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97화 (97/138)

96회

chapter3머뭇거리는 동안 핸드폰의 수신음이 잠시 사라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듯 다시 울렸다. 끈질기지만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권고였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숨을 들이켰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받는 게 빠르신 편은 아니네요.]

“운전 중이었습니다.”

[운전은 끝났나요?]

“수신음이 좀 길게 울리길래 급한 일인가 싶어서 근처 카페에 멈췄습니다.”

[아닌 거 같은데.]

이연아씨는 우울하게 대꾸했다. 양치기 소년을 꾸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 태도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별로 상관없지 않습니까? 용건이 뭡니까?”

[아, 그래요. 용건.]

이연아씨와 나는 용건도 없이 통화를 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예전에 정원이를 좋아하는 별난 취향의 여자라 정원이에게 둘도 없는 기회라고 여긴 내가 알게 모르게 주선을 한 것은 맞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우리는 사적인 만남을 가진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마지막엔 서로에게 무례를,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무례를 저지르고 연락 한 번 없지 않았는가. 언짢은 감정을 다시 토해내려는 순간 이연아씨가 타이밍 나쁘게 말을 이었다.

[한 번 만나죠.]

“후우. 다시 한 번 묻죠. 무슨 용건입니까.”

[저희들이 만날 이유야 어차피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다정원 선배에 대한 얘기에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뱉은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내뱉으려던 말을 끊긴 탓이었으며, 예상했으나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들은 탓이었다.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말을 잇지 못한 이유는 어떻게든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던 내가 핑계를 내뱉기 위함이었으며, 그럼에도 핑계조차 뱉지 못한 이유는 다정원 그 이름 석 자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뚜렷한 메세지를 전달하지도 못하던 내 입이 가까스로 방황을 멈췄다. 그리고 씹어 뱉듯이 말했다.

“언제, 어디서 볼 겁니까.”

[시간은 지금부터 오시면 제가 기다리죠. 장소는 홍대의 카페, 그래요. 저번에 정원선배의 비밀을 들었던 곳이면 어때요?]

“카페 마감시간 안 짧습니까?”

[네, 적어도 몇 마디 할 시간정돈 충분하겠네요. 설마 오시는데 두, 세 시간 걸리시나요?]

“쯧.”

[무례하신 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네요.]

“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억지를 부리는 건 이 쪽이니까.]

그녀가 수긍하자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대화도 없이 이연아씨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결국 먼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끊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왜 이리 신경질이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짜증이 났다. 이유는 없었다. 왠지 그녀의 전화를 받으며,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 기분 나빴다.

물론 단순하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이상하게 파국으로 치닫는 느낌이었다.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언급한 ‘정원선배의 비밀’이라는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차에 올라타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목적지를 재설정했다. 차라리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뒤늦은 후회가 몰려오고 있었다.

***

가게에 도착하자 이연아씨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일은 없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 쪽에서 작게 손을 흔들었으니까. 답지 않게 살가운 태도였다. 주춤했다가 성큼성큼 걸어 바로 자리에 앉았다.

“용건이 뭡니까.”

“뭐가 그리 급해요? 커피나 두 잔 시키죠. 몇 분 말하고 끝낼 것도 아니고.”

“저는 몇 분 말하고 끝내고 싶습니다만.”

“돈은 제가 낼게요.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제가 내겠습니다.”

“저번에 커피 값 한강휘씨가 내지 않았나요?”

이연아씨가 내민 카드를 나지막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낚아챘다.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에스프레소 하나를 시켰다. 에스프레소는 내 카드로 계산하려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카드를 긁었다. 정작 중요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가지 않고 카운터 앞에 서서 기다린 것 역시 그러한 이유였다. 곧 커피가 나왔고 마지못해 받아서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카드를 이연아씨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제 말할 기분이 좀 드십니까?”

“한강휘씨는.”

그녀는 느릿하게 말하며 내 눈을 바라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엄한 눈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한다는 눈이었다. 내가 잘못을 했을 때 누나의 눈이 그러했고, 어머니의 눈이 그러했다. 나는 저런 눈빛에 퍽이나 약했다. 몸이 자연스럽게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강휘씨는 무례해요. 저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치 누나에게 꾸중을 들은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정말로 이게 뭐하는 건지. 나는 그녀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 역시 누나와의 관계와 흡사했다. 그러고 보니 이연아씨 연하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결국 뒤통수를 몇 번 긁다가 다시 제대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 태도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과는 곧잘 하시네요. 좋아요. 이제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 같네요.”

내가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지금까진 이상할 정도로 짜증을 내고 계셨으니까요. 제가 무슨 말을 했든 강휘씨에게 닿았을 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이연아씨가 무엇을 이야기하든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인지하자 조금은 더 대화를 수용할 자세가 됐다. 그녀 역시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무슨 말 부터 시작할까요. 네, 처음은 이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제가 정원선배를 정원선배로 인정하게 된 이유.”

“마지막에 저희가 봤을 때 장난치지 말라고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네. 거의 최근까지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었죠. 많은 고민을 했어요. 아니지. 처음엔 고민도 안했어요. 정원선배가 내가 싫어서 거짓말을 하나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렸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근데 자꾸 눈에 걸리는 거 에요.”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과 자신을 정원선배라고 주장하던 여자애의 눈빛이.”

나는 가만히 이연아씨를 바라보았다. 그 후의 말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세 달 정도 고민을 했죠. 음, 많은 가설을 세웠고, 많은 부정을 했어요. 이성은 내가 속은 거다. 그 사람들은 아주 무례한 사람들이다. 내가 정원선배를 사모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렸는데요. 자꾸 그 눈빛이 신경 쓰였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확인을 하려고 했죠.”

“정원이를 만났군요.”

“예. 그나마도 문자였어요. 정원선배가 번호를 바꿨어도, 아니면 내 문자를 무시했어도, 혹은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어도 저는 정원선배를 제 가슴속에 묻었을 거 에요. 그리고 곧 잊었겠죠.”

“그러나 정원이가 그 자리에 나왔다.”

“네. 한 5주전? 6주전? 그쯤이었던 것 같네요.”

회사에서 내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다가 큰 실수를 했던, 그리고 정원이에게 사과하고 정원이가 받아줬던 그 때였다. 정원이가 못 다한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동시에 내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마음에서 정원이는 그 자리에 나갔으리라. 사람이 고팠던 친구였으니까. 이연아씨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 어색하게 카페에 나와서 제 눈치를 보는데 그 모습이 정원선배와 똑같더군요. 그것만으로 믿을 순 없었지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귀여워지기도 했고.”

그 말을 듣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별 다른 뜻을 가지고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많은 심적 근거가 그녀를 정원 선배라고 말했고, 많은 이성적 판단이 그녀를 정원 선배가 아니라고 했죠. 첫 만남 때는 그게 전부였어요. 정원선배는 자신을 정원선배라고 주장했고 저는 그 이야기를 의심하며 들었죠.”

“그 자리가 대충은 그려지는 군요.”

“눈에 보듯 말이죠? 후후. 가장 많이 붙어다니셨으니까요.”

그녀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 때를 회상하는 듯 했다.

“저번에 강휘씨가 저와 정원선배에게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사실, 첫 만남, 혹은 사적인 일이 없었냐고 했었죠? 그 때 저흰 그런 건 없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아예 남남이었던 것도 아니죠. 저를 도와주셨던 강휘씨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녀와 정원이가 이어지도록 알게 모르게 노력한 것이 나였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이연아씨가 정원이를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화를 낸 것이었다. 그렇게 호감을 보여 놓고 정원이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진실 된 사랑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어린 생각이었다. 심지어 방금까지도 나를 신경질적으로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그 후로 저는 여러 가지를 조사해봤어요. 사장님께 물어보기도 했고.”

“사장님이 말씀해주시던가요?”

“전혀요?”

사장님께선 기본적으로 선하신 분이었고, 마지막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할 정도로 우리를 신경 쓰시는 분이었다. 그런 사장님께서 정원이에 대한 것을 떠보는 이연아씨에게 정원이의 약점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을 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답군요.”

“그 분 다우시죠. 아, 강휘씨 그거 아시나요?”

“뭘 말입니까.”

“강휘씨 지금 처음으로 저랑 대화하면서 웃으셨어요.”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조금 남았던 독기마저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항복입니다. 말 끊지도 않을 거고 끝까지 다 들을 테니 저희 누나처럼 대하지만 마십쇼.”

“누나요? 저 한강휘씨보다 어린데요?”

“저희 누나가 하는 거랑 판박인데요.”

“그것 참.”

“칭찬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민낯을 본 기분이었다. 알고지낸지는 오래였는데 이렇게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았었구나 나는.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정원선배에 대해서 믿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정원선배만이 그렇게 되진 않았다는 거죠.”

“……예?”

“모르셨나요? 인터넷에서는 꽤 유명한 일인데.”

그녀가 핸드폰을 켜서 자신이 모았던 자료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곳엔 일부 거짓이라고 웃어 넘길만한 그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하루 만에 성별이 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불편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네, 삭제됐어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후우.”

무슨 일인지는 알 법했다. 삭제된 시점은 거의 두, 세달 전쯤. 정원이에게도 찾아왔던 국정원 직원들에 의해서 일 것이었다. 정원이도 해당 내용에 사인을 한 적이 있었다. 사회적 여파를 고려하기 위해 당분간은 해당 내용을 언급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충분히 대응책이나 혹은 사회적으로 수용이 될 것이라고 판단될 때 정부측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 그 때까지는 조심해 달라.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자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이만이 아니었군요.”

“네. 정원선배만은 아니었던 거 에요.”

“하아.”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자 그녀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세심한 배려였다.

“이 세상에서 정원선배만이 변했다고 한다면 저도 끝까지 믿을 수 없겠지만 이런 사례가 두 건을 보게 되고 세 건을 보게 된다면 점점 더 믿기 쉬워지겠죠. 보여드리진 않았지만 실제 사진인증 자료도 캡쳐해 둔 게 있어요. 인터넷에선 사실상 거의 퍼진 상태구요.”

“그렇습니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원이를 생각한다면서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원이에게 위안이 될 수도, 혹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나는 내가 안일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이연아씨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곤란하네요. 앞으로 말 할 내용은 감사를 받으면 안 되는 부분인데.”

“예?”

그녀가 난처한 얼굴을 하며 우울하게 웃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떨떠름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강휘씨 혹시 인간의 자아는 신체에 좌우된다고 보시나요, 아니면 정신에 좌우된다고 보시나요?”

“저는 신체와 정신,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다. 정원이로 인해 더욱 고심하던 문제였다. 그렇기에 답변은 바로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답을 듣고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탄식하듯 말을 흘렸다.

“관계라. 그것도 중요한 요소네요. 전 두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을 할 수 있게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자서 무언가 납득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강휘씨는 그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고 보시는 거 네요.”

“예.”

“그렇다면 정원선배는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죠?”

이 질문엔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였다. 정원이가 바뀌었을 때부터 고개를 돌리고 회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기 전 한 번씩 고민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답을 낼 순 없었다. 그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것이 정해졌다면 내 미묘한 태도 역시 이미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이연아씨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강휘씨, 혹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 아시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그녀는 황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그쪽 사상 입장에서 말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의미에서요.”

“원론적인 의미라 하시면.”

“음, 그러네요. 아직 사회적으로 의미가 혼용되는 말이니까요. 저는 이런 의미로 말한 거 에요.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그 방향으로 유도하고, 어, 심하면 세뇌하는 거요.”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마쳤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즐길 수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폐부를 찔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흐름이 끊이지 않게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만난 정원선배는 끝까지 대화를 하다 보니 근래에 들어 겨우 정원선배라는 것을 납득할 순 있었지만, 정원선배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좀 더, 여자애 같아졌죠.”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조곤조곤하게, 그러나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고민을 얘기해보라는 자리에선 강휘씨와의 데이트를 언급했어요. 강휘씨와 싸운 날 저와 전화통화를 두 시간동안 하신 건 알고 계신가요? 강휘씨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네, 강휘씨였어요. 정원선배를 여자아이로 만든 것은.”

“그, 그건.”

“그게 꼭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강휘씨가 일부러 그랬다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정원선배의 말 속에서 강휘씨는 그야말로 동화 속 왕자님이었으니까요. 강휘씨는 물론 무례한 사람이지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요즘 돌아가는 것과 다르게 착한 사람이라는 거 저도 안단 소리에요.”

그녀의 칭찬에도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내게 던진 파문은 컸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생각하지 못한 방향의 의견이었다. 내가 정원이를 여자로 만들고 있었다. 그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말해도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내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는지 그녀가 말을 멈추고 물었다. 나는 간신히 답할 수 있었다. 들어야 했다. 그녀의 의견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필요한 관점이었다. 그녀는 방금과 마찬가지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저는 자아를 확립하는데 정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소수자들 역시 그들이 원하는 자아를 인정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정원선배는 조금 달라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목이 타는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정원선배가 여자가 되는 건 제 입장에선 아쉽지만 정원선배에게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죠. 만일 그게 정원선배가 원한 모습이면요. 문제는 의존성이 높아졌다는 점이에요.”

“아쉽다는 건.”

“그쪽을 물어보시네요. 음, 네. 저 아직 정원선배에 대해서 마음 정리 다 못했어요.”

그 말에 나는 다시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를 잠시 흘겨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강휘씨가 정원선배를 소중히 대했다는 것은 정원선배와 대화를 하면서 충분히 알게 됐어요. 말하는 것 중에 대부분이 강휘씨 얘기니까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제가 보기에 정원선배는 지금 정신적으로 병들어있어요.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지금 당장 강휘씨가 해외로 출장을 나가게 되면 정원선배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대답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단정적으로 답했다.

“빠른 속도로 무너지겠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 나름의 데이터를 모으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판단에 반론을 할 수 없었다. 내 나름대로의 근거에서도 불온한 가능성에 대해 손을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면서도 담담하고 단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 정원선배에 대해서 마음 정리 아직 못했어요. 오히려 남아있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고 있어요. 저도 좀 당혹스럽네요. 저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저는 정원선배를 예전처럼 건강하게 만들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남성성을 되살리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강휘씨와 덜 만나게 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제가 방해가 된다면 제가 멀어질 수도 있어요.”

“그건.”

그녀 역시 정원이에게 헌신적이었다. 자기 자신조차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탄식하듯이 말을 내뱉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네. 저 지금 강휘씨에게 일부러 이런 말 하고 있는 거 맞아요.”

그래, 이것은 그녀 나름의 당돌한 선전포고였다. 나와 정원이의 관계를 비틀고 그녀가 나름대로 정원이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방향의 행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나에게 이것을 말한 것은 그녀의 배려였으며, 경고였으며, 또한 그녀의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이런 방법이 정원이에게 도움일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노력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론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숨을 내쉬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나를 마주보며 말했다.

“그럼 서로 노력 해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뒤따라 일어설 수 없었다.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자리에 남은 것은 식은 에스프레소 약간과 엉켜버린 내 생각의 타래였다. 내게 주어진 숙제는 이 엉켜버린 타래를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나를 존중했다. 그녀 자신의 방법이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었다. 그랬기에 서로 노력하자는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노력할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과연 지금까지 한 것이 정말로 정원이를 어느 한 쪽으로 유도한 것이 아닌가. 내가 정원이를 위해 한 행동이 정원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나는 그런 의도를 전혀 갖지 않고 정원이를 도우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원이에게 두근거렸던 만큼, 정원이를 여성으로써 인식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런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답은 나올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사실을 부정한다. 나를 납득시킬 오답을 찾는다. 내가 안주할 태도를 탐색한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 하나 해결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도 나는 카페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작품후기]오늘은 특히나 더 제가 공지글을 지우더라도 코멘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로 감사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글에 대한 많은 관심, 합당한 비판 항상 달게 받겠습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연아씨가 새로운 라이벌로써 등장하게 되는 것이 4부의 메인스트림이었고, 그 과정에서 다소 과하게 성격이 설정된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조금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이예은씨 역시 다른 형태로 다정원을 위하는 사람이면 어떨까 하는. 그에 맞춰 짜놓은 스토리도 조금씩 변경해야겠네요.

아무튼 글을 올리면서도 가장 떨리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굉장히 조심스럽네요. 어제 싸놓은 활자뭉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더더욱더. 부족한 작품에 많은 관심과 우려를 보내주시는 독자님들께 어느 때보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에 누가 되지 않게 좀 더 많은 고민을 하고 글에 대해 더 진중하게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예은이 아니라 이연아씨네요. 수정 다 했습니다. 정말정말 죄송합니다ㅠ 이연아씨가 맞습니다.

(이하 지워진 화의 후기입니다.)

표지를 그려주신 Realapple님에게 강휘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귀찮은 티를 푹푹 내시면서 남자, 아 왜 내가 남자를... 이라고 하시더군요. 내가 미안하다... 아무튼 완성본은 작품설정 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여우사과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같이 힘내용.

오늘도 부족한 작품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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