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회
2부 막간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와 엮인 치부에 대한 공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두 팔로 몸을 끌어안는다. 강휘야, 제발 부탁이야. 그만, 그만. 꼭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필요는 없었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너라면 눈치 챌 수 있잖아. 너라면 알 수 있잖아. 지금 나 괴로워하는 거 다 보일 거잖아. 몇 번이고 눈 마주쳤었잖아. 아파, 추워, 괴로워, 그만, 그만 하란 말이야.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강휘에게 내 감정은 미처 닿지 않는다.
강휘가 주임에게 말을 쏟아낸다. 본심을 숨기고 있는 표정. 함정을 파고 있는 표정이다. 주임은 감정적으로 그 함정에 빠져든다. 내 시프트까지 관여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솔직히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건 주임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었다. 그 한 대상이 나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 강휘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곧 강휘의 함정이 실체를 드러낸다. 주임이 발언권을 잃게 하는 것, 그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강휘는 곧 주임과 내가 다퉜던 그 일까지 담담하게 풀어낸다.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또 다시 다른 이들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화법. 총무과장에게서 주임을 끊어내게 만든다. 그것이 목표라면 강휘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내 처지와 내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훌륭한 작전이었다.
“해당 사안은 민감한 사안이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으나, 꼭 보고되어야 할 사안이었다는 것만을 밝혀두겠습니다. 또한 총무과장님께서 보고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강지혁 선에서 권한을 넘어선 행위를 했다고 판단하겠습니다.”
강휘가 주임의 팔다리를 잘라낸다. 그곳에 내 팔과 다리도 있었다는 것을 강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부정할 기회가 없었다. 해당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이기도 하였으나 알려지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강휘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이 나를 상처 입히고 있었다. 분노하는 것조차 처량해질 만큼 잔인한 행위였다. 벌써부터 눈물을 참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낸다. 끝까지 강휘가 준비한 것을 들어보자. 그리고 판단하자.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음으로 강지혁은 회사 바깥의 공간에서 부조리를 저지른 혐의가 있었습니다. 부하 직원에 대한 사생활 침해를 개인 정보 열람을 통해 저질렀고, 그 정보를 통해 스토킹하였으며, 협박을 하여 사적인 만남을 강제하였습니다. 관련 자료입니다.”
삑
설마, 아닐 거야. 강휘와 정하가 그 자리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리고 그걸 이 자리에서 모두가 듣는 와중에 키겠다고? 강휘가 그럴 리가 없어.
[혹시 자리 불편하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물론 즐겁죠. 하. 하.]
[하하, 영 그렇게 보이지 않네요. 오늘 놀러 나온 거예요. 긴장 푸세요.]
[네에.]
숨이 막힌다. 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 굳이 이거까지 틀 필요 없었잖아. 강휘야, 강휘야. 어디까지 나를 떨어트릴 생각인거야.
[---씨가 괜찮다면 그런 거겠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자꾸 주임님이라고 부르시네요. 제 이름 불러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여기는 회사 밖이잖아요.]
[그, 죄송하지만.]
[나는 ---씨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저는 ---씨랑 더 친밀한 관계가 되고 싶어요. 안 되나요?]
[저는 주임님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저는! ……저에 대한 감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주임님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요.]
[제 감정에 조금이라도 좋은 감정이 있다면 그렇게 잘라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줘요.]
[아니요. 싫어요.]
[혹시 지금 남자친구 있어요?]
삑. 잠시 대화가 점프한다. 어느새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 자리로 돌아가 그 때의 감정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 때처럼, 혼자서, 남겨져서, 숨, 못, 쉬겠, 어.
“핫, 하아, 하아, 하아.”
[아직 사귀는 거 아니면 나한테도 기회 좀 줘.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잖아. 아, 혹시 그런 사이까진 안 갔어?]
[무, 무슨!]
[안 갔구나? ---씨,---씨. 내가 왠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그 애송이랑 잘 풀리고 있는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소문 신경 쓰고 있어?]
[그러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왜 이리 화를 내고 그래요. 캄다운, 캄다운.]
[아, 그 애송이랑 만나는 거 회사 사람들이 알면 앞길이 창창한 녀석한테 방해될까봐? 지고지순하네.]
[그런 거!]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다 말해버릴지도 모르겠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뭔가요.]
[아 별 건 아니고. 그 녀석 대신 나랑 사귀자. 그럼 원만하게 해결 아니야?]
[저는, 저, 저는.]
[아, 너무 그러지마.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아, 그래. ---씨도 ---씨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그래, 충분히 시간 줄게요.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정리하고 회의실에서 보고하도록 해요.]
마침내 재생이 끝난다.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수많은 시선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를 확정한다. 나를 걱정한다. 나를 연민한다. 나를 훑는다. 시선이 나를 훑는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강휘를 바라본다. 강휘는 분노하고 있었다. 왜? 뭐가 화나는 거야? 나 때문에 화내고 있는 거 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째서 화를 내고 있는 거야?
“아, 아. 가나다라마바사. 아이우에오.”
“죄송합니다. 원활한 진행이 되지 못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강휘는 다시 태연한 기색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내게 안도를 주는 것은 방금 전까지 내게로 집중되던 시선이 다시 강휘에게로 옮겨진 것이었다.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다.
“방금 재생된 자료는 인포팀 인원 한 명을 강지혁이 개인적으로 불러 고백을 하고 협박을 한 내용입니다. 또한 다음 페이지 자료를 보시면 강지혁의 ip로 인포팀 인원에 대한 개인 정보를 확인한 것이 발견됐습니다. 이를 통해 해당 직원의 집 근처까지 간 것은 이 후 조사를 통해 알아볼 예정입니다. 이러한 문제 역시 추후 보안팀과 협력하여 해결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인포팀에 대한 보고서 누락 등이 비일비재하게 있었습니다. 관련 자료 역시 다음 페이지부터 세 페이지 간 적혀있습니다.”
“나, 나는!”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강지혁은 직장 내 성희롱, 직권 남용, 개인 정보 열람 등으로 인해 회사 이미지를 실추하였고, 또한 이후 있을 사태의 선례로 삼기 위해 해고 조치를 하겠으며.”
“나는 하지 않았어!”
“추가적으로 회사 차원에서 변호사를 고용하여 해당 인원과의 협력을 통해 고소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이후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선 강력 조치하겠다는 회사의 의지를 보이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너!”
강휘가 마침내 주임의 목덜미를 뜯어냈다. 해냈다, 그런 보람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모르겠어. 강휘야. 왜? 그런데 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 순간 하나의 사실이 뇌리를 지나간다.
아
깨달았다. 깨닫고야 말았다. 알고 싶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때리면 누구라도 알 게 되겠지.
공개처형, 하는구나?
그래, 그렇구나. 강휘야. 너 그냥 공개처형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악당을 쓰러트리는 히어로가 된 기분을 느끼고 싶었구나? 네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내 적을 쓰러트릴 수 있다. 이런 걸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런데, 그런데, 이러면, 내가 처형되는 거잖아. 모가지가 잘리는 거, 팀장도, 총무도 아니고, 나잖아. 둘은 다른 방법으로도 처리 할 수 있었잖아, 강휘야.
“흡.”
울음을 참는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억지로 눈을 비벼 참는다. 울 수 없어. 이 자리에서 울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 돼. 감정을 다른 식으로 분출하자. 그래, 슬프기도 하지만 화도 나니까. 차라리 화를 내자. 분노하자. 이 부당한 처리 방식에 대해서 항의를 하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회사 내 여러 불미스러운 일은 있었으나, 확실하게 조치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인사과는 프로젝트 훌륭히 수행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이상. 오늘 점심시간은 2시간 줄 테니 이후에 각자 업무로 복귀하도록 합시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지나가면서 직원들이 내 쪽을 한 번씩 바라보고 간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치욕, 부끄러움, 설움. 모든 것을 참아내고 한 사람만을 기다린다. 강휘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설명해, 아니, 일단 사과해.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게. 부탁해.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게 해명해줘.
그러나 강휘는 걸음을 멈췄다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간다. 핸드폰이 울린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메세지. 그 짧은 메세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분노한다.
네게 있어 나는 뭐길래. 기르는 개도 배를 걷어차자마자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진 않아. 내가 네 명령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야해? 오늘 너는 승리했으니까? 강휘야, 너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나는 갈기갈기 찢어졌어. 이미 몇 번은 가라앉았어. 더 이상 떠오를 방법도 생각나지 않아.
그래, 너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성공했으니까. 어려운 일들을 어떻게든 해냈지. 이번에도 해냈어. 그래, 참 잘했구나.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줘야 할까? 아무 것도 못하는 다정원에게 훌륭한 구원을 내려줬구나. 와! 정말 잘했어! 강휘는 대단해. 나는 못났어. 강휘는 나를 지켜줘야 해.
때려치워 시발! 강휘에게 화가 난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기서 울고 자빠져있다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노를 기반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느새 눈물조차 쏙 들어간 상태였다. 인사과로 올라가자 인사과의 전원이 내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이고이 항상 품에 가지고 있던 사직서를 들고 인사과장님의 자리에 사직서를 내리쳤다.
“퇴사!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인사과를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총무과나 인포팀에 내지 않은 이유는 지금 상황이 소란스러웠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강휘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이 끓어 넘치는 분노가 강휘에게 닿기를. 아멘, 시발.
인사과를 힘차게 나오고 나서 점점 걸음이 느려진다. 힘이 빠진다. 이러려고 갖은 괴롭힘을 버티고 있었던 걸까? 뭔가 조금 틀린 기분이 든다. 점점 걸음이 느려진다. 생각이 깊어진다. 엘레베이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아래층 화살표가 아닌 위층 화살표를 누른다. 좀 더, 고민해보자. 후회하지 않도록.
회사를 바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왠지 그랬다간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시감이 든다. 저번에 홧김에 했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더라? 강휘랑 서로 얘기도 해보지 않고 얼굴 붉히고 싸워서 각자의 행동에 대해 오해하고, 하아, 그래.
“그랬었지.”
얼굴을 두 손으로 덮는다. 과거의 자신보단 조금이라도 나아지자. 그 때도 서로 오해했었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얘기라도 나눠보자. 이대로 말도 없이 회사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 가버리고, 강휘와 연락을 끊고, 그러면 편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후회할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러니까 일단 좀 진정하자. 나는 지금 일부러 나 자신을 고양시킨 상태였다. 울지 않기 위해서,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감정을 키워서 버티고 있었다. 감정을 내려놓는다. 천천히 덜어낸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덜어내다가 울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히. 강휘와 대화할 수 있도록. 화내면서 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감정을 조율해 나간다.
아, 그 날이 그래도 지나서 다행이다. 그래도 이번엔 저번과는 조금 다를지도. 그 땐 내가 좀 더 잘못했었으니까 내가 먼저 사과하러 갔었지만. 이번엔 강휘가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방금 전 그 시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것 같은 걸. 너무 방법이 잔인했어. 강휘야. 그렇게 감정을 가라앉히던 중에 멀리서 남자 둘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
“헉!”
강휘였다. 나는 한쪽으로 몸을 숨겼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숨어버린 것이었다. 귀만 기울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인사과에 있었던 한 명이 강휘를 혼내는 모양새였다.
[작품후기]하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음!
+ 끌어 -> 끓어 수정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