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회
chapter3우리는 어디까지나 카페에서 나왔을 땐 웃고 있었다. 이건 그 후의 이야기. 정원이를 데려다주고 바로 도망가려다가 뒷덜미를 잡혔다. 정확히는 정원이를 혼내려고 기다리고 있던 정하를 피해서 슬그머니 도망가려다가 정원이에게 손목을 잡힌 것이었다. 이러기야? 너야말로 이러기야? 서로의 눈빛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우리 둘의 싸움이 아니었다. 정하가 한숨을 내쉬자 우리는 어느새 눈싸움을 멈추고 바로 정하의 눈치를 봤다. 정하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나는 움찔했고 정원이는 들키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혼난 이유는 총 세 가지였다.
걱정되게 왜 전화도 안했느냐. 왜 술 쳐 마시고 계획도 없이 정원이와 잤느냐. 그리고 세 번째가 가장 듣고 있기 힘들었는데, 혹시 강휘 오빠는 고자냐는 말이었다. 누나에게 했던 변명을 다시 정하에게 꺼내기도 어려웠다. 정하는 우리가 사귀고 있는 척을 하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사귀는 척을 하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하냐고 물었더니 정하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술 쳐 마시고 제정신도 아닌데 여자애랑 한 침대에서 자면서 안 덮쳤다고? 오빤 고자 맞아.”
“정원인데?”
“언니라도. 아님 뭐 언니가 못 생겼니?”
“아니, 어떻게 생긴 게 중요하냐?”
“중요하지. 이렇게나 예쁜데.”
정하가 정원이의 턱밑에 손을 대며 말했다. 정원이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두 팔을 들었다. 항복 선언이었다.
“그래 나 고자다. 됐냐?”
“에휴. 정신적 고자네, 진짜.”
“풉. 푸흡! 고자래, 고자!”
그 말을 듣고 정원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자 그 순간 정하가 정원이를 노려봤다. 정원이는 웃는 낯 그대로 경직됐다. 손이 잡힐 때까지도 정원이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정하는 웃으며 정원이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정원이는 그제야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버텼지만 결국 정하를 이겨낼 순 없었다.
“언니는 천천히 대화해보자고. 천.천.히.”
“강휘야! 강휘야!”
정원이가 애타게 나를 찾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할 것도 없이 나는 방금 전 혼나고 있던 나를 보고 비웃었던 정원이를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 모습을 무시하며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인사조차 과분했다. 아니, 위험했다. 나는 그렇게 숨죽이며 맹수가 사라지길 기다리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다. 멍청한 정원이. 고마운 정원이. 어젯밤 정원이의 밤은 길었을 것이다. bye.
여하간 이런 일이 있었던 고로 정원이는 오늘 한참이나 삐져있었다. 연인행세를 제대로 하자고 한지 첫 날부터 삐끗대는 셈이었다. 얼굴을 두어 번 마주쳤는데 마주칠 때마다 횡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재성선배가 물었다.
“또 싸웠냐?”
“아니, 또라뇨. 맨날 싸우는 줄 알겠네.”
재성선배랑은 야근을 함께하며 점점 편하게 말을 놓게 됐다. 재성선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번에도 싸우는 거 나 때문에 화해한 거 아니냐?”
“아니, 거 지나간 얘기를……, 그리고 그래서 비싼 거 선물해드렸잖아요.”
“아, 그렇긴 한데. 아무튼 또 싸웠냐?”
“하아, 조금?”
“거봐라. 맨날 싸우는 거 맞네.”
“맨날은 아니라니까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재성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큭큭, 힘내고. 무조건 먼저 기어 들어가.”
“왜요?”
“저번에 보니까 너한테 과분하더라. 아, 헤어지면 말하고.”
“하아, 선배랑은 이제 정원이 얘기 안 해요.”
“지금은 해서 얘기 나왔냐?”
맞는 말이었다. 재성선배는 평소에도 스마트하지만 사람을 놀리거나, 갈굴 때 더욱 스마트해진다. 본성을 의심해 봐도 될 사람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두 손을 들고 휘적거렸다. 재성선배는 그런 나를 보고 비웃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우연히 정원이가 내 앞에서 배식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홱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보아 나를 기다렸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억지로 정원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원이가 내 손을 털어내려고 팔을 돌렸다. 나는 다시 정원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야, 삐졌냐?”
“안 삐졌거든?”
“정하한테 대체 얼마나 까였길래 그래?”
“말도 마! 내가 얼마나 혼이, 핫! 말 안 할 거거든?”
정원이가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은 간질간질한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밥을 받고 같은 자리에 앉자 정원이가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나 역시 같이 일어나자 정원이가 나를 째려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초코 맛 사탕을 꺼냈다. 우리 집에서 정원이에게 주던 주전부리 중 하나로 그 중 정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가격은 지금 먹는 밥보다 간당간당하게 쌀 정도였으며, 가격보다는 프렌차이즈에서 파는 것이 아니기에 구하기가 영 귀찮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즉, 정원이가 좋아하지만 구하기는 힘든 녀석이었다는 뜻이다.
정원이가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정원이의 자리 앞에 그 녀석을 내려놨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고 정원이를 바라보지 않으며 밥을 먹었다. 곧 사탕이 사라졌다. 이 역시 모른척했다. 말 한 마디 없이 식사가 이어졌다. 거의 다 먹을 쯤이 돼서야 정원이가 입을 열었다.
“으으, 너 진짜 못됐어.”
“뭐가?”
“괜히 나만 나쁜 사람 만들잖아. 나도 알아. 별로 짜증낼 거 아닌 거.”
곧 죽어도 삐졌다는 말은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별로? 딱히 너 나쁘다고 생각 안 해.”
“그래도 딱히 잘못했다고도 생각 안 하지?”
“물론이지.”
“못됐어.”
이미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입을 열기 시작한 거라 운을 떼자마자 식사가 끝난 뒤였다. 대화가 조금 더 필요했다. 나는 손으로 뭔가를 마시는 흉내를 냈다.
“커피?”
“고.”
정원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 도착하고 정원이에게 뭐 마실 거냐고 묻자 초코 프라푸치노를 먹겠다고 한다.
“너 내가 준 초코 맛 사탕도 먹을 거 아니냐?”
“쪼꼬 좋은걸.”
“그래, 너 먹고 싶은 거 먹어라.”
초코 프라푸치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나오는 걸 받아서 자리에 앉았더니 정원이는 초코 맛 사탕을 물고 있었다. 사탕이 좀 큰 편이라 볼이 볼록 나와 있었다. 누나는 일부러 정원이에게 저 사탕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초코 프라푸치노를 넘겨주니 그 상태 그대로 빨대로 크게 빨아먹는다. 디저트도 복스럽게 먹을 수가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상하게 된다. 정원이는 프라푸치노를 빨아먹다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실실 웃으며 사탕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언제 삐졌냐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부족한 건 내 성의가 아니라 당이었나 보다.
“봐봐. 내가 얼마나 어제 혼난 지 알아? 정하 그 계집애. ‘언니는 등신이야,’ 이러면서 말을 하는데, 술도 못 마시면서 왜 그렇게 무식하게 마시냐 그러질 않나, 강휘 니가 고자면 나는 등신이라고 그러는데, 부끄러운 줄 알라 그러는데. 어?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 줄 아냐?”
그리고는 재잘재잘 질리지도 않고 투정을 부린다. 얼마나 말이 하고 싶었는지 별 다른 추임새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쉬지 않고 얘기를 한다. 결국 점심시간이 끝날 쯤 돼서도 정원이는 말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했다. 나는 그런 정원이의 손에 들렸던 사탕을 뺏어서 입안에 물려줬다.
“야. 사탕은 언제 다 먹을 라고 그러냐?”
“앙옹잉엉.”
“알고 있다고? 야, 니 억울한 사정은 회사 끝나고 들어줄 테니까 그 사탕 다 먹고 오후 일이나 힘내세요.”
그러자 정원이가 입안에 물고 있던 사탕을 다시 손에 쥐었다.
“나 오늘 야근인데?”
“그럼 나도 야근하지 뭐.”
“와, 오빠야. 진짜 멋지다. 최고!”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정원이가 눈을 빛내며 나를 띄워줬다. 퇴근하고 지하철에 찡겨서 가지도 않아, 자기 투정도 들어줘, 그런 속내가 눈에 빤히 보였지만, 오히려 빤히 보이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특히나 손바닥 뒤집듯이 어느새 기분이 풀린 모습을 보니 조금 웃기기까지 하다. 정원이는 사탕을 빨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 달다.”
“그 사탕 원래 달아.”
“사탕 말고, 바보야.”
내가 의문을 표하자 정원이가 내 허리를 가볍게 때리고는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파이팅자세다.
“그냥 너도 힘내라고.”
“뭐? 하, 그래.”
서로 미소를 교환하고 마음속에 쥐어서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점심시간 잠깐 오늘 하루를 힘내자는 응원을 나누며. 이상하게도 오후엔 오전보다 업무처리 속도가 배는 빨랐다.
***
야근이라고 해봐야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9시쯤 정원이가 인사과에 얼굴만 빼꼼하고 내밀어서 피식 웃었다가, 같이 야근하던 재성선배가 그 꼴을 보고 자기 업무를 전부 나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게 성사됐다면 정말로 늦었겠지만.
재성선배는 이것도 네가 하고, 저것도 네가 하고 하면서 나에게 제 업무를 넘겨주다가 정원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농담이었다며 나를 보내줬다. 솔로는 서러워서 시발. 이라는 말이 절절하게 공감이 간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와서 차에 앉아서 충분히 정원이의 투정을 들어주다가 정원이를 집에 데려다줬는데, 출발하기 직전에 정원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 집에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굉장히 꺼림칙해 하는 목소리였는데, 시간 역시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다음에 보자고 할지 고민하다가 아직 차를 출발하진 않았으니 잠시 들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원이네 집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원이는 정하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원이의 꺼림칙한 목소리가 오버랩 되며 그제야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도 앉아.”
“……저렇게?”
“저건 언니가 맘대로 저렇게 앉은 거지, 내가 시킨 건 아니거든?”
“으.”
정원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엉거주춤 정원이 옆에 앉았다. 딱히 무릎은 꿇지 않았지만. 그러자 정하가 선언했다.
“이번 주말 둘 다 시간 비워.”
“뭐? 음. 어차피 이번 주말에도 정원이랑 놀려고 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왜?”
“둘이 이번 주에 데이트 해.”
그 말을 듣고 순간 사고가 정지한다. 데이트? 누가? 내가 잘못들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보았다.
“뭐? 데이트? 누가.”
“오빠랑 언니가.”
“왜?”
그러자 정하가 한숨을 내쉬며 나와 정원이를 노려봤다. 한심한 것들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말이야, 둘이 언젠가 사귈 거라고 생각했거든?”
“허어.” “허어.”
정원이도 나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멍청한 소리를 냈다. 납득 이전에 저 판단의 근거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저번에 언니랑 오빠가 정말 손만 잡고 잠만 자고 돌아온 날에 깨달았어.”
“둘은 평생가도 안 될 수도 있겠다는 걸 말이야.”
“생각해보니 둘이서 다니면서 아직도 피시방, 밥, 피시방, 밥 그러고만 있지?”
“도저히 못 참겠어. 내가 데이트 코스 짜줄 테니까.”
“다 돌고 사진 찍어서 와.”
정하는 단호했다. 정원이가 억울한 듯 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애냐?”
“후.”
“힉.”
반항은 일순간이었다. 정원이가 아주 조금 소리를 높인 순간 정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정원이는 기겁하며 내 등 뒤로 숨었다. 평소에도 이러고 살 거라는 생각을 하니 정원이가 조금 불쌍해진다. 그러나 정하가 다음으로 내뱉은 말엔 나 역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 내가 방 비워 줄 테니까, 둘이 애가 아닌 걸 증명해볼래?”
“하아.”
“야, 다정하! 너 진짜 선 넘는 거 아냐?”
“그럼.”
정하가 내 등 뒤에서 삿대질을 하는 정원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둘이서 미묘하게 꽁냥대면서 매 주 내 속을 긁어 놓는 주제에 정작 모텔 가서 손만 잡고 왔다는 얘기를 들은 내 입장에서 둘은 선을 넘은 걸까? 안 넘은 걸까?”
논리구조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하의 말은 논리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감의 문제였다. 정원이가 요즘 점점 감정을 앞세워 말하곤 했기에 나 역시 익숙해지고 있는 방식이었다.
정하는 화가 나있다. 왜지? 요즘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원래도 정하는 나나 정원이와 자주 놀지 않았다. 정하는 속칭 인싸였다. 우리 같은 아싸들과는 노는 방식도 궤를 달리했다.
그렇다면 왜? 곰곰이 정하의 말을 곱씹어본다. 그리고는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정하는 그냥……꼬운 거였다. 뭐가? 그냥. 아무거나.
말 그대로 우리가 제 앞에서 둘이서만 노는 걸 보는 게. 그리고 그 와중에 저한테 말도 하지 않고 둘이서 나가서 밤새도록 연락이 없던 게. 나는 정하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거면 됐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뭐, 그래. 알았어.”
“강휘야?”
“잘 생각했어, 강휘 오빠.”
그리고 정하가 남은 정원이를 노려보자 정원이도 결국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좋아! 둘 다 잘 생각했어. 기대하고 있으라고. 내가 완벽하게 다 짜줄 테니까."
정하가 그제야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정원이가 뒤에서 내 등을 콕콕 찔러서 고개를 돌리자 정하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말했다.
"무슨 생각이야?"
"뭐, 어때. 가끔은 다른 방식으로 놀아도 괜찮지. 그리고……."
"그리고?"
정원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씨익 웃으며 정원이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밀었다.
"저번에 하고 싶은 거 말해 보라며. 데이트야 당연히 해보고 싶었지."
그러자 정원이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재밌게 놀자."
"그래. 재밌게."
참고로 우리는 그렇게 둘이서만 웃고 있다가 그런 점이 문제라며 정하에게 한 번 더 구박을 들었다.
[작품후기]오늘은 사정이 있어 핸드폰으로 작성하고 퇴고도 부족해서 오타나 비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작 700이 넘었네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 그대로 등 오탈자나 기타 어색한 문장 퇴고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