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73화 (73/138)

72회

2부 막간퇴근 시간이 되자 강휘가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 모른 척하기는 그만두기로 했구나. 물론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그 사실이 다시 각인된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네가 나를 위해 발을 내딛었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네 멋대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혼재한다.

“진짜 데려다 주는 구나.”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올랐다. 그러나 입만 달싹이다가 그냥 한숨으로 뭉개버렸다. 그래, 지금까지 나는 틀렸었고 네가 옳았으니까. 내가 뭐라고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이상하게 부정적인 생각들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강휘는 내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어, 그러고 보니 내가 뭘 하고 다니는 지 궁금하다고 했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되나.”

“됐어, 강휘 니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래서 나도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유치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난 그 때 나는 듣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 순간에 네가 나에게 둘러대는 그 모습에서 이해를 하면서도 납득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있었다. 강휘가 퇴근할 때 다 말해줄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땡깡을 부리는 내 자신이 있었다. 내가 딱 잘라서 말하자 강휘도 난처한 듯이 고개를 돌리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래? 뭐 싫어도 월요일 되면 알게 될 테니까.”

“음,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모든 걸 묻어두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지금 강휘 얼굴을 봤다간 저번의 재림이 될 것 같았으니까. 네가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을 내 멋대로 비난할 것 같았으니까, 오늘은 내가 나를 컨트롤하기 너무 힘든 날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말이 돼서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차라리 물어볼 걸. 물어보고 나서 태도를 정할걸. 왜 멋대로 자기혐오와 질투가 올라와서는. 내 자신이 비참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정원이라는 사람은 승승장구하던 강휘가 그렇게나 부러웠던 걸까. 모르겠다.

“으윽.”

“하암, 아침부터? 근데 이번엔 좀 심하네.”

“으, 미안.”

정하가 내 아랫배를 살살 만져준다. 몇 번이나 겪어보지도 않았지만 이번은 이상하게 고통이 심하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아서였을까. 생각해보니 매번 마법에 걸린 날은 항상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 것 같은데. 강휘에게 만나자고 전화하려다가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마침 강휘에게서도 주말 간 준비할 것이 많아 만나기가 힘들다는 메시지가 왔다. 강휘가 먼저 말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아파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도망칠 구석도 핑계 댈 구석도 많았다. 그렇게 정하에게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며 고개를 돌린다. 강휘가 어련히 잘 할 거야. 지금까지 잘 해왔는걸. 내 의견 따윈 중요하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을 되풀이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반복하면서 왜 이렇게 섭섭한 걸까. 왜 이리 서운한 걸까. 나도 나를 알기가 어려웠다.

월요일에 도착하니 오늘은 인사과에서 프로젝트에 대한 세미나가 있어 전 직원이 한데 모여 그것을 듣는다고 한다. 자리로 이동해서 세미나를 들었다. 전체적인 시스템이 개편되는구나. 나도 저런 거 하는 게 차라리 편했으려나. 그 정도 감상이 들었다. 이상한 것은 세미나가 끝나고도 뭔가 준비한 게 더 있다는 듯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곧 강휘가 무대에 올라선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번 프로젝트를 참여했었던 인사과의 한강휘라고 합니다. 오늘은 썩 좋지 않은 건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강휘가 힘차게 자기소개를 한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이 교체된다. 프레젠테이션의 제목만 봐서는 무슨 설명을 하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인사실무시스템 개편에 대한 추가 설명? 뭔가 더 필요한 게 있었던 걸까.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느낌을 받는다. 왜일까. 강휘의 태도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랜 프레젠테이션으로 지치셨을 텐데, 제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역시 긴 시간동안 진행해야하기에 여기서 잠시 30분간 휴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30분 후에 다시 이 자리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커지며 직원들이 자리를 옮긴다. 긴 시간 동안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기지개를 펴는 사람, 화장실을 가는 사람, 뭔가를 마시러 가는 사람, 그리고 강휘. 나는 강휘를 빤히 바라봤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게 네가 꾸미던 짓이야? 강휘는 내 얼굴을 보며 그냥 씨익 웃었다. 자신감이 가득 찬 미소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강휘를 모른 척 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쪽에선 최대한 강휘를 모른 척 하려는 심산이었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들 제자리에 착석했다. 그 동안 비서과와 인사과에서 이번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자료를 배부하고 있었다. 그 자료를 받자마자 바로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과 열어봐선 안 된다는 불안감이 혼재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받은 판도라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차마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애꿎은 종이의 모서리만 접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새된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그에 맞춰 불안도 조금씩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곧 강휘가 다시 무대로 올라와 휴식시간 종료를 통보한다.

“자, 그럼 여러분들께서도 모두 머리를 식히고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첫 주제는 인사과와 총무과의 관계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각 부서의 직무를 정리하는 중, 저는 인사과와 총무과가 많은 부분에서 직무가 겹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관련해선 상단에 제시된 자료 7페이지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설명을 시작한다.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미 자료를 뒤적거리던 사람들의 반응이 신경 쓰인다. 어느새 시선이 하나 둘 내 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중압감이 더해져가며 그에 맞춰 내 기분도 점점 더 깊은 심해로 침잠해가고 있었다.

손톱을 입가에 올렸다가 화들짝 놀라서 내려놓았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버릇이었지만 정하에게 몇 번이나 손을 맞으며 고쳐지고 있는 버릇이었다. 점점 과민해져가는 와중에 이상할 정도로 강휘의 목소리만이 하나하나 귓가에 꽂히고 있었다. 마치 심장에 말뚝을 박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직무는 이런 식으로 변동사항이 있을 예정입니다. 다음으로 말할 주제는 인포팀 팀장 안이슬씨에 대한 고발입니다.”

“아.”

갈 곳 잃은 탄식이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손가락을 다시 입가에 댄다. 매니큐어 냄새를 맡고 천천히 다시 내린다. 나도 모르게 팀장에게 시선이 간다. 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강휘와 팀장이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나 역시 입을 달싹거렸지만 나설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미도 논리도 잃고, 감정만이 들끓고 있었다. 배신감? 자괴감? 슬픔? 분노? 증오? 모르겠어. 의미 따윈 없어. 그냥 답답해.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 손을 모아 입과 코를 가린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숨을 내뱉는다, 쉰다. 내뱉는다, 쉰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만. 네가 나에게 알려준 방법으로.

“……특정 직원이 자주 자신의 시프트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인포팀 팀장이 팀원을 관리하는 것에 소홀했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자료로 넘어간다면 안이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음 자료 보시죠.”

자료, 넘겨야 해. 확인해야 해. 달뜬 숨을 내쉬었다가, 뱉는 것에 집중하며 한 손으로 빠르게 자료를 넘긴다. 그곳에는 내 이름은 가려져있으나 익명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시프트에 들어가 있는 자료와 저번에 반려된 생리 휴가 신청서가 있었다. 내 이름은 빠져있었지만 흐름상 이것에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 것이었다.

내게로 향하던 시선의 정체를 알게 되자 숨이 다시 가빠지는 것 같았다.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호기심도, 동정하는 눈으로도 보지 마, 아니란 말이야, 지금까지처럼 차라리 무시하고 모른 척 해. 제발, 제발!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저, 저기. 괜찮습니까?”

옆 자리에 앉았던 사내가 내 호흡이 가빠지자 내 쪽을 바라보며 묻는다. 나는 두 손을 다시 모아 숨을 내쉬고, 들이키다가 사내가 손을 드려는 모습을 보고 사내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내뱉었다.

“하아, 괜찮아요.”

“병원에 가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내가 사내를 노려보며 강하게 말하자 사내의 갈 곳 잃은 손이 내려갔다. 언뜻 보기에도 난처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내도 호의를 가지고 말한 것이었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겨우 내뱉는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어, 예.”

사내가 난처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착한 사람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조금 숨이 진정됐다. 나에게서 멀어지면서 안 좋은 감정과도 조금 유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내를 다시 톡톡 건드리고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나는 억지로 웃고는 다시 자료를 넘겼다. 다음 자료는 내부 고발자의 녹음? 내부 고발자? 저번 주, 아. 그 때. 김가은 선배가 점심시간에 대타를 뛰어줬을 때구나. 그 때 그 태도가 그런 거였어?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종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종이가 구겨지고 있었다.

[지금 내부에서 ---씨에 대해 따돌림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말이에요. -삐이- 중요한 건 이 모든 걸 팀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묵과하시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불을 더 지피셨죠. 그래서 신난 팀원들도 점점 더 심하게 ---씨를 괴롭혔어요. 처음엔 주의를 주는 수준에서 나중엔 같이 서줘야 되는데 파트너 없이 세운다던가. 아마 ---씨 화장실도 잘 못가셨을 거예요. 그럴 때마다 -삐이- 아무튼 회식자리에도 일부러 부르지 않았고, 물론 와봤어야 조리돌림밖에 더 당했을까 싶지만요. 아무튼 저희팀에서 ---씨를 괴롭히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죄송? 누구에게 죄송하단 말인가. 그 대담을 듣고 있던 강휘에게? 나한텐 아무 말도 없었잖아? 배신감이 피부를 타고 올라온다. 아직 더 실망할 게 남아있었어. 사람을 경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경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멍청했다. 내가 안일했다. 저 사람은 나를 팔아 살려고 했구나. 왜, 당신은 대놓고 나를 괴롭히진 않았다고? 방치했잖아. 모른 척 했잖아. 내 직속 선임인 주제에 내가 도와달라고 할 때마다 나를 무시했잖아. 내게서 등을 돌렸잖아. 팔이 간지럽다. 양 팔을 안아서 손톱으로 긁는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우욱.”

입을 틀어막고 잠시 고개를 떨어트린다. 속이 메스껍다. 점심시간 전이라 속이 비어져있어서 다행이었다. 신물을 겨우 다시 삼킨다. 숨을 고른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할 수 있어, 큰 일 아니야, 아니야, 큰일이야.

“후우, 후우, 흡, 후우.”

그 와중에 강휘의 고발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팀장의 비리, 가장 큰 것은 횡령. 횡령이라면 굳이 나 엮지 않아도 됐잖아. 꼭 이렇게 해야 했어? 조용히 둘이서 해결했어도 될 일이잖아. 내 이름 필요 없었잖아. 적어도 날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나한테 한 마디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귓등으로라도 알려주는 게 어렵진 않았잖아. 알려줄 수 있었잖아……. 강휘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더해가고 있었다. 추락하고 있는 나와는 반비례하여.

“이에 대해 사장님과 논의 결과 인포팀 팀장 안이슬은 회사에 실질적인 불이익을 초래하였으며, 직장 내 따돌림을 주도하여 회사 내 부정적 이미지를 생성하였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따라서 인포팀 팀장 안이슬은 해고, 기타 따돌림에 가담한 인포팀 인원들은 감봉 및 추후 인사상의 불이익이 있을 것이며 이 시간부로 인포팀은 해체하겠습니다. 각자는 능력에 따른 인사이동을 하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 인포팀은 외부업체를 통해서 운영하겠습니다. 다음 관련 자료를 보시면 외부업체를 이용할 때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이득에 대해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강휘가 말을 멈춘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지금까지 나왔던 고발도 작은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남극에 온 기분이었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피도, 심장도, 감정도, 이성도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춥다. 손을 팔에 비비며 온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차가운 선언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자리에서 총무과 주임 강지혁, 이하 강지혁을 고발하겠습니다.”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와 엮인 치부에 대한 공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작품후기]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 무러 -> 뭘 수정 완료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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