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85화 (85/138)

84회

chapter3홍대는 대학가 중에서도 굉장한 번화가다. 젊은이들의 열기가 가득한 곳이며 그렇기에 음식 역시 최신을 달린다. 그렇기에 자칫 미리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선택장애가 오기 쉬운 곳이기도 했다. 정원이라면 특히나 더 그럴 것이다. 난 이미 오기 전부터 선택을 마친 상태였다. 더블데이트를 할 때 데려왔던 그 일식집이었다. 정원이는 앉자마자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와, 저번 생각난다.”

“난 저번 건 카운트로 안 칠거야.”

“카운트?”

“이번이 우리 첫 데이트라고 생각할 거라고.”

“아, 하하.”

정원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번 더블데이트 때 정원이는 참 여러 트롤링을 했었지. 시작부터 안한다고 짜증내고, 커피 마시다 빡쳐서 탈주하고, 성규랑 싸우고, 옷도 지 맘대로 입고, 뭘 입어도 자신이 귀여운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부당한 항거일까. 정원이도 그 때를 기억하며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리라.

“나도 그럼 첫 번째로.”

“뻔뻔하기는.”

“니가 먼저 그랬잖아!”

“나는 그래도 되지.”

그렇게 그 때를 떠올리며 투닥거렸다. 이 주제에 있어서만큼은 정원이도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주로 내가 놀리면 정원이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말을 돌리고는 했다. 그 때를 돌이켜보면 그 순간도 추억이 되어 이렇게 웃는 얼굴로 떠들 수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밥은 맛있었다. 애당초 맛이 있기 때문에 찾은 것임을 생각해보면 맛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정원이를 놀리면서 먹었더니 더 꿀맛이었다. 정원이는 울상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야, 성규 불러, 그럼.”

“정하도 부르고?”

“아, 그만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놀리기를 그만 두었다. 영화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정원이도 마침 식사를 마쳐서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정원이가 내 카드를 뺐었다. 그리고는 제 카드를 내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요새 맨날 니가 사잖아. 이 정돈 내가 사게 해줘.”

“오올, 돈 좀 벌었냐?”

“헛소리 하지 말고. 월급날 어젠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잖아.”

그리고는 내 허리를 툭 친다. 계산을 마치고 음식점을 나오며 카드를 돌려주면서 정원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니가 계산 안하고 카드 나주냐?”

“어, 이상한가? 그냥 남자 기 살려주고 싶잖아. 나는 좀 그런 거 있었거든.”

“그런가?”

예전에 정원이가 바라던 것인 모양이었다. 딱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다는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나는 정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아무튼 고맙다, 그래.”

“아이참, 머리 망가져. 지금은 하지 마.”

“알았다, 알았어.”

정원이가 머리에서 손을 쳐내서 나도 얌전히 떼 주고는 다시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 가는 동안 정원이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날은 충분히 따뜻했는데도 얼굴에 있던 핏기가 조금씩 가시는 게 누가 봐도 긴장한 행색이었다. 정원이가 어느새 다시 내 소매를 꽉 붙들고 있었다.

한편 나는 표를 무인기에서 뽑고 팝콘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커플세트에 눈이 가서 그것을 시켰다. 이왕 커플석으로 예약한 거 평소에 못해볼 것을 다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정원이가 아무 말도 없어 허리를 조금 굽혀서 정원이의 허리를 툭 건드렸다.

“햑!”

“어? 왜 이렇게 놀래냐. 미안하게.”

“아니, 아니, 아니야!”

정원이가 고양이가 낼 것 같은 비명에 이어 과한 반응을 보인다. 그 반응을 보며 나는 내 눈치가 모자랐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제부터 거부감을 꽤나 보이긴 했었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 물어봤다.

“너 설마 공포영화 못 보냐?”

“아니누가쫄았다고그래공포영화가튼거완전잘볼수있거든무리아니거든!”

“아, 그러냐.”

생각해보니 정원이랑 영화본 거라고 해봐야 한정 굿즈 좀 달라고 제 돈 내고 같이 보게 했던 애니메이션 영화나 평가가 엄청 좋은 헐리우드 영화나 봤던 것 같다. 공포영화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뒤늦게 다른 영화를 찾아봤지만 커플석에서 봐야한다는 미션 때문에 가장 빠른 영화도 네 시간은 기다려야했다. 나는 어느새 나온 커플세트를 받아서 콜라를 한 모금 빨았다가 정원이에게 말했다.

“그래도 딴 거 볼래?”

“어, 음. 그게.”

“쫄리면 바꿔줄게.”

“누가 쫄린다, 그래! 누가!”

여기서 인정했으면 네 시간을 기다리든 말든 기다려줬을 것이지만 아직 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것을 보니까 아마 무섭긴 해도 버틸 만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기다려줄 필요도 없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정원이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커플석은 가운데에 바가 없어 영화관 의자라기보다는 소파에 앉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아마 혼자라면 평생 경험해 볼 수 없는 것이었겠지. 팝콘을 들고 콜라를 끼워놓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정원이는 혼자서 계속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무리, 아니, 아, 으.”

점점 약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무래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보였다. 괜찮냐고 물어보려는 데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했다. 일단은 영화에 집중하도록 하자. 시작부터 무서운 영화는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 그리고 그 와중에 잔잔하나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bgm이 깔린다. 배우들은 분명히 일상을 보내면서도 한편에 그늘진 얼굴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정적. 사건은 일어난다. 누군가의 악의로 인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때 그 사람과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암전.

“힉.”

화면이 돌아오자 관계자들은 서로 모여서 네 탓이니 하며 서로의 탓을 한다. 군상극으로도 꽤 퀄리티가 있는 작품이다. 오히려 호러 무비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잡혀있는 분위기 정도뿐이다. 그러나 순간 영화는 반전된다. 한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머리카락에 끌려 사라진다. 그리고는 배우의 비명.

“끄으윽!”

사람 죽는 소리가 들린다. 화면 바깥에 있는 배우의 연기인 것 같다. 세심한 부분까지 잘 표현한 것 같다. 그 때 옆에서 내 소매를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정원이였다.

“강히, 가, 강히, 강휘야.”

옆을 돌아보니 정원이가 말 그대로 몸을 덜덜 떨면서 파랗게 질려있었다. 혹시나 몸이 안 좋은가 싶어 손등으로 이마를 만져보고 했지만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정원이에게 최대한 밀착해서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 나, 못 보겠, 히이익.”

꺄아아아악!

배우의 비명과 함께 정원이가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꽉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비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내겐 정원이가 부들부들 떠는 게 너무도 귀엽, 아니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무서워?”

“나, 나아 보내줘어. 못 보겠어. 흐, 으으.”

“그렇게 무서우면서 고집은 왜 부렸어.”

“그치마안. 흐읏!”

정원이가 평소에 잘 내지 않는 약한 소리를 내며 눈을 슬쩍 떴다가 다시 두 눈을 꽉 감는다. 어떻게 그렇게 타이밍을 잘 맞춰서 눈을 떴는지 귀신이 한 사내를 발목부터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이었다. 정원이는 어찌나 놀랐는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쯤 되니 즐기기보단 정원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그만 나갈까?”

“히잉, 못 움직이겠어.”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안고 나갈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시작한 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원이의 힘을 준 손을 풀어내고 두 손 사이에 내 손을 올려놨다. 정원이는 내 손을 무슨 십자가라도 되는 냥 꼭 쥐고는 자기 이마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흠칫흠칫 거리며 내 손을 꽉 쥐었다. 점점 재밌다는 생각보다는 안쓰럽다는 생각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못 보면서 대체 센 척은 왜 한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정원이에게 붙어서 조용하게 속삭였다.

“어떻게, 차라리 무릎 위에 누울래? 니가 일단 귀 막고, 내가 그 위로 막아줄 테니까.”

“응, 응! 응응!”

“그래 눈 꼭 감고. 버텨보자.”

나는 팝콘을 내려놓고 정원이는 내 다리에 머리를 박고 두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나는 그 두 손위에 손을 포개어 정원이의 귀를 막아줬다. 얼굴도, 손도 작아서 두 손에 내 손이 딱 맞게 포개어졌다. 그 와중에도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바쁘게도 흠칫거리는 것이 저뿐만 아니라 나도 영화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빼꼼 눈을 떴다가 기가 막히게 무서운 장면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얜 대체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언제 끝나는 거야아.”

소리는 또 기어들어가듯이 내서 용케 민폐는 끼치지 않고 있다. 다만 나도 이제 주위를 신경 쓸 입장이 못 됐다. 정원이가 하도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제안한 행위였지만,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꽤나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정원이는 내 품 안에 안겨 오늘 아침에 내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던 이화 향을 풍기고 있었으며, 네게 닿은 부분은 이상하게 그 부분만이 화끈거렸다. 와중에 계속 무서울 때마다 품으로 더 안기려고 하니 이쪽도 미칠 노릇이었다.

아, 두 시간이 이렇게 길구나. 눈이 화면을 향했으나 내용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 품안에 정원이가 있었다. 내 모든 감각도 정원이에게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반야심경이나 외우며 영화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결국 영화의 내용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정원이는 한동안 내 품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한 번씩 힐끔거리며 갔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정원이가 진정할 때까지 머리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정원이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나는 고개를 숙여 조용하게 속삭였다.

“이제 좀 괜찮아?”

“으응. 근데 잠깐만 이 쪽 보지 마.”

“그래.”

그 말을 듣고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원이에게 넘기고는 고개를 천장으로 향했다. 정원이가 잠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도 정원이가 나에게 안긴 것처럼 닿은 부분이,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침 정원이도 제 차림을 정비하느라 이쪽을 바라보지 못할 터였다. 그 동안 나도 어떻게든 진정해야 했다. 다행히도 내가 감정을 정리하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정원이가 말을 꺼냈다.

“이제 됐어.”

“그래. 진정 좀 됐어?”

“응. 아니, 응.”

정원이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무리 정원이라도 방금과 같이 굴어놓고 쫄지 않았다느니 그런 소리는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원이는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휘야, 혹시 영화 내용 기억하냐?”

그 난리를 피우고서 기억할 리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원이의 표정이 풀렸다. 풀렸다기보다 이쪽을 놀리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여, 역시 너도 무서워서 못 본 거잖아!”

그리고는 자기만 무서워한 것이 아니었다며 다시 기세를 살리는 바보 같은 녀석을 보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로 치자. 오히려 해명을 하는 편이 더 이상했다. 그러나 그냥 지고만 있기에는 이쪽이 억울할 노릇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조금씩 텐션을 높이고자 하는 녀석의 기를 죽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핸드폰에서 갤러리를 눌러 사진 한 장을 띄우고 그것을 정원이에게 보여줬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너 무섭다고 나한테 안겨서 질질 짜던 모습이지.”

“과, 관객들한테 민폐라며!”

“응, 영화 끝나고 찍었어. 걱정 마.”

“내놔!”

“어이쿠.”

내 핸드폰을 뺏으려는 정원이를 피해 핸드폰을 번쩍 들었다. 키가 내 가슴께나 겨우 오는 정원이 입장에선 점프를 하던 뭘 하던 닿을 수 없는 높이였다. 나는 그 상태에서 카톡을 켜고 누나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응, 누나한테 카톡 보냈다. 오. 확인했네.”

“너 미쳤어? 누구한테 보내? 야, 이 미친놈아!”

“오, 누나 반응 쩌는데? 한 장 더 보내달라는데 어떻게 할래?”

“미친놈! 이 미친놈!”

정원이는 분이 풀릴 때까지 치겠다는 냥 나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피해 영화관에서 요리조리 피하다가 결국 우리의 지랄을 보다 못한 영화관 직원이 ‘자리를 치워야 하니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함께 도망치듯 영화관을 나오게 됐다.

[작품후기]오늘은 연참입니다. 이틀에 걸친 기나긴 데이트씬인데 첫 날부터 이틀이나 써서 되겠어요? 저만 좀 죽어나가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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