃고 있었고, 나는 그걸로 안도하고 있었다. 단지 그게 다였다.
[작품후기]오래 기다리셨습니다. 4부 시작입니다.
쉬는 동안 4부의 메인 감정선은 정리를 했는데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원래는 사건 위주로 정리를 하다보니 더욱이요. 그래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우울한곳님 박멸좀해줘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항상 부족한 점이 많은 글 관심 있게 지켜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건낸 => 건넨 수정 완료했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