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회
chapter3금요일 나도 정원이도 야근도 하지 않고 바로 정원이네 집으로 갔다. 정하의 명령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당장 우리의 일이기에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정하는 보란 듯이 a4용지 한 장에 데이트 코스를 적은 것을 내게 넘겨줬다.
[영화보기, 사진 찍기, 산책하기, 바다보고 오기.]
“뭐야, 이게 다야?”
생각보다 별 게 없었다. 오히려 나보고 데이트 코스를 짜라고 하면 나올 법한 코스였다. 정하가 짠다기에 뭔가 대단한 것을 반쯤은 기대하며, 반쯤은 두려워하며 기다리고 있어서 왠지 맥이 풀렸다. 그러자 정하가 그런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도 좀 고민해 봤는데, 오빠나 언니가 사람 드글거리는 놀이동산이나 쇼핑을 갔다고 쳐보자. 둘 중에 좋아할 사람은?”
“난 싫어.”
“나도 싫어.”
“그럼 오빠와 언니가 뷰가 끝내주는 레스토랑과 보자마자 사진을 찍고 싶은 디저트 카페로 간다면?”
“뷰? 맛이 중요한 거 아니냐?”
“으, 비싸 보여. 강휘 픽은 믿을 수 있지만, 으음.”
정하는 우리 둘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럼 둘을 오늘은 무조건 한다는 분위기의 러브호텔을 보낸다면?”
“방 새로 잡자.” “방 새로 잡자.”
정하는 그거 보란 듯이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는 정하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정하가 옳았다.
“그래, 잘했다. 그래서 이거만 하고 오면 돼?”
“아, 오빠 그거 양면이야.”
“어 그래?”
뒷면을 바라보자 코스에 대한 추가 설명이 있었다. 미션이라고 귀엽게 두 줄을 그어놓은 곳에선 흉악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공포영화 커플 석으로 볼 것. 사진은 러브러브하게 찍어서 인화할 것. 산책은 데이트 코스에서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둘만의 사진 찍을 것. 바다에선 내 선물 사올 것.]
“뭠마?”
“왜? 뭐라고 적혀있는데, 나도 봐봐.”
정원이는 가져가서 바라봤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웃으며 종이를 떨어트렸다.
“미, 미션이 너무 과한데요, 동생님?”
“하나도 안 과해. 아, 지키기 싫으면 이쪽도 있는데 이쪽 볼래?”
“내놔봐.”
다른 쪽 종이엔 단 하나의 단어만 적혀 있었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정원이에게 종이를 넘겼다. 정원이는 보자마자 바로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다정하!”
“난 오히려 이쪽이 좋아. 이쪽으로 할래?”
“아니, 너, 진짜, 으.”
정원이는 그 종이와 정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항복표시였다. 별 수 없었다. 그만큼 다른 종이에 적혀있던 내용이 강렬하고 부담스러웠다. 아무 말도 못하고 부들거리는 정원이 대신 내가 정하에게 첫 번째 종이를 들어서는 말했다.
“처음거로.”
“그래, 잘 선택했어.”
나는 처음 종이의 뒷면만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들며 말했다.
“이거 근데 하루 코스로는 좀 많은데? 바다면 최소 인천이야.”
“어, 하루 자고 오는 건 당연하지.”
“오, 마이, 쉣.”
“다정하아아!”
나는 이마를 짚었고, 정원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정하에게 직접적인 항의를 위해 달려들었으나 이내 진압되었다. 리빙 포인트. 정원이는 신체능력이 굉장히 모자라다. 그러게 헬스 같이하자니까.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거든 간에 하루치곤 짧고 이틀치곤 길어. 아니다, 됐다. 이틀 치 다녀올게.”
“아, 깜빡하고 하나 안 적었으니까 조건 하나 더.”
“뭔데.”
“방은 하나만 잡을 것.”
“하아.”
한숨이 흘러나왔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사실 데이트 코스니 뭐니 그런 건 정하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대충 적혀있는 A4용지의 내용만 보더라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당장 이것. 바다를 보고 온다. 다른 내용과는 명백하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아마 하루를 보내고 오라는 의도가 담긴 가장 노골적인 것이었겠지. 나는 정하를 째려보며 내뱉었다.
“이번에도 손만 잡고 잘 거다.”
“무, 물론이지.”
정원이도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이며 동조했다. 웃긴 건 정하 역시 동의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는 것이었다.
“술 먹고도 안 했는데 술도 안 먹고 할리가 있나. 난 그냥 언니랑 오빠가 같이 자는 거에 익숙해지기를 원하는 거야.”
“왜?”
“반복하다보면 선 넘기가 더 쉬워지니까.”
적나라한 표현에 정원이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조금 찡그리고는 재차 물었다.
“그걸 얘기해주는 이유는?”
“어차피 딴 말 해봐야 납득도 안 할 거 아니야. 그래, 이참에 말하면 언니랑 오빠는 그런 타입이야.”
정하의 말에 홀리듯이 반문했다. 정하가 보는 나와 정원이의 모습이 새삼스레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타입?”
“계속 같이 지내야 서로가 좋아지고 결국 결혼할 타입. 대놓고 물어볼까? 오빠 첫눈에 반한다는 말 믿어?”
“아니.”
“언니는?”
“음, 지금은 좀 그렇지?”
“그거 봐. 나도 그래서 그냥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저번에 좀 실망이 커서.”
정하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픈 건 이쪽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와 오빠한테 기회만 나면 계속 같이 자게 할 거야. 앞으로 각오해.”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정하만이 할 수 있는 참견이었으며, 그렇기에 더욱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현 상황을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여겼다. 나와 정원이는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누며 한 발자국을 더 나아간 상태였다. 친구로서 약속한 연인 행세는 그 자체로써 위태한 관계였다.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아주 작은 계기만 있다면 그 이상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은 나도, 정원이도 예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그 사이에서 친구라는 부목에 기대어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관계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었다. 정원이도 그럴 것이었다. 그리고 정하의 이런 작은 개입 하나하나가 우리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했다.
“뭐, 그래. 그건 니 맘대로 하고.”
“강휘야?”
도중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원이를 내버려두고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첫 날에 앞에 데이트 메뉴 하고 정원이 집에 데려다 주고 다음 날에 바다 가면?”
“오, 오빠 똑똑하네. 좀만 더 똑똑했으면 나도 놀랐겠다.”
정하는 종이 앞면에 둘이 한 방에서 자고오기 항목을 적어 넣었다. 시발. 정원이도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강휘 넌 진짜 똑똑한데 멍청해.”
“시발.”
그러고 나서 정하에게 자세한 데이트 코스를 물었더니 나보고 짜라고 한다. ‘너한테 다 맡기라며?’라고 말했다가 뒷면부터 적으려는 정하를 겨우 말리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뭔가 속은 느낌이다. 계속 정원이의 ‘넌 똑똑한데 멍청해,’ 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아침이 밝았다. 바다는 내일보자. 그렇게 정원이와 말을 하고 오늘은 서울 안에서 놀기로 했다. 즉, 오늘은 차를 끌고 다니지 않기로 했다. 시간은 넉넉잡아 12시에 홍대에서 보기로 했다. 영화 예약은 2시 반으로. 마지막까지 꼭 이 영화여야겠냐며 침울하게 물어보던 정원이의 얼굴이 꽤나 재미있었다. 뭐 어떻게 해 그럼. 공포영화라곤 이거 하나 하는데. 예약할 때 이번 년도 최고의 호러무비 같은 문구가 적혀있는 게 눈에 띄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옷을 고르다가 결국은 저번에 더블데이트랍시고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 입게 됐다. 옷 신경을 잘 안 쓰는 편이었는데 정작 이런 자리에 나가려고 하니 입을만한 게 없었다. 나중에 정원이랑 가서 사던가 해야겠다. 아니, 나중일 필요가 있나? 오늘 그냥 정원이한테 얘기하고 옷이나 골라볼까.
시간을 보니 머리를 할 시간이 있을 것 같다. 첫 데이트다. 최대한 준비하고 가야 예의에 맞으리라. 문득 더블데이트 때 정원이 차림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그렇게 차려입고 오진 않겠지. 그럼 꼭 혼내줘야지.
옷을 차려입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는데 미용사가 저번 일을 기억하는 지 저번에 머리하러 갈 때 그 분인가요? 하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더니 미용사는 거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때처럼 기분 좋게 웃고 계시잖아요!”
그제야 나는 거울 속에 내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나는 지금 웃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는 새 기대에 부풀어서 풍선처럼 떠있었구나. 나는 미소를 지은채로 미용사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미용사는 내 엉뚱한 대답에 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좋은 센스가 불러온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30분이나 이르게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할 때 대기시간이 없어서였겠지. 그러나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가을을 탄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것을 비웃었던 나는 지금 이른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너를 볼 때 더욱 그랬다.
너는 계단을 타고 올라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기회가 있어 이화 여자 대학교를 간 적이 있다. 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고등학교 때 현장 답사니 뭐니 하며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에 있었던 답사라 여대생을 보고자 했던 같은 반 녀석들은 시무룩해했으나, 나는 이화나무에 달린 배꽃에 정신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하얀 꽃봉오리가 수줍은 듯 얼굴을 보여주진 않고 빼꼼 이쪽을 바라봤을 때 나는 시선을 빼앗기고 하이얀 이화나무만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배꽃의 향이 났다. 너를 보니 그 때의 향기가 아스라이 나기 시작했다.
너는 귀여운 리본이 달린 하얀색 브이넥 블라우스와 보랏빛이 감도는 일자형 스커트를 입고 올라오고 있었다. 베이지 색 니트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건 네가 가진 원래의 귀여움에 더해 대학생 새내기와 같은 청순함을 더하고 있었다. 손을 흔들 때 그런 니트의 소매를 손목에서 감싸 잡고 흔드는 네 모습을 보며 나는 그만 시선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너는 그렇게 하얀 미소를 짓고, 배꽃 향기를 아스라이 풍기며 내게 다가왔다. 손을 흔들며 찾아온 너는 계단을 올라와서인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내 앞에 서서 나를 올려봤다가 고개를 떨어트려 땅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어색한 듯,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땅을 단화 끝으로 톡톡 치는 네 발엔 작은 베이지 색 단화가 신겨있었다. 이내 꽃망울이 수줍게 물어왔다.
“그, 어때?”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려다가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땅 끝을 바라보는 너와는 반대로 하늘 모서리를 찾으며 뭉근하게 말을 꺼냈다. 가을이 찾아오고 있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색이었다.
“미안한데.”
“어? 왜, 아, 아니야. 응.”
“아니, 미안하다는 게 그런 말이 아니고!”
내 말에 꽃봉오리를 축 늘어트리는 네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네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변명하듯 진심을 늦을세라 꺼내고 만다.
“너, 예쁘다는 말 하면 싫어하니까.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거야! 예뻐, 그 어느 때보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 그리고 오늘 입은 거 진짜 내 취향이야! 아니, 아. 응. 그래.”
“어? 으음.”
정원이가 그 말을 듣고 수줍게 내 눈을 마주본다. 행여나 내 말이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꾸며낸 말인가 천천히 나를 들여다본다. 그 기색을 느낀 나는 부끄럼을 숨기고 싶으면서도 네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너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네가 먼저 내 눈을 피하고는 차마 숨기지 못한 부끄럼을 살포시 웃음에 담아 내비친다.
“헤헤.”
그리고는 내 소매를 잡고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예쁘단 말을 싫어하던 네 모습과, 지금 너의 그 기분 좋은 미소가 내 안에서 교차하며, 그런 복잡한 심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네 미소가 좋아서, 그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을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
“가자, 밥 먹어야지.”
“그래. 밥부터 먹자.”
이동하는 동안 너는 끝까지 내 소매를 놓지 않았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저 걸음걸이를 신경 쓰며 네가 내 소매를 놓치지 않도록 팔을 흔들지 않았다. 너는 가만히 내 옆에서, 그리고 반 발자국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다. 채 닿지 않은 팔이 이상하게 따뜻한 봄을 달고 달아오르고 있었다.
[작품후기]어제 내용을 고치지 못한 것은 코멘트를 확인하지 않거나 그런 게 아니라 몸이 안 좋아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일 수정하겠습니다...
추천 2천회 감사드립니다! 라노베 투베 1위는 금방 흡혈귀와 사냥꾼 쪽으로 가긴 했지만 그래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완결 내고 보고 싶은 작품이 늘고 있어서 참 기분이 좋네요.
Hilde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서로 힘내자구요.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글을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