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회
chapter3정원이는 이제 이 피시방에선 유명인사다. 일약 스타다. 같이 게임을 하다보면 시선이 쏠리는 것을 나조차도 눈치를 채곤 한다. 이것에 대해 언급했더니 정원이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당연히 알지. 너도 눈치 채는데 내가 모르겠냐?”
“안 불편해?”
“그래서 요즘엔 혼자선 안와. 저번에 혼자 왔더니 자꾸 말 걸더라고.”
“아니 씨발. 피시방에서 게임은 안하고 왜 게임하고 있는 여자한테 말을 쳐 걸고 지랄이야?”
"그러게 말이야. 아, 너랑 있을 땐 그런 거 없어서 편하다야.”
가볍게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것치고는 꽤나 아린 내용이었다. 모두 정원이가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언급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굳이 정원이 앞에서 말하진 않았으나 객관적으로 정원이는 굉장히 예쁘다. 조금 어려보이는 게 흠일 수 있으나, 그 점이 오히려 심리적 허들을 낮춰서 말 걸기 쉽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정하에겐 쉽게 말을 걸지 못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였다.
게다가 정원이는 게임을 할 때 다소 시끄럽다. 게임을 하다가 안 풀리면 쉽게 흥분하는 데에다가 흥분하면 욕설을 내뱉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런 흥분을 가라앉히는 역할이었고, 그래서 혼자 있으면 더욱 눈에 띌게 선했다. 인형같이 생긴 애가 쌍욕을 하면서 롤과 던파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 신기하게 볼 법도 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정원이는 나보다도 게임을 좋아하는 녀석이었고 피시방에 오는 것을 굉장히 즐겼으나 시선에 익숙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를 항상 거북해했다. 그래서 그나마 내가 있을 때만 피시방에 오는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피시방xx녀 랍시고 트위터에 올라와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걸리면 진심을 다해서 고소할거지만. 그렇게 정원이와 한참 레이드를 돌리다가 현 상황을 타개할만한 좋은 생각이 났다.
[나 : 야]
[다정원 : 왜]
[나 : 지금 연인행세 ㄱ?]
“뭔 소리여?”
정원이가 순간적으로 놀래며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화면을 가리켰다. 정원이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나 : 나 없을 때 개새끼들 얼쩡거리는 거 ㅈ같다 안 함?]
[다정원 : ㅇㅇ...]
[나 : 그러니까 지금 좀 티를 내면 괜찮지 않겠냐?]
“어, 음.”
정원이는 고민하는 티를 내더니 키보드를 빠르게 쳤다. 컨트롤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빠른 타자였다.
[다정원 : 구체적으로?]
[나 : ??]
[다정원 : 구체적으로 머할 거?]
“흠.”
이번엔 내가 고민할 차례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레이드가 끝나자마자 슬쩍 정원이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정원이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기껏 생각한 게 이거냐?”
실망스러운 반응이었다. 여유가 넘치는 그 모습에 나는 주위에 과시하듯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여기서 니가 애교라도 부릴래?”
“미쳤냐?”
“내가 하나 했으니 너도 하나 생각해봐.”
“겨우 이거 해놓고?”
“무려 이거 해놓고.”
정원이가 잠시 끙끙대며 고민하더니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이렇게 귓속말 속닥거리는 것도 연인행세 아니야?”
얼굴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나는 미소 지으며 정원이에게 다시 속삭였다.
“귓속말도 내가 먼저 했으니까 내 거네? 두 개째.”
“아니, 시팔!”
정원이가 순간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떨어져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주위를 조금 눈짓하더니 내 팔을 붙잡고 콧소리를 냈다. 하여간에 나보다 더 지는 것을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아잉, 오빠. 아무리 그래도 여기선 부끄러워.”
뭐 임마? 응, 나 이제 한 개. 아니 두 개 받고 세 개 수준 아님? 정원이와 눈빛을 나눴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애교를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물론 여자한테 애교를 들은 것 자체가 처음이었지만. 강하게 눈빛을 교환한다. 두 개 쳐준다. 짠돌이. 좆까. 너나 까, 병신아.
서로 싱글거리며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나눈다. 뭔가 지고 싶지 않다는 바보 같은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나는 자연스럽게 정원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정원이의 손등에 손을 겹쳐서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정원이가 끼고 있는 장비를 가리키며 버터를 한 스콥 녹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다정이 또 아이템 잘못 꼈네. 여기선 이거 끼는 거라니까?”
“아, 그릏그느. 우리 오빠 최고!”
정원이가 이를 깨물었다가 겨우 다시 앙탈을 부렸다. 정원이는 세팅 하나 지적받는 걸 싫어했다. 나는 그것을 건드린 것이었다. 정원이와 나누는 눈빛이 더욱 격렬해졌다. 템 건들면 뒤진다, 알못아. 응, 알못은 너 구요. 뭐? 뒤질래? 그리고 다정이? 다정하도 다정이다? 그럼 우리 정원이라고 불러줄까? 우웩.
“오빠 그런데 거기서 딜을 그딴 식으로 넣으면 어떻게 해애. 아참, 오빠도 다 알겠지?”
“물론이지. 우리 다정이도 아는데 오빠가 모를 리가 있겠니?”
“오빠, 오빠! 쟤가 정워니 아푸게 해!”
“저런, 어떤 나아쁜 놈이 그런 거야? 호 해줄까?”
“웅웅!”
한 번 붙은 불이 사그라질 기색도 없이 점점 크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처음에 어떤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정원이가 혀 짧은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면 나는 느끼하게 혀를 굴려 버터발린 목소리로 대응한다. 그 와중에 서로의 눈은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니가 먼저 포기하시지? 그렇게 한참을 서로 견제하며 흑백 돌을 한 수씩 두던 참에 뭔가 메세지가 날아왔다. 카운터에서였다.
[주위에서 불편하게 보시는 분들이 있어서 조금만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이고?” “얼씨구?”
그제야 주위 시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뜨뜻미지근한 시선이 우리에게 닿아있었다. 고개를 돌려 정원이를 바라본다. 마침 정원이도 나를 바라봤다.
튀자.
좋아.
우리는 빠르게 로그아웃을 하고 도망치듯이 피시방을 나왔다. 뛰지는 않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태연한 기색을 하며 행진하듯이 척척 걸어 나온 우리는 피시방에서 멀어지자마자 새빨개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폭소했다.
“아하하하, 이게 뭐야아!”
“큿, 푸흡, 으하하학! 야. 저기 다신 못 가겠다, 시발!”
“아니, 우리한 거 완전 쓸모없잖아! 아하하학!”
“으하하하!”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얼굴만 보고 웃었다. 웃음을 멈춘 건 한 순간이었다. 웃음이 멎자마자 우리는 서로 굳은 얼굴로 마주보며 선언했다.
“저긴 다신 가지 말자.”
“동감.”
정원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보아하니 점점 이성과 함께 부끄러움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곧 자신에게 닥친 억울함을 나에게 풀기로 했는지 내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윽.”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급발진 했죠?”
“어, 인정.”
“그리고 너 존나 역겨웠어.”
“너는 안 그런 줄 아냐?”
윽. 다시 한 방. 사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내가 먼저 꺼낸 말이었고 내가 먼저 이상한 경쟁심에 불탔으며, 결국 먼저 과하게 군것도 나였다. 정원이의 호승심에 불을 지핀 것은 덤이었다.
정원이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양 팔을 문질렀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는데 다행히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는지 어느새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굽혀 잔을 넘기는 것 같은 제스쳐를 취했다.
“고?”
“어디보자. 네 시 반? 조금 이르긴 한데, 그래 뭐 어차피 딴 거 할 것도 없으니 가자.”
“옹야. 너 좋아 죽는 거기로 갈까?”
“아, 좋아. 이동 시간도 생각해보면 괜찮네. 그럼 거기로.”
안 좋은 일이 있어 기분을 달래고 싶을 때도, 좋은 일이 있어 흥을 내고 싶을 때도 가는 이자카야는 정원이도 좋아했지만은 내가 굉장히 아끼는 곳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기서 다시 우리 동네로 이동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요즘 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웬만하면 정원이네 집 근처에서 놀려고 했었으니까. 옛날에야 근처에 살았으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문제였지만, 정원이가 정하네 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부턴 꽤나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옛날이었다면 어디로 가든 신경이나 썼겠냐만은.
“근데 오늘 솔직히 나 리미트 안 걸 건데?”
“아니 누가 뭐래냐? 나도 뒤질 때까지 마실 거야.”
“근데 너희 집 근처 아니라도 괜찮아?”
내 말을 들은 정원이는 무슨 대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서울 안에 택시가 늦게까지 안다니는 것도 아니고, 뭣하면 거기 근처에서 방 잡아도 되고, 어차피 너랑 같이 잘 것도 아닌데 니네 집 가도 되지 않나?”
“뭠마?”
정원이와 함께 술에 꼴아서 우리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라. 어머니와 누나의 반응을 생각하자니 술도 안 마셨는데 벌써부터 위가 쓰리다. 정원이 녀석도 정작 우리 집에 오면 꽤 부담스러워하는 주제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 놀랍다.
“너 술 꼴고 우리 엄마랑 누나를 보겠다고?”
“음, 술 취하면 어차피 뵈는 거 없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다음 날은?”
“내가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신념이 하나 있어 강휘야.”
정원이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해결해 줄 것이다.”
“에휴, 병신.”
한숨이 나왔다. 정말이지 옛날부터 이런 부분은 노답이었다. 뭔가 나 혼자만 걱정하는 것 같아 진심으로 술에 꼴고 나서 집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시간이 좀 늦으면, 세상모르고 뻗어있는 녀석을 혼자 보낼 생각은 없기도 했다. 이제 꽤나 험한 꼴을 봤다고 생각이 드는데도 왜 아직도 조심성이 모자란 걸까?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일단 니네 집으로 돌아가자 그럼. 나 차 끌고 왔어.”
“알고 있는데? 뭐 해? 안 가고.”
“엉? 어어.”
정원이는 어느새 내 한 발자국 앞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굉장히 자연스럽게 나온 반응에 왠지 쓴웃음이 났지만 그러려니 하고 만다. 내 앞을 걸어가는 네 모습도, 도착하고 나서 네가 익숙하게 내 옆 좌석에 앉는 것도 모두 나 역시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나는 어느새 다 외워버린 길을 주행하기 시작했다.
***
차는 주차장에 다시 대놓고 정원이와 이자카야를 향했다. 가는 동안 자꾸 아까 생각이 나서 웃음이 흘러 나왔다. 나는 정원이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야, 너 아까 콧소리 잘 내더라?”
“뭠마? 너는 시발 안 그런 줄 아냐? 아주 그냥 버터를 한 큰 술 비벼서 지껄여놓고?”
“웅웅? 오빠앙?”
“우리 다정아?”
그리고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실소를 하고야 만다. 아마 한참동안은 그 때만 생각나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병신 짓도 혼자 하면 흑역사가 되지만 같이 하면 썩 유쾌했던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었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는 공유하고 있는 부끄러운 기억을 치기로 계산하며 그것을 안주삼아 마실 술이 고팠다. 나는 분명히 정원이의 발걸음에 맞춰 걷고 있었는데 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것을 보니 정원이의 심정을 짐작할 만 했다. 어차피 그리 먼 곳도 아니었고 빨라진 걸음에 맞춰 이자카야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메뉴판을 펼쳐보는데 점원이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시네요?”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점원이 인사를 받으며 메뉴판에도 없는 메뉴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단골이 누릴 수 있는 호화인 셈이다.
“지금 멍게랑 해삼이 새로 들어와서요. 멍게는 특히나 제철인데 혹시 주문하시겠어요?”
“아, 그거 좋네요. 그거랑 꼬치 세트에 진로 한 병에 레몬 사와 하나 주세요.”
“멍게 해삼회랑 꼬치세트, 그리고 진로 한 병에 레몬 사와 하나 맞으시죠?”
그러자 정원이가 내 소매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더니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 멍게는 써서 못 먹는데.”
“내가 먹으면 되지. 어, 그래. 그럼 뭐 하나 더 시킬까?”
“응응.”
정원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빛낸다. 아무래도 이게 원래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때다 싶었는지 눈치 빠른 점원이 메뉴판을 가리키며 추천메뉴를 이어서 설명한다. 고개가 정원이 쪽으로 돌아간 것을 보니 누가 추가로 시키는지 그새 판별한 듯 했다.
“아시겠지만, 여성분들은 스키야키도 꽤 선호하시구요, 아니면 명란 파스타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는데. 뭐 먹을래?”
“고기!”
“그럼 스키야키 하나 주세요.”
“멍게 해삼회랑 꼬치세트, 스키야키에 그리고 진로 한 병에 레몬 사와 하나 맞으시죠?”
“일단은 네.”
“네, 알겠습니다!”
점원이 자리를 뜨자 정원이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 스키야키는 내 입엔 거슬리지 않긴 하나 조금 달았으니 아마 정원이에게는 오히려 잘 맞을 터였다. 정원이가 기분이 좋은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역시 고기가 있어야 돼. 밥도 안 먹었으니까 안주 많아도 되잖아.”
“그래,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
“흐흐흐.”
어차피 저번에 못 다한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이르게 온 만큼 시간은 길었고, 마침 내일도 쉬는 날이라 부담될 것도 없었다. 오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참을 떠들고 웃는 그런 즐거운 시간이었다. 정원이가 싱글벙글 웃는다. 나 역시 그런 정원이를 바라보며 입 꼬리를 살짝 올린다. 곧 술이 먼저 서빙되고, 우리는 기분 좋게 술잔을 마주쳤다.
“건배.” “건배!”
[작품후기]오늘은 연참입니다. 비축분? 난 그게 뭔지 모른다네.
추가로 신넘버 74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 이후 보실 분들에게도 논란의 여지를 주지 않게 넘버링을 조금 바꿔놔야겠네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