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회
3부 막간이연아의 아침은 규칙적이었다. 그녀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기업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녀를 그런 자리에 올린 것은 이전에 직속 선배였던 다정원의 케어와 그녀의 자기관리 능력이었다.
그녀는 우수했고 심지어 인화적이었으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찔러도 피 하나 나올 것 같지 않은 그녀는 놀랍게도 몇 년 전 신입사원 때만 해도 가장 걱정되는 사원이었다. 그녀를 맡은 직속 선배조차도 우수한 사원은 아니었다.
다만 그 둘이 묶였을 때 일종의 시너지 효과가 난 것이었다. 그 둘을 묶었던 과장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데 능했고, 직속 선배인 다정원은 정확한 질문에 답변할 정도의 의사소통능력은 아슬아슬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다정원의 장점은 또 하나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타인에게 물어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한 애사심이 가득하여 회사 일을 배우는데 적극적이었다. 다소 능력이 부족한 것이야 시간이 보완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직속선배의 많은 장점을 보았다. 그는 우선 친절했다. 여자와의 대화를 힘들어하니 바람 필 염려가 없었다. 의사소통에 있어 자신에게 기대는 요소가 있었다. 혼나야 할 때 대신 혼나줬다. 혼을 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업무만 줬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녀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모든 점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족한 점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살 찐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외모가 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아니 많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럭저럭 참아줄 만 했다. 사실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편했다.
다음으로 부족한 건 평생 여자에게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눈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화를 내기 전엔 빠르게 눈치를 채고 알아서 사리는 주제에 이상할 정도로 호의에 대해서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한강휘는 그런 점에서 좋은 조력자였다. 그는 다정원이 지금보다 더욱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못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새 반년을 인턴으로 뛰고 있다고 했다. 사장님께선 이미 눈독을 들이고 회유를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공부하고 있는 게 있다며 거절을 하곤 했다. 다정원이 타인과 그럭저럭 소통을 하게 되면서 그는 회사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눈치가 빨랐다. 심지어 여자의 호의를 귀신같이 캐치하는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로 인해 여자에게 고백을 많이 받아본 걸까. 정작 깊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서 그에 대해서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친구인 다정원을 꽤 아낀다는 것이었고, 그녀가 다정원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캐치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다정원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한강휘가 이연아와 다정원이 둘 만 있을 수 있게 자리도 세팅해주고, 약속도 잡아주고, 또한 은근히 그에게 귀띔을 주기도 했으나 다정원은 여성의 호의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로 인해 이연아는 한 달 정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성의 매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했다.
한강휘가 회사를 떠나고 나자 첩첩산중이었다. 그는 더욱 이연아를 부하로써 잘 케어 해줬다. 자신이 가까이 붙으려고 할 때나 혹은 은근슬쩍 어필을 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을 보아 여자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아 이연아는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정원이 사라졌다. 갑자기라고 할 정도였다. 회사를 절대 나갈 것 같지 않았던 이가 정말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를 정도로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이었다. 관련하여 사장에게도 물어봤으나 사장 역시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본인의 의사로 퇴사를 했다네.”
“그럼 어디 병원에 입원 했는지 라도 알고 싶은데요.”
“본인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아하네.”
이연아가 그 다음에 찾았던 건 한강휘였다. 다정원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에게도 친구에게 호감을 가진 여자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던 남자였다. 그가 다정원의 소식을 모른다면 다정원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역시 모른다는 답변을 할 뿐이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휴일에 로드샵을 다니던 중 한강휘를 만났다. 정확히는 한강휘와 귀엽게 생긴 여자애였다. 고등학생이라고 착각할 만큼 어려보이는 여자애가 자신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자신을 다정원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동명이인이구나. 신기하네. 정도의 감상이었으나 그는 자신이 직속 선배였던 다정원이라 주장했다. 모른 척을 하던 한강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 순간 그녀는 분노했다. 만나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갈 것이지, 이렇게 까지 자신을 놀릴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런 합당한 분노를 토해냈다. 나중에 무례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고 한 것도 그녀가 충분히 인내심을 가진 여자였기에 나온 반응이었지, 조금이라도 인내심이 모자랐다면 그녀는 한강휘의 싸대기를 올려붙였을 것이었다.
그렇게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이연아는 다정원의 소식이 궁금했다. 어느 정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마음속에 불씨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옛날 다정원의 번호로 문자를 날렸다. 솔직히 정말로 다정원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씨에 모래를 덮고 싶었을 뿐이었다. 끝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정원은 흔쾌히 약속을 수락했다. 약속장소에도 나왔다. 자신을 다정원이라고 주장하던 소녀였다. 이연아는 황당했으나 충분히 참으며 소녀의 말을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말을 나누다보면 정말로 다정원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는 것이었다. 좀 더 소녀스럽고, 좀 더 한강휘를 찾게 된 다정원이라는 건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지만,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그런 말을 하니 썩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다정원이라 주장하는 소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던 이유는 첫 번째가 재잘거리는 소녀가 배시시 웃었을 때 미소가 귀엽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두 번째가 이상하게 다정원을 떠올리게 했다는 점이며, 세 번째가 이전에 자신이 내쳤을 때 다정원과 한강휘가 자신에게 보내던 눈빛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녀는 다음 자리를 약속할 뿐 소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음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이연아는 소녀가 다정원이라는 것을 조금 믿게 되었으며, 세 번째 만남에선 반신반의를 하게 됐다. 네 번째 만남이 되기 전엔 관련 사례를 조사했고, 의외로 도시괴담처럼 성별이 바뀐 이들의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내 다섯 번째 만남에 이연아는 소녀가 다정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별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다정원과 같은 사례를 자신의 손으로 찾아 확인했기 때문이며, 다정원의 별 것 아닌 버릇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정원은 난처한 감정을 토로할 때 자신의 오른쪽 눈을 파르르 떨었다. 별 것 아닌 행동이었으나, 이연아는 그 행동으로 다정원이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하기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을 판별하곤 했다. 마침내 이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원 선배가 맞으시네요.”
“엥? 이미 믿고 있는 거 아니었어?”
“선배는 바보에요.”
이연아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원의 뺨을 쥐고 만지작거렸다. 어쩜, 뺨조차 부들거렸다. 너무 편의적인 변태과정이 아닌가. 이런 말랑말랑하고 탄탄한 피부를 가질 수 있다면, 아니 그래도 남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흐즈므으!”
“벌이에요. 저한테 연락 한 번 없으셨잖아요.”
“즈븐으 므르쯔느!”
“저번엔 제가 못 믿었잖아요. 찾아 오셨어야죠.”
“흐이이잉!”
다정원이 울먹거리며 소심하게 팔을 흔들어 반항했다. 이연아의 팔도 쳐내지 못할 정도로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이전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굉장히 귀엽고 여성스러운 반응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연아가 쉽게 다정원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러한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연아는 소녀를 다정원이라고 인정하고 나서 그 간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경악을 했다. 다정원의 관심사 대부분이 한강휘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다정원은 또 한강휘와 보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근데 저번 주에 강휘랑 속초에 바다를 보러 갔거든? 근데 괜찮드라. 노을 빛나구, 파도치는데 그 때 강휘가 막 분위기 잡는데, 노을이 걔 얼굴에 막 지는 거야. 그래서 솔직히 바다 보다가 괜히 걔 얼굴 한 번씩 힐끔힐끔 보고 했는데 걔는 노을 보느라 정신없더라.”
“강휘씨가 잘 생기긴 했죠.”
“그치? 걔가 좀 잘생기긴 했어. 진짜 잘난 친구야.”
다정원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연아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는 강휘씨 얘기만 하시네요.”
“아, 그런가? 헤헤. 근데 요즘에 보는 게 강휘밖에 없어서.”
다정원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웃었다. 이연아는 그런 다정원이 굉장히 위태롭다고 느꼈다. 다정원은 지금은 분명히 행복해보였다. 그러나 다정원안에 너무 많은 파이가 한강휘에게 쏠려있었으며, 심지어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여자애 같았다.
그녀는 이것이 질투가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것보다 걱정이 더 크다는 것을 인지했다.
사랑은 한편으론 달콤하나 어디까지나 끝도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씁쓸한 정도라면 차라리 괜찮았다. 하지만 이연아가 느끼기에 저 둘이 혹시라도 어긋난다면 그것은 절대 씁쓸한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운명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분명히 이연아의 걱정엔 한 스푼의 질투와, 한 스푼의 명분이 섞여있었다. 그렇기에 이연아는 다정원에게 조금 더 참견을 하기로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음 주엔 강휘가 부탁해서 결혼식에 가기로 했어. 혹시 결혼식에 특별히 챙겨야 할 게 있을까?”
“음, 옷 중에서 흰색은 피해야 해요.”
“그 정돈 알아.”
“그럼 과하게 화장하시면 안 돼요. 선배는 지금 너무 귀여워서 자칫 잘못하면 신부보다 눈에 띌 수도 있어요.”
“에이, 너무 띄워준다.”
다정원은 너스레를 떨며 웃다가 이연아가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천천히 빨갛게 물들었다.
“……진짜로?”
“네. 진짜로요.”
다정원은 곧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숨겼고, 이연아는 그런 다정원을 껴안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이연아는 이런 식으로 다정원에게 여성으로써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고, 한강휘와 일어나는 일에 대한 상담을 할 수 있는 포지션에서 다정원을 대했다. 이것은 곧 다정원에게 있어 이연아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연아의 불안과 걱정 역시 함께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다정원이 한강휘와 관련된 이야기만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이대로는 위험했다. 다정원이든 한강휘든 누군가 한 명은 조금 객관적으로 자신들을 바라볼 사람이 필요했다. 이연아가 느끼기에 다정원은 이미 한강휘에게 종속되어가고 있었다. 이연아가 눈치를 주는 것도 태연하게 넘기고 있었다. 이런 점은 이전의 다정원과도 흡사했다. 이연아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국 이연아는 한강휘에게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작금의 사태를 알려서 한강휘가 조금 객관적인 태도가 될 수 있도록. 일이 잘못되더라도 다정원이 덜 다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아주 조금, 자신의 사욕을 담아 한강휘를 견제하기 위해.
[작품후기]3부 막간은 원래 이연아씨의 하루가 될 예정이었지만 뭔가 설명하는 듯한 화가 됐군요. 음... 이후 공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