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95화 (95/138)

94회

chapter3마침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방금까지도 으르렁거리던 사촌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서있다. 신부는 신부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왔다. 신랑이 지금껏 신부를 지킨 사내에게 고개를 숙인다. 사내는 천천히 딸의 손을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사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침내 신부가 신랑의 손을 잡는다.

방금까지도 밉살스러웠던 사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평소에 내보이던 독기가 다 어디로 가고 그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 행복한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졌다. 주례가 시작됐다. 새로운 인연을 맺은 이들을 위한 축복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약간의 위트, 그리고 관중을 위한 보여주기 식 이벤트.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우리에겐 조금은 지루하지만 그들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에게도 저런 날이 올까.”

그 순간 정원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반쯤의 감동과 반쯤의 탄식이 섞인 벅찬 혼잣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정원이의 손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손이 포개지고, 잠깐. 그리고 정원이가 내 손을 마주잡았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작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반드시.”

“……그래.”

정원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신랑과 신부가 입을 마주쳤다. 나는 천천히 손을 빼내서 박수를 쳤다.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친다. 그들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그 사이에서 나는 계속 네 말이 신경 쓰여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네가 무슨 표정을 짓든 내가 지을 표정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

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은 후 신랑과 신부가 퇴장을 하고나자 기분 좋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나가 나와 정원이에게 다가와서 식권을 넘겨주었다.

“밥 먹으러 가자. 강휘야, 정원아.”

“어.”“네.”

천천히 식당을 향하면서 아까 인사를 못 드렸던 어르신들께도 고개를 숙였다. 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였으나, 그 다음으로 조명을 받은 것은 단연 정원이였다. 정원이는 과도한 시선과 관심에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나갔다. 어떨 땐 너무 피곤해보여서 내게 기대기도 했지만 그런 것조차 어르신들께서는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겨우 식당에 와서 자리에 앉자 정원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야아, 진짜 이 정돈 줄 알았으면 나 진즉에 도망갔어.”

“큭큭. 그러니까 말 안했지.”

“넌 이럴 땐 진짜 성격 더러워.”

“나도 알아.”

정원이가 피곤에 절어있는 동안 잠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기다려주다가 이내 어깨를 살짝 들썩거리고는 음식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먹으러 가야지?”

“그러엄. 오늘 한 거 생각하면 실컷 먹어야지.”

“혹시 힘들면 내가 받아줄까?”

“헛소리하지마세요. 안 그래도 요새 먹는 양 엄청나게 줄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 와도 모자라다구.”

“하하, 그래라.”

정원이와 같이 일어서서 음식을 들고 왔다. 정원이가 받은 것을 바라보니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쌓여있었다. 정말 한결같은 입맛이었다. 오는 길에 정원이가 손이 모자라보여서 제로콜라를 하나 들고 왔다. 제로콜라가 있는 뷔페라니 조금 생소하기도 하지만 정원이에겐 행운이겠지. 역시나 내가 제로콜라를 들고 오자 정원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센스 좋기는.”

“일 이년 겪어보냐? 척하면 척이지.”

“으이구, 장하다, 장해.”

정원이가 내 허리를 툭 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고 식사를 하려는데 사촌 형과 신부가 왔다. 사촌 형은 나와 정원이를 잠시 노려보다가 신부에게 한 대 맞고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사촌 형을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신부한테 좋은 의미로 잡혀 살겠구나. 잘 살고. 성공하고.”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덕담을 들으며 고개를 숙인다. 나 역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 이번이 벌써 축하한다는 말만 세 번짼가?”

“그래, 이 자식아.”

“뭐, 세 번이나 말했을 정도로 진심이야. 신부 잘 만난 것 같다는 건 나도 아버지 말에 깊게 동감하는 바고. 잘 살아. 재밌게 살고.”

내가 독기가 아예 빠진 얼굴로 웃으며 말하자 사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고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너도 옆에 있는 아가씨 꼭 붙잡고. 너한테 과한 사람 같더라.”

“고맙습니다.”

“아니, 대체.”

보는 사람마다 정원이가 내게 과분하다고 평가하니 내 자신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짓자 사촌 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얼씨구? 표정 와, 이거 완전 쯧. 아니다. 너도 니 여자한테 잘 해.”

“에휴. 그래.”

나 역시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자 사촌형이 예의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악의가 없어서 더 분했다. 사촌형 내외가 떠나자마자 정원이가 으스대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과분하다는데요, 자기?”

“예. 깊게 공감하는 바에요, 자기.”

“킥킥킥.”

정원이가 입을 가리고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은 정원이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정원이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날이었다. 기분을 맞춰줘서 나쁠 건 없었다. 정원이가 곧 제로콜라를 따서 캔 째로 마시려다가 주위를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잔에 따라서 마셨다. 그 모습이 웃겨서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주위 눈치를 좀 더 잘 보게 되셨군요. 자기?”

“누구 덕분에 말이에요. 솔직히 지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렇게 깨끗이 그릇을 비우셔놓고 엄살은.”

“내가 지금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욕지거리를 담고 있는지 넌 모를 거야.”

“모르는 게 약이네.”

“말이나 못하면.”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그 후 가족들에게 정원이랑 좀 더 얘기도 하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흔쾌히 우릴 보내주셨다. 심지어 아버지께선 오늘 정원이가 성공적으로 데뷔한 것이 기분이 좋으셨는지 정원이에게 지갑에 있는 지폐다발을 전부 넘기려다가 어머니에게 호쾌하게 혼나셨다. 어머니께선 주책 좀 그만 부리라며 아버지를 데려가셨다.

“솔직히 방금 전엔 좀 주책이긴 했지.”

“으, 응.”

정원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순간 정원이는 슬그머니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타자마자 정원이에게 물었다.

“피곤하지? 바로 집으로 데려다 줄까?”

“흐어어. 일단 잠깐만 좀 쉬고. 진짜 피곤하긴 하다야.”

정원이가 의자에 몸을 싣고 널부러졌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면서 정원이에게 말했다.

“일단 벨트 차. 편한 곳으로 이동할 테니까.”

“어디? 집?”

“뭐 집도 괜찮긴 한데. 그렇게 차려 입고 바로 집 가게?”

“그럼?”

“데이트나 좀 하자. 어, 일단은 쉴 수 있는 곳이면 카페 같은 데라도 갈까?”

“어디든 좋으니까 누울 수 있는 곳으로, 아이씨. 이 옷 입고 널부러져 있기도 힘들잖아. 역시 집으로 가자, 흐이잉.”

“흠.”

나는 고민하다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그 모습을 정원이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럼 적어도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가자. 솔직히 우리가 언제 이렇게까지 꾸며보겠냐.”

“그런가? 그런가? 그런가? 흠, 그렇군. 좋아. 그 정도는 오케이. 그 이상은 노야.”

“큭큭, 예예. 모시겠습니다.”

“오냐. 가자!”

차를 몰아서 번화가의 적당한 주차장에 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원이는 퍽이나 불편해했고, 그래서 근처의 룸 카페에 들어갔다. 들어서고 나니 생각보다 아늑한 분위기였다. 운이 좋았다. 룸 안은 다락방 같은 컨셉으로 잡은 느낌이었는데 들어가기 전 직원에게서 제발 과한 행동은 자제 부탁드린다는 언질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가 했다가 인상을 찌푸리자 점원이 울상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룸에 들어갔다. 정원이는 이미 들어가 있었다.

“흐아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정원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늘어져서 누웠다. 옷이 어쩌고 하던 것은 전부 까먹은 모양이었다. 나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나중에 드라이 맡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정원이는 누워있는 그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 도착해서 하는 말이지만 굳이 집에 안 갈 필요가 있었나?”

“뭔가 니네 집 가면 절대 안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어.”

“음, 그건 나도 그래.”

정원이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방금까지 제 머리가 있던 쪽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뭐 어쩌라고.”

“베개가 없어.”

“근데.”

“너, 내 베개가 돼라.”

“미친년.”

나는 욕을 뱉으면서도 낄낄 웃으며 정원이 머리맡에 앉았다. 그러자 정원이가 내 다리를 베고 누워서는 눈을 감았다.

“아, 솔직히 편하진 않구만.”

“야, 니가 그런데 난 얼마나 불편하겠냐.”

“응, 누구 씨 덕분에 나 오늘 하루 종일 불편했어.”

할 말 없게 만드네. 정원이는 그렇게 누워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곧 새근거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호흡이 들려서 정원이가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나도 편한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정원이가 눈을 붙이자마자 자는 모습을 보니 아닌척해도 얼마나 긴장을 하고 노력했는지 느껴졌다. 그래서 잠시라도 정원이를 푹 쉬게 할 수 있는 휴식시간을 주고자 했다.

따뜻한 분위기의 방에서 정원이가 고르게 숨을 쉬며 잠을 자고 있다. 정원이의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느덧 나까지 조금씩 졸려오는 것 같았다. 솔직히 고른 숨소리를 듣다보면 괜히 나도 오늘 겪은 피곤이 몰려와서.

얼마나 잤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정원이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떴지만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는 건 참을 수 있었다. 현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결론. 졸다가 허리가 조금 숙여져서 정원이의 얼굴에 닿을 뻔 했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신속하게 정원이가 깨지 않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후우.”

고개를 완전히 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눈을 감았더니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정원이의 얼굴, 특히나 빨간 입술이 자꾸 떠올라서, 씨발.

고개를 흔들고 눈을 뜨자마자 정원이의 입술이 보였다. 돌겠군. 깊게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정원이의 향기가 났다. 오늘 아침에 샵을 나오면서 느껴졌던 프레지아 향기. 향수를 쓰지 않았다고 했던 너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안에서 재생되고, 그래서 이제는 익숙해진 너에게서 났던 프레지아 향이 네 냄새라는 것을 알고 나는.

“으음.”

정원이가 뒤척이자 나는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들고 정자세로 앉았다. 덕분에 정원이가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정원이는 천천히 눈을 뜨고 큰 눈을 두어 번 꿈뻑꿈뻑거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미를 찡그렸다.

“뭐하냥.”

“왜, 왜?”

“니 표정 진짜로 이상한뎅.”

“내가 뭐 어때서?”

“중학교 때 엄마한테 야동 들킨 것 같은, 음. 표현이 좀 그렁가. 무튼 그런 느낌인뎅. 후아암.”

“개소리마라.”

“미안미안.”

정원이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뗐다. 자연스럽게 향기도 멀어졌다. 그래서 겨우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원이는 잠에서 덜 깨서인지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크게 하더니 미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얼마나 니 다리 베고 자고 있었냐?”

“어, 몰라?”

“움. 엄마야, 두 시간? 미안해라. 아니지, 너도 모르는 거 보니까 같이 졸았구나?”

“뭐, 그렇긴 한데.”

내가 미묘한 태도를 취하자 정원이는 그걸 내가 떨떠름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는지 재차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니까. 좀 깨우지 그랬어.”

“어떻게 그러냐.”

“음, 그런가? 하긴 뭐. 히히.”

정원이가 장난스럽게 웃더니 내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야, 아무튼 니 덕분에 푹 잤으니 니 부탁이나 들어줘야겠다.”

“내 부탁?”

“사진 찍자매. 가자.”

“허어. 그래.”

“앗!”“어!”

나도 따라 일어서려다가 다리가 저려 휘청거리고 말았다. 정원이가 그런 나를 받쳐주려다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멀어졌던 프레지아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전의 일이 오버랩된다. 정원이가 내게 깔려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표정을 신경 쓰며 천천히 몸을 세웠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마자 눈을 피하며 말을 내뱉었다.

“……미안.”

“어, 어.”

정원이도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해하며 답했다. 잠시간 서로 어물쩍거리다가 다리에 쥐가 날 리가 없는 정원이가 쪼르르 먼저 나가버렸다. 나는 겨우 버티고 있던 온몸의 힘을 풀어버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아.”

겨우 그런 생각에서 멀어졌는데. 돌아버릴 것 같았다. 번뇌의 시간이었다. 요즘 들어 믿지도 않던 신을 얼마나 울부짖으면서 찾는지 모른다. 심호흡. 후, 하. 후, 하. 최대한 빠르게 감정을 진정시키고 방을 나서자 정원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갈까?”

“오냐.”

그리고 사진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태연한 기색, 태연한 표정, 그리고 태연하지 않은 우리가 쭈뼛거리며 어색하지 않은 척을 하며 사진관으로 향했다.

[작품후기]다음 화 정도로는 안 끝나겠네유. 왜 항상 분량이 늘까... 음... 아닌가? 끝낼 만하나?

상태창주의보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글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아득한 -> 아늑한 / 쉼호흡 -> 심호흡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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