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회
2부 막간강휘가 정신을 차렸는지 선배씨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팔이 아프다. 나는 강휘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손수건을 들었다가, 까치발을 올렸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강휘의 가슴을 가볍게 툭툭 때리며 말했다.
“야, 나 팔 아파. 고개 좀 숙여봐.”
“어, 야.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왜?”
강휘는 나와 선배씨를 한 번씩 바라봤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야, 나는 이미 쪽팔렸거든? 너만 피하려고? 어림도 없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하아, 야. 나는 이미 각오했어. 쪽팔린 거 각오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왜. 너는 눈깔 뒤집어져서 지르고 봤는데 이제 정신 차리니 개 쪽팔리니? 강휘야, 나는 너보다 수십만 배는 먼저 정신 차렸어.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고개나 숙여.”
“뭐? 아니, 하아.”
강휘가 싫다는 듯이 튕긴다. 짜증이 났다. 이제 와서 혼자 발 빼려고? 나는 그런 강휘를 째려보면서 단호하게 명령했다.
“숙여.”
“예.”
그제야 고개를 숙인다. 아까도 그렇게 느꼈지만 조금 멍멍이 같을지도. 아니면 좀 모자란 동생 같기도 하구. 그런 생각을 하며 방금 튕겼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짜증을 담아서 얼굴을 벅벅 닦아줬다.
“어휴, 이 문디 새끼, 진짜. 내가 이걸 친구라고 에휴.”
“야, 야! 야! 아파! 아프다고!”
“뭘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이야. 남자가 돼가지고.”
“아니, 하아. 씹.”
강휘는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가불기였다. 나도 남자였으니까 알거든? 남자니까 참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강휘라면 이 말이 나온 순간 납득하고야 말 것이다. 역시나 강휘는 입을 닥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강휘를 흘겨봤다가 지금까지 우리의 멍청한 짓거리를 봐주던 고마운 선배님께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휘 좀 빌려도 괜찮을까요?”
“헛! 예. 편하실 대로!”
“따라와.”
잠시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비밀 없이, 거리낄 것 없이,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시간이 필요했다. 뭐, 그런 것 치곤 방금 저 선배 앞에서 할 말 못할 말, 잡을 분위기 잡으면 안되는 분위기 다 보여줬던 것 같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충분히 이동이 됐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돌리고 강휘를 손가락질하며 쏘아 붙였다.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니 선배, 그러니까 어, 재성선배?”
“어.”
“재성선배 말하는 거 다 들었지.”
“뭘?”
강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모양이었다. 그 한심한 반응에 짜증이 나서 강휘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 따가!”
“이 화상아! 니 선배도 너한테 나에 대해 뭐라고 하디. 어?”
생각보다 깔끔하게 들어갔는지 강휘가 등을 만지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아, 이 모지리 새끼. 나는 강휘의 등을 살살 만져주면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에이구, 이 웬수야. 니 선배가 나보고 니 여자친구라 안 카든?”
“아.”
강휘가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다.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얼마나 늦었냐면 저 선배 앞에서 나를 책임지느니 뭐니 프로포즈를 해버리고 만 것만큼이나 늦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가며 강휘를 째려봤다.
“그.래.서! 저 선배 앞에서 저를 책임진다고 까지 지껄인 한강휘씨는 대체 무슨 행동을 하실 작정이신가요?”
그러자 갑자기 강휘가 진지한 얼굴을 한다. 분위기가 일변한다. 뭔가 간질간질한 그런 분위기였다. 심지어 강휘가 꺼낸 목소리도 평소와 다른 톤이었다.
“응, 그래. 정원아.”
“뭐야, 진지 빤 얼굴로.”
“우리 사귀자.”
“어?”
어?
에?
헷?
뭐, 어?
잘못, 잘못 들었지? 내가 잘못 들었어! 책임, 책임지라고 말은 했지만! 나도 말, 말했지만! 강휘한테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하긴 했지만,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아니야, 갑자기가 문제가 아니라 나 아직 누구랑 사귈 생각 없는데! 강휘? 강! 강휘랑! 안 돼! 무리! 완전히 아웃!
“딸꾹.”
“아니, 야. 아, 내가 말이 너무 짧았다. 그, 사귀는 척을 하자.”
“딸꾹! 헷?”
나는 극도로 당황하면 딸꾹질이 나오는 모양이다. 저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강휘 역시 내 반응을 보고 같이 당황을 했는지 귓 볼이 붉었다. 사귀는 척, 사귀는 척이라. 그 말을 듣고 달아올랐던 얼굴이 팍 식어버리고야 만다.
“사실 정원이 니랑 사귄다고 대부분이 짐작할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시간을 두고 좀 니가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재성선배 반응을 보니까 너랑 나랑 사귄다고 이미 확정하고 있는 것 같고, 거기다가 내가 너한테 울면서 책임진다고 했을 때도 옥상에 재성선배 말고도 몇 명 있었고, 그리고 또, 어? 정원아?”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이번엔 조금 다른 의미로. 또 나 혼자 착각하게 만들고! 지는 발 빼고!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분노가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번엔 나도 내 감정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힘내라! 없애버려! 죽여!
“죽어.”
“뭐?”
“죽어! 죽어! 죽어!”
진심을 담은 주먹으로 강휘를 후려친다. 그러자 강휘가 처음엔 몇 번 막다가 내 팔을 잡는다. 잡히고 나자 자세가 묘했다. 그러자 다시 얼굴이 화끈해진다. 놓으라고 바둥거리다 결국 강휘를 뻥뻥 찼는데도 강휘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진짜! 나쁜! 놈이야! 어! 죽어! 그냥 죽어! 그냥 죽어어어!”
“아니, 아. 미안, 야, 진짜 미안. 내가 잘못했다. 어? 내가 죽일 놈이다. 어?”
“죽일 놈인 줄 알면 이 손 놓고 그냥 죽어!”
강휘는 계속 나를 진정시키려고 맞고만 있었다. 나도 그건 알고 있었지만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아니 진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그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정말 어떻게 할 지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서! 억울하다. 억울함이 하늘에 닿아 분하다. 분함을 풀 구석이 없다. 계속 막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나는 분노를 두 눈에 담아 스산하게 지껄였다.
“한 대만 더 맞아.”
“야, 나 아까도 뒤질 뻔 했어.”
“그래서, 여자애한테 구라로 프로포즈까지 해놓고 이 정도 부탁도 들어주지 않으시겠다?”
“하아니, 이럴 때만 여자애냐?”
“그럼?”
내가 끝까지 분노를 담아 말하자 결국 강휘가 한숨을 내쉬더니 얼굴을 들이댔다. 얼마든지 때리셔도 좋습니다. 두 눈을 꽉 감고 있는 얼굴을 보자 오히려 화가 풀린다. 에휴, 이 병신을 때려봐야 무슨 소용이겠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아, 이 빙시새끼 진짜.”
“때려. 왜.”
“됐다. 김 빠졌어.”
한숨이 나왔다. 맥이 빠진 기분이었다. 그래, 뭐, 너도 말의 순서가 틀린 거겠지. 분위기도 틀렸고, 목소리도 틀렸고, 하여간에 다 틀렸어. 내 잘못은 절대로 아닌데, 하여간에 에휴, 그래 용서하지 뭐. 마음 넓은 형님, 누난가? 하여간 다정원님이 용서한다. 에휴.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어, 연인 행세라고 해야 하나. 일단은 누가 물어보면 부정하지 않고, 그냥 어, 너희 부모님 앞에서 한 거처럼? 그렇게 하자고. 기한은 누군가 회사를 나가게 되거나 혹은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한숨이 나왔다. 강휘는 자기가 아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아까부터 제 딴에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말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려도 조금 줄어든 거겠지. 나는 뚱하게 말을 뱉었다.
“나한테 너무 손해 아니야?”
“왜?”
“나 솔직히 애인 못 사귈 거 같아. 적어도 한동안은. 솔직히 여자를 봐도 남자를 봐도 음, 잘 모르겠어.”
“여자도 그래?”
“모르겠어.”
누군가와 사귄다니 나에게는 너무 먼 문제였다. 내 주위에 친구도 강휘밖에 없었고, 그리고 사귄다고 한다면 누구와 사귀어야 할지, 나는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즐겨야 할지, 그리고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과연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평생 나는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자 강휘가 나를 보고 익살맞게 소리쳤다.
“야, 다정원. 나 모쏠이야 모쏠!”
“뭐?”
“니가 뭐 사귀니 못 사귀니 한다고 난들 사귀겠냐? 아서라. 나 1년만 있으면 마법사 전직이야.”
“뭐? 하. 하하. 하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강휘가 내 마음을 알아챈다. 내가 강휘의 의도를 알아챈다. 나 역시 그 의도에 맞장구친다.
“아저씨. 모르시나본데 댁은 이미 마법사고 1년 지나면 그냥 계란 한 판 아저씨에요.”
“뭠마? 야! 나는 아직 29살이야! 그리고 외국 나이로 치면 아직 27살이야! 이십대 후반이라고!”
“누가 뭐래? 1년 지나면 계란 한 판이시라고.”
“너는 뭐 씹 다르냐?”
다르지. 와아아아안전히 다르지. 이 아저씨가 미쳤나, 진짜.
“이 몸은 올해로 28살이시다. 내년에도 29살이야. 아직 20대 후반이지. 알겠냐? 아니지. 알겠어요, 오빠아?”
“아, 하지마라.”
“아잉, 오빠도 참 내년부턴 아저씨라고 부를 거에용.”
“흐즈믈르그.”
한참을 강휘를 보고 비웃었다. 편안하다. 이런 평소와 같은 분위기가, 대화가, 너와의 거리가 너무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점점 억울했던 게, 화가 났던 게, 서글펐던 게, 조금씩 녹아내린다. 천천히 봄이 내려앉는다.
“하여간에, 어차피 인포도 다 박살났겠다, 너 원하는 부서로 옮겨줄 거고. 연인행세도 하면서 너 최대한 실드칠거야. 니 좆같은 소문도 아버지 통해서 지우고 있는 중이고, 한동안은 내가 이사 아들이라는 소문이랑 쫓겨나간 사람들 소문이 돌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강휘가 생각한 것을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의도가 그런 거였구나. 그래, 조금만 더 조심해주지. 방법만 좀 더 생각해보지. 아니다, 다음부터 더 잘하자. 그런 마음을 담아 묻는다.
“그게 니가 생각한 거야?”
“어.”
“하여튼 간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온다. 네 멍청한 목소리가 좋아서, 네 어리숙한 표정이 좋아서, 너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즐거워서, 내게 천천히 찾아오고 있는 봄처럼, 따뜻한 미소가 새어나온다.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까.”
“뭐? 무슨 말이야?”
“됐어, 안 말해줄 거야. 돌아가.”
이런 마음을 네게 말해줄 수는 없으니까. 나도 조금은 부끄럽거든. 그래서
“야, 너.”
“왜?”
“너, 하아. 너 회사 그만두지 않을 거지?”
“으음. 글쎄?”
그걸 꼭 말해줘야 알겠냐? 방금 전까지 말한 건 다 잊은 모양이다. 한숨이 나오려는데 정작 강휘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도 장난기를 조금 더해서, 그렇지만 조금 부끄러우니까 몸을 빙글 돌려서 강휘를 바라보지 않으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1일 째야.”
“뭐?”
강휘가 못 알아들었는지 반문한다. 나는 다시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이 기분이다. 다시 한 번 만 더 말해주기로 한다.
“오늘부터 우리 1일째라고. 구라지만.”
“뭐, 하아.”
강휘는 한숨을 내쉬며 드디어 얼굴을 풀었다. 후련한 표정, 안심한 표정, 그리고 고마워하는 표정. 그런 강휘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자, 이제 같이 고개 숙이러 가자.”
“그래. 그러자.”
강휘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 역시 그 따뜻한 온기에 기대어 다음부터는 더 잘해보자고 다짐한다. 아마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강휘라면 뭐든지 잘 해낼 테니까. 이번에 넘어진 만큼 다음엔 더 잘할 거고, 여러 가지로 모자란 나보다는 뭐든지 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여러 가지 뒤처리를 했다. 인사과장님께 고개를 숙이고, 사장님께 새로운 부서를 발령받고(심지어 남자였던 시절에 만났던 무서운 직속 상사였다!) 인포팀 박살나는 거 구경하고, 강휘랑 축배를 들고, 정신없이 적응하며 일주일이 지났다.
홍보팀장님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꽤나 혹독하게 굴렸다. 의외로 나에 대한 평가는 좋았다. 아마 내가 그녀의 방식에 익숙해져서 가르치는 데로 곧잘 했기 때문이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다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편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아 그것에 대해 물었더니, 팀장님께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 원래 소문 같은 거 잘 안 믿는 타입이에요. 실제로 본 것만 믿는 귀찮은 타입이지.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정원씨는 충분히 잘 해요. 착하고. 그리고 귀엽고.”
눈물이 날 뻔했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홍보팀에선 적응을 꽤나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은 빡세지만.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주간이었다. 그래서 금요일엔 바로 뻗어버려서 푹 자고 말았다. 토요일엔 강휘를 만날 예정을 잡아놓고. 사실 화요일에 든 축배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긴 했지. 다음날 일도 나갔어야 했으니까.
잘 자고 있었던 와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잠이 살짝 깨서 부스스하게 핸드폰을 바라본다. 문자라니, 오래된 방식이구만. 그런 감상을 하며 문자를 열어봤다. 조금은 낯설게 된 이름이 남아있었다. 이예은, 이예은, 이예은이라. 누구였지? 아!
[이예은 : 정원 선배, 언제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과거의 인연이 저 멀리서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작품후기]2부 끝! 막간까지 끝! 이후 공지에서 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