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회
chapter3얼마간의 소동이 끝나고, 겨우 오해를 잠식시킬 수 있었다. 나는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으로 ‘정원이를 소중하게 대하고 싶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속도로 나아가고 싶다.’ 같은 입만 번지르르 한 소리를 꺼냈다.
그 결과 아버지와 어머니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누나는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저히 어느 한쪽으로 기운 감정이 아니었기에 복잡한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한편 정원이는 그런 내 변호 아닌 변호를 들으며 진정을 했다. 내 말을 듣고 진정한 것은 아니었다. 정원이에게 필요한 것은 급발진을 한 이후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었으며, 그것을 내가 벌어준 셈이었다.
변호가 끝나고 한숨을 돌리는 동안 아직도 내 손에 봉투가 쥐어진 것을 깨달았다. 처리해야 할 빨래였다. 내가 이물질이 묻는 빨래를 하러 가려하자 정원이가 내 소매를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 자리에 혼자 두고 갈 거냐는 의미였다. 솔직히 정원이를 여기에 버려두고 가면 내 처신은 굉장히 편할 것이나, 뒷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정원이의 눈빛은 간절했다.
“어제 술 마시고 이거저거 조금 묻었는데 대충 손빨래해서 세탁기에 던져놓을게. 정원아 가자.”
“엉!”
정원이가 졸졸 따라왔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이 광경을 꽤나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모두 만족했으니 윈-윈인 셈이었다. 베란다로 나와 빨랫감에 빨래비누를 묻히고 나서 빨래판에 문댔다. 내건 꽤 세게 해도 상관없으나 정원이것은 소재가 얇아서 조심히 문대야겠다. 내가 정원이가 어제 입었던 상의를 물에 풀자 정원이가 내 팔을 잡고 말했다.
“야, 내건 내가 할게.”
“됐다. 이왕 손에 물 묻은 거 내가 할게.”
“그치만 더러운 거 묻었잖아.”
“방금 전에 내 옷은 뭐 딴 게 묻은 지 아냐?”
“으.”
정원이가 눌린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무시하고 옷을 살살 문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반복적으로 문대다 보니 묻은 게 떨어져나갔다. 정원이는 내가 빨래하는 모습을 쪼그려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야, 너 집안일은 다 잘하는구나?”
“어. 내가 좀 대단함.”
“말이나 못하면. 근데 금수저면서 왜 다 잘하냐?”
나는 물에 헹궈 살짝 짜낸 후에 세탁기로 던지고 바구니에 있던 세탁물을 전부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부으며 말했다.
“비밀인데, 어머니가 집안일을 좀 못하셔. 아, 혹시 가족들 거랑 같이 빨래하면 좀 그렇냐?”
“아니 상관없는데. 무튼 가정부는?”
“너희 집은 있냐?”
“없긴 한데, 우리 집은 굳이 말하면 니네 급은 아니잖아. 아빠 혼자 돈 벌고, 그래봐야 공무원 월급이고.”
“나도 잘 모르겠는데 우리 집도 고용 안하더라.”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우리 집은 가정부를 고용하지 않았고, 집안일은 웬만하면 자기 분담이었다. 와중에 어머니는 자꾸 실수를 하셔서 누군가는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목마른 자는 나였고, 우물을 파기 시작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참고로 어머니가 세탁을 하실 때마다 섬유 유연제를 세제 대신 넣는 것은 아닌가,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다.
“자, 끝. 들어가자.”
“엉.”
세탁기를 가동하고 들어가자 어머니께서 과일을 깎고 계셨다. 누나가 정원이에게 손짓하자 정원이도 얌전히 누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누나가 바로 정원이에게 사과가 꽂힌 포크를 들려줬다.
“많이 먹어. 밥은 먹고 들어온다고 들어서.”
“네. 먹고 왔어요. 감사합니다.”
정원이가 사과를 베어 물어 오물오물거리며 먹었다. 누나는 그런 정원이를 귀여워죽겠다는 듯 바라봤다.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아마 나와 정원이 중에서 한 명을 고르라면 누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정원이를 고를 것이다.
아버지도 정원이에게 회사 일이 힘든 것은 없냐면서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어머니께서도 정원이에게 강휘는 어떻냐며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정원이는 다소 난처해하면서도 아까랑 달리 잘 넘기고 있었다. 한 번씩 애처롭게 이쪽을 바라보는 것은 무시하기로 했다. 평소엔 신봉하지 않는 공리주의적 사고가 이번만큼은 편리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동안 누나가 정원이를 안고 쓰다듬고 하던 와중에 정원이가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가족들은 내가 있는 걸 깨달은 듯 내 쪽을 보며 물었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어. 없었어, 진짜.”
“같이 살 생각은 없니?”
“정원이 지금 자기 여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제가 가긴 뭐하죠.”
“너도 곧 독립해야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 뭐.”
나는 설렁설렁 대답하며 시계를 바라봤다. 5시.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슬슬 정원이를 구해주지 않으면 투정을 들어주는데 한 세월이 걸릴 것 같았다. 너무 예쁨 받는 것도 노동이 될 수 있었다. 정원이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이 좀 데려다주고 올게요.”
“좀 더 있지 그러니?”
“그래, 너무 일찍 간다.”
“어, 그게, 음.”
어머니와 누나의 열렬한 요청에 정원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에 슬쩍 그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내가 말을 받았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얘도 피곤할 거고. 서로 할 말도 좀 있어서요.”
“그래? 그럼 잘 배웅해주고 오렴. 정원아, 조심히 돌아가고.”
“네, 안녕히 계세요!”
정원이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싶어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정원이는 차례차례 아버지와 누나에게도 인사를 했고 누나는 정원이를 꼭 안고 있다가 겨우 놓아줬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자 그제야 정원이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아아, 힘들었다.”
마치 하얗게 불태운 듯이 허리의 힘조차 빠져서 자리에 늘어져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머리를 톡톡 두들겨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흐어엉, 진짜 힘들어.”
정원이가 칭얼거렸지만 이번만큼은 가만히 들어주기로 했다. 아직도 정원이가 누나를 말리려고 했던 말과, 그 때의 뻘쭘한 분위기만 생각하면 내가 다 이불을 차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오늘 정원이도 자기 전에 한참동안이나 이불을 차고 있겠지. 이 정도 투정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정원이는 힘들었다, 부끄럽다, 다 너 때문이다 하며 투정을 부렸고 나는 수고했다. 역시 네가 최고다, 정말 고맙다는 소리를 하며 정원이를 달랬다.
“밥 뭐 먹을래?”
“아니, 방금 전까지 계속 뭐 먹어서 배불러.”
“그럼 카페로 가자.”
사과를 시작으로 우리 가족들은 정원이한테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하며 쉬지도 않고 계속 정원이에게 뭘 먹여댔다. 그 때를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비질비질 흘러나왔다.
“웃냐? 웃어? 야! 웃어?”
“어어, 운전 중이다? 위험하니까 흔들지 마.”
“으! 진짜!”
정원이는 내가 실실 쪼개자 화가 난다는 듯이 내 팔을 흔들다가 내 말에 순순히 손을 내려놨다. 대신 카페에 도착해서 차에 내리자마자 내 다리를 찼다. 숙련된 솜씨의 조인트였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 정원이가 얼마나 부끄러운 지를 알려주는 지표 같아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정원이는 씩씩대며 짜증을 냈고 결국 나는 미안하다며 다시 정원이를 달랬다. 놀렸다가, 달랬다가를 반복하다 정원이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약이 오를 쯤에 나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자, 이제 원래 하려던 얘기 시작하자.”
“너, 진짜. 아, 두고 보자, 진짜.”
정원이가 이를 갈며 노려보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자, 일단 기본 스탠스는 어떻게 취할래?”
“아 그거 말인데.”
정원이가 생각이 있다는 듯이 한쪽 손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아는 사람 있을 땐 그냥 애인이라고 하자.”
내가 설명을 요구한다는 듯 가만히 정원이를 바라보자 정원이도 다시 말을 이었다.
“뭐 회사나, 아니면 부모님이나, 아님 뭐 친구나, 귀찮잖아. 우리 애인이라고 안하고 이렇게 지내는 것도.”
“그건 그렇지.”
분명 우리는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감정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설명하자면 설명할 수 있으나, 그걸 믿어줄지도 의문이었으며 또한 그걸 매번 새로 설명하기도 귀찮은 문제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원이는 말을 이었다.
“조금 문제가 너한테 고백하는 여자가 줄어들 순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내가 여자 친구 포지션이니까. 그건 어떻게 할래?”
“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나야 뭐 상황이 상황이니까.”
정원이가 자조하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조를 이어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고백 받는 거 봤냐? 지금까지 없었는데 앞으로라고 있겠어?”
“하여간에. 장난치지 말고.”
정원이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자세를 조금 고쳐 바로 앉아 답했다.
“그 때 가서 생각한다, 라고 하면 이 자리가 필요 없겠지. 좋아, 내가 마음에 들면 그 여자랑 데이트도 해보고, 얘기도 나눠보고 할게. 물론 내가 마음에 든다는 전제가 깔려야겠지만. 아, 추가적으로 너한테도 미리 말할 거고.”
“뭐 하러?”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정원이는 내 말을 듣고 조금 고민을 하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나도 대충 그런 거로.”
“치사하게 생각은 나 혼자하게 하고 지는 따라하는 거 보소.”
“꼬우면 너도 그러시던가, 에붸붸.”
유치하게 혀를 내미는 모습을 보며 차마 저렇게까지 따라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선 좀 더 아량을 베풀도록 하자. 나는 눈만 조금 찡그리고는 다음 사항으로 넘어갔다.
“다음으로 필요시 신호에 대해서 좀 정할까 하는데.”
“아, 그전에 말인데.”
정원이가 말을 하는데 끼어들었다. 그전이라고 하는 걸 듣고 나는 정원이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너 먼저 말하라는 뜻이었다. 정원이는 기꺼이 내 의사를 받아들였다.
“너 연애하고 싶으면 하고 싶었던 거 뭐 없어?”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정원이도 부끄러운지 뺨을 조금 긁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연인 행세도 하는 거고, 어느 정도는 맞춰줄 수 있으니까…….”
정원이의 말도 조금씩 기어들어갔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거의 말을 뭉개는 수준이었다. 점점 빨개지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크흠.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니, 음. 뭐. 첫 번째로 너한테 좀 미안하고.”
“뭐가?”
“아까 대처니 뭐니 했는데, 솔직히 나 챙겨준다고 이렇게 하면 너 애인 만들기 더 힘든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응, 그래서.”
부족했다. 설명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정원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추가적인 설명을 침묵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원이는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 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솔직히 좀 치사한데.”
“어.”
“나 남자랑 사귈 수 있는지 좀 궁금해서.”
“허어.”
정원이가 고개를 조금 떨구려고 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보며 말했다.
“솔직히 점점 남자들이 좀 무서운데.”
“그거야 그런 일들만 겪었으니 이해할 법하다마는.”
“응. 그랬지.”
다시 정원이의 고개가 내려간다. 그리고는 말을 쥐어짜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너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음.”
“나랑 이거저거 해보고 남자랑 사귈 수 있는지 거부감은 얼마나 드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남자에게 느끼는 거부감도 좀 줄일 겸?”
“……응.”
눈을 감았다. 고민을 해본다. 내가 지금 정원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는 아직 정원이를 친구라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정원이와 지내며 그 생각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절대적인 전제는 결국 그것이었다.
연인이라. 친구보다 깊다면 깊을 수도 있지만, 안정감에 있어 훨씬 불안한 그런 관계였다. 나와 정원이가 감정이 깊어졌다가 모종의 이유로 큰 상처를 받게 된다면? 그래서 정원이와 헤어지게라도 된다면?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 가볍게라도 생각해도 되니까!”
“어떻게 그러냐…….”
정원이가 다급하게 말을 했지만 나는 그것을 흘려들으며 계속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이 고민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미루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원이가 남자와 있었던 일이라.
친구라고 생각했더니 돌림빵 당할 뻔하고, 위계로 찍어 눌러 사귀자고 치근거리고, 이러니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겠지.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이는 가만히 있기 힘들었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그냥 어제 피시방에서처럼이나, 아님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되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러다가 남자가 너무 무서워질 거 같고, 으…….”
정원이의 감정이 공감된다. 난처함이 전이된다. 이대로 정원이를 내버려두면 남성 혐오증이라도 생길까. 그건 나도 좀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너를 위해서 못 해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감정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인지했다. 그것을 두려워했으며, 그것을 어느 한편으론 내심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천히 눈을 뜬다.
“너 나 좋아하냐?”
“그런 건 아닌데.”
정원이가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네가 나에게 했던 질문. 나는 부정했다. 너 역시 부정했다. 좋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너를 돕자. 지금까지 했던 행동의 연장선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도와줄게.”
“어, 응.”
내가 순순히 답하자 정원이가 난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정원이가 내게 고백을 하고 내가 받아준 모양새였다. 앞으로 조금 더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결심을 굳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상한선상은 어디에요, 자기?”
“아! 하지 마! 닭살 돋아! 근데, 뭐? 상한선상?”
“어. 너 어디까지 하고 싶은데.”
정원이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아, 역시 정원이를 놀리는 건 재미있다. 반응이 좋으니 때리는 맛이 있다.
“끄, 끄런 걸 어떻게 말 하냐!”
“어우,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거야?”
“야, 야한 건 안 되니까!”
정원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도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들었더라도 모른 척 해주는 것 같았고. 고개를 숙였지만 정원이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고개를 낮춰 고개를 숙인 정원이의 눈을 맞추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우리 귀여운 자기는?”
“그, 그믄흐르.”
“어유, 무서워. 왜, 어제 못한 거라도 하자고?”
“끄아앙!”
결국 참지 못한 정원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옆으로 와서는 팔을 전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웃음을 참으며 정원이를 말렸다.
“너 나빠! 너 못됐어!”
“으하학! 미안, 미안하다고! 크흑!”
한참을 화를 내던 정원이가 진정되고 나서 제 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말은 이것이었다.
“자기 금지.”
“뭐?”
“자기라고 부르지 말라고. 진짜 닭살 돋아.”
“허어. 오케이.”
울먹거리는 얼굴을 음미하다가 선심을 썼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을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자 정원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아침에도 말했지만 나 우리 이런 관계가 좋아.”
“어.”
“그러니까 딱 서로 해보고 싶은 거 말하고…….”
정원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나를 바라본다. 방금까지 놀림을 당해 눈가엔 조금 물기가 있었지만 적어도 표정은 진지했다.
“서로가 용인될 수준에서만. 너무 과하지 않게.”
“너무 과하지 않게.”
“그래.”
정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과하지 않게. 즉 우리의 현재 관계를 깨지 않을 정도로만. 정말이지 치사하고,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그래서 정원이도 미안하다고 한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차 말했다.
“너무 과하지 않게.”
“……안 돼?”
정원이가 불안한 듯이 이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긴장을 했는지 몸이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니? 나도 좋아. 나도 아침에 그랬잖아.”
“그, 그렇지?”
“어. 니 말이 조금 의외긴 했지만, 뭐, 그래. 이것도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겠지. 좋아.”
내가 동의하자 정원이는 눈에 띄게 몸에 힘을 풀었다. 긴장을 푼 것이었다. 아닌 척하더니 큰 결심을 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저번에 옥상에서 느꼈던 불안, 그것을 진지하게 대면한 결과 나온 말이었겠지. 나는 누구와 사귈 수 있는가, 평생을 이렇게 혼자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정원이의 고민을 들어버린 입장에서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고민을 들은 것이 나 혼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더더욱.
삐끗했다간 끊어질지도 모른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 일수도 있다. 항상 후회를 하고 나면 늦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으니 이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야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내 사욕을 위해서. 나는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하여간에, 그럼 그렇다 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서…….”
그렇게 정원이와 이것저것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 행동강령을 정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할지, 저럴 땐 어떻게 할지. 소개는 어떻게 할지, 뭐 그런 것들이었다. 네가 필요할 때 나는 연인 행세를 기꺼이 하겠다. 내가 필요할 때 역시 네가 연인 행세를 하라. 모든 것은 이것의 연장선이었다. 말을 마친 후 우리는 서로 만족했다.
적어도 카페를 나올 때 우리는 모두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작품후기]정원이 귀엽죠. 저도 좋아합니다.
한 화를 쓸 때마다 점점 호흡이 길어져서 장면도 분량도 늘어나네요. 차라리 한 두 배 쓰면 반씩 나눌텐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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