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회
chapter3“야, 일어나. 도착했어.”
“으에엥? 흐어으어?”
바다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세우고 정원이를 깨우자 정원이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어찌나 잘 자던지 오는 동안 한 번을 깨지 않았다.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바다에 도착하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닷가 풍경을 보기엔 최적기였다. 정원이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더니 난감한 듯 어설프게 웃음을 흘렸다.
“헤헤, 바다네? 고생했어, 강휘야.”
“오냐. 일어나라.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은 해야지.”
“응.”
너무 자서 그런지 차에서 나와 비틀거리는 정원이의 한쪽 팔을 잡아줬다가 정원이가 자세를 잡자마자 놓아줬다. 차 문을 닫고 나서 바닷가를 향했다. 나도 정원이도 바닷가에 온다는 생각에 샌들을 신어서 모래사장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정원이는 바닷가가 오랜만인지 어느새 신나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와아아아! 바다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다니던 정원이가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사실 한참은 아니고 3분정도 힘차게 뛰어다니더니 배터리가 방전된 듯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조차 조금 웃겼다.
“너는 왜 안 뛰어다녀.”
“난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재미없는 녀석.”
정원이가 괜히 나를 핀잔을 주며 째려봤다. 나는 그것을 흘리고는 하늘을 가리켰다.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야, 숨 고르면서 바다나 봐라. 노을 얼마나 예쁘냐. 지금밖에 못 보는 건데 실컷 봐두자.”
“이게 말 돌리고 있네. 어, 와아.”
정원이는 짜증을 내다가 내 손가락을 따라가 하늘을 바라보자마자 감탄을 했다. 바닷가의 한쪽은 주홍빛으로 물든 노을이 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우연이 겹쳐 무지개가 바다 끝에서 하늘까지 솟아오르고 있었다.
“와, 저거 무슨 색이지?”
“모르겠는데. 옛날에 7색이라고 그러지 않았냐?”
“하나, 둘, 셋, 넷, 어, 다섯 개 정도 보이는데?”
“그럼 그런가보지.”
고개를 돌리면 살구빛과 주홍빛이 어우러진 노을이 지고 있었다. 빨갛다 기엔 밝은, 그리고 노랗다 기에는 조금은 붉은, 그런 경계에 든 것 같은 색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시선을 뺏기고야 말았다. 그 경계에서 세상 끝까지 탁 트인 푸른 바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하늘만큼이나 바다는 넓었다. 뭔가 북받쳐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정원이의 손을 잡았다. 정원이는 자연스럽게 손을 꼭 쥐었다. 그 무엇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침묵이었다. 침묵의 세계였다. 철썩, 처얼썩. 끼룩끼룩. 오직 파도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만이 귓가에 닿았다.
밀물과 썰물이 오고가는 와중에 파도가 치고 있었다. 감정이 출렁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홍빛 하늘에 마침내 밤의 장막이 드리울 때까지 정신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아.”
“어.”
“무슨 생각하냐.”
“바다가 예뻐!”
“그러냐.”
정원이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너도 예뻐.”
“어, 뭐?”
정원이는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런 정원이를 슬쩍 바라봤다가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바람이 불지 않아 바다가 잔잔했다.
“방금 무슨 생각 들디?”
“무, 무슨 소리야?”
“감정, 느낌, 생각. 뭐라도 좋아. 내가 방금 예쁘다고 한 말을 하는 걸 듣고 어땠냐고.”
정원이가 입을 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 발자국 뒤로 가서 고개를 숙였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거리였다. 정원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
“모르겠어서.”
나는 몸을 돌려 정원이를 마주하고 반복했다.
“모르겠어서.”
“그렇, 구나.”
다시 바람이 분다. 파도가 친다. 철썩, 처얼썩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미 조금 어두워진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파도소리만이 귓가에 들릴 뿐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인 침묵이었다. 정원이는 애써 말을 빚어내고 있었다.
“글쎄. 조금은 두근거리고, 조금은 무섭네.”
“그래?”
나는 정원이가 빚어낸 말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그래, 너도 모르는구나. 나처럼 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야.
“그렇구나.”
이번에는 내가 수긍한다. 그래, 우리 둘 다 모르는구나. 그저 헤매고 있었던 거구나. 그렇다면 어떠한 형태도 정답이 될 수 있고, 어떠한 형태도 틀릴 수 있는 거야. 정원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 정원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그래, 일단은 뭐부터 말해야 할까.”
나는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뭐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며, 괜히 꺼낸 말이 오해가 쌓여 네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파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네가 너무 놀라지 않게.
“옛날에 니가 했던 말 기억하니?”
“옛날이라고 해도…….”
“힌트는 너랑 나랑 술 마셨을 때야.”
“술 마신 때로 줄여도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래, 참 많이도 마셨지. 많은 말을 나눴고, 중요한 말도 한두 가지가 아니잖냐.”
나는 그러고는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정원이에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정답을 말했다.
“너는 언젠가 너한테 반하지 말라고 했지.”
“……응.”
“나는 그 말을 음, 평생 친구로서 남아달라고 받아들였거든.”
“어, 그런 뜻으로 말했지.”
“널 여자로 보지 말라고.”
“응. 정확해.”
정원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나올 말을 예상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 감정이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꺼내려던 말을 꺼낸다.
“그걸 모르겠어.”
“그래?”
“응. 적어도 나는 그걸 모르겠어.”
정원이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도 떨어트린 상태로 눈을 마주해주지 않았다. 진심만을 전달해도 너에게 닿기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말을 더할까, 아니면 생각할 시간을 줄까.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의 태도를 보면 헷갈려. 어, 나도 그게 좋은지 싫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는 사랑에 빠진 여자애처럼 굴더라고. 그래서 헷갈려.”
“그렇지만.”
정원이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이번엔 기다려주었다. 정원이가 방금 꺼내려던 말을 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정원이는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너 분명히 나랑 연인행세 할 때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원하는 게 있다고 했잖아.”
변명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내가 자주 본심을 숨기기에, 그리고 너를 너무 잘 알기에 순간적으로 찝찝함이 느껴졌다. 나는 뒤통수를 긁었다. 태도를 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모른 체 지나갈지, 지적할지 조금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좋은 말을 떠올렸다. 네 변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나는 있지, 정원아.”
“응.”
“니가 나한테 뭔가 해줬으면 해서 뭘 해준 게 아니야. 내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해 준거야.”
정원이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해 준거라고 해도 이상하네. 서로 나눈 건가? 누가 일방적으로 해주는 관계는 아니지 않냐, 우리?”
그러자 정원이는 허탈한 듯이 웃었다. 바람 빠진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점점 웃음소리가 잦아들어갔다. 웃음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너는 툭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졌다.
“너는 대단하구나, 강휘야.”
“뭔 소리야. 대단한 걸로 치면…….”
“아니야. 넌 정말로 대단해. 응. 대단해.”
정원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무엇인가를 납득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저 혼자 회복해서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영문을 모른 채로 애매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원이는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와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네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정원이가 그런 싱글거리는 얼굴로 외쳤다.
“나도 모르겠어!”
“뭐?”
“나도 모르겠다고!”
정원이가 기분 좋게, 그리고 시원하게 외쳤다. 방금 전에 바라보던 하얀 바다가 생각날 만큼 시원하게 외쳤다.
“나도 내가 어떤지 모르겠어! 널 친구로 두고 싶은 건지 남자로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내가 다정원으로 더 남고 싶은지, 여자애인 정원이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 나도 하~나도 모르겠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도 시원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더 해야 할 말을 가슴에 담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고 웃었다. 손안에 있는 온기가 따뜻했다. 그 온기가 의지가 되어 기대고 싶은지, 두근거려서 간질간질할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모르는 게 나 뿐만이 아니라는 것. 너도 너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 관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되서 마음 한 켠이 따뜻해졌다. 조바심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사실이 기뻤다.
“아, 맞다.”
“또 뭔데?”
“그, 혹시 강휘야. 핸드폰 켜봤니?”
“왜?”
“한 번 확인해 볼래?”
이번에 데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정원이에겐 안 좋은 습관이 있다. 감회에 잠길 때 분위기를 깬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을 열자 그곳엔 익숙한 친구의 이름이 있었다. 이서진. 그 정돈 아까도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곰곰이 그 때를 떠올렸다. 정원이가 내 핸드폰을 가지고 핏대를 올리며 소리를 지르던.
“야, 너 혹시?”
“헤헤. 근데 걔가 빡치게 하잖아!”
“뭘 잘했다고 웃어!”
나는 정원이를 쥐어박았다. 정원이가 억울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 질렀다.
“아야! 왜 때려!”
“왜 때리는지 몰라서 묻냐? 너 뭐했어? 엉? 뭔 짓했냐고!”
정원이가 고개를 돌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나는 손에 쥔 정원이의 손을 꽉 쥐고는 정원이를 노려봤다. 정원이는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축 늘어져서는 제 딴에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헤헤.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깡?”
“일단 불어.”
“그게, 니 친구 전화가 계속 와서, 내가 강휘 잔다구 말할라구 했거등?”
“그래서.”
“근데 걔가 내가 니 친구라고 하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나한테 욕하는 거야. 니가 아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고.”
“그래서.”
“그래서 맞다고 하다가 빡쳐서 니 여친이라고 화내니까 얼굴 좀 보제.”
“하아.”
한숨이 나왔다. 한 대 더 쥐어박으려다가 참았다. 정원이의 표정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서진이, 서진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조금 익살맞고, 아니, 그냥 지랄 맞은 성격의 개새끼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다운 그런 관계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냥 한 번 보지, 그래. 별 일도 아니고.”
“그치?”
“그래. 밥이나 먹자.”
시간은 늦었고 갈 길은 멀었다. 그래서 일단 참았다. 잘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는 것뿐이었다. 그 녀석이 조금 놀라고, 놀리고, 가지고 놀겠지만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아, 정말로 갈 길이 멀었다. 조금 더 바다나 보면서 감회에 젖고 싶었는데, 아 못 참겠다.
“아, 왜 때리냐고!”
[작품후기]2일차 데이트 2편. 전 장면이 늘어지면 그걸 못 참는 병이라도 있나보죠? 비축분으로 남기면 될 건데 그건 또 싫네요.
오늘은 달콤하지만은 않은, 그래도 3부의 모토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노력한 그런 화였습니다. 이틀 연참은 확실히 좀 빡세네요...
알파센타우리님 후원 감사합니다! ;) ㄱㅇㄹㅎ은 정말 최고에요.
조회수가 어느덧 5만을 채웠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