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2부 막간화장실에 도착해서 확인하니 역시나 예상한 사태가 펼쳐져 있었다. 윽,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다. 원래부터 그로테스크한 것엔 약했다. 사실 그로테스크까지 가지 않아도 피 보는 것은 무서웠다. 주사바늘조차 무서워했을 정도였으니 쉽게 익숙해질리가 없었다. 가볍게 현기증이 날 것 같아 빠르게 처리하고 주차장으로 갔다.
강휘의 얼굴을 보자 잊고 있었던 짜증과 의문들이 다시 샘솟았다. 바로 따지듯이 강휘를 쪼아댔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회사에서 모른 척 하기로 했잖아! 근데 은근히 말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데스크로 와서 말 걸고 친한 척 하면 어떡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봤는데, 아니 대체 뒤는 어떻게 할라 그래! 그리고, 가은 선배는 또 왜 갑자기 너한테,”
“워워.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강휘가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두 손을 내민다. 왠지 어린애를 다루는 것 같은 태도에 나도 모르게 볼이 부풀었다가 다시 화들짝 숨을 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볼 부풀리기는 에바지. 강휘가 애를 다루듯이 대해서 정말 애가 됐나? 이것도 다 강휘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강휘가 괘씸했다.
“니가 산댔지?”
“오냐.”
“그럼 완전 비싼 초밥.”
“오냐.”
“어? 진짜?”
강휘가 괘씸해서 엿이나 먹으라고 찔러본 건데 강휘가 너무 순순히 수긍해서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어 정말로 비싼 초밥집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 태도에 내가 놀라서 어버버거리며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너, 뭔, 허어.”
어안이 벙벙하여 여러 방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강휘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아 맞다. 너 삐졌냐?”
“뭐? 아니거든? 안 삐졌거든?”
“근데 왜 고개는 돌리고 그러냐?”
“안 삐졌다고! 아나, 아니 니가 이상한 짓 해놓고 대답도 안 해주고, 그러면서 자꾸 놀리고, 어?”
“야야, 차 움직인다, 정신 사납다.”
“아오, 이걸 진짜!”
지금은 운전을 하고 있으니 건드릴 수 없지만 내리면 꼭 죽이자. 그런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강휘에게 경고를 했다.
“내리고 나면 두고 보자.”
“내리면 먹기 바쁠걸? 카드 내가 쥐고 있다?”
“하, 이 새끼, 하아아.”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인정하기로 했다. 오늘은 강휘를 이길 수 없다. 회사에서 볼 때부터 상호무시조약을 깨고 아는 척해서 복장을 뒤집어 놓더니,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지 않나, 비싼 초밥 집을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가질 않나, 삐졌냐고 정신을 쏙 빼놓지 않나, 마지막 피날레로 카드를 들이대? 그래. 네가 이겼다. 네가. 잘났다, 잘났어. 뭐 좋게 좋게 생각하자. 맛있는 거 내 돈 안내고 먹는 거고. 설마 이거보다 더 얼이 빠지겠어?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밥 집에 도착하고 나서 0의 개수를 세본 결과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강휘가 메뉴판을 뺏어가서 한숨을 내쉰다.
“아니 긴장하지 말라고 좀.”
“그치만.”
0이 몇 갠데 긴장을 안 해. 나도 이렇게까지 비싼 줄은 몰랐단 말이야. 월급 생각해보면 어, 이거 한 끼 먹으면……. 아무튼 손 떨리는 걸 어떡해.
“그치만이고 자시고 내가 돈 내지 니가 돈 내냐?”
“그치만.”
“그치만 한 번만 더하면 니 카드로 긁는다.”
“킹치만.”
“후.”
“으악! 미안해! 안할게! 안할 테니까! 지갑 뺏어가지마! 항복! 항복!”
킹치만이라고 했는걸! 그치만이라고 안 했는걸! 그러니까 제발 제 카드 내려놔주세요. 부탁이에요.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강휘님 제발. 강휘는 내 카드를 제 주머니에 넣고는 가방을 돌려줬다. 설마, 아닐 거야. 우리 강휘가 그런 못된 짓 할리가 없어. 그치? 내 말 맞지?
“농담이지? 진짜로 긁을 거 아니지?”
“너 하는 거 봐서.”
그 말을 듣자마자 아까 봤던 0들이 머릿속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맛있게 쳐 먹어라 제발 좀. 처음부터 말했잖아.”
“네엥.”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 수긍, 긍정. 알았어 강휘야. 맛있게 먹을게. 알겠습니다. 다정원! 맛있게 먹겠습니다!
초밥이 나오기 시작하자 강휘는 평소처럼 내게 먹는 법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익숙한 풍경이다. 그게 왠지 편안해서, 그리고 웃음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실소를 하고 말았다.
“풉,”
그러자 강휘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곰곰이 내 카드의 행방을 생각해보니 강휘가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있는 그대로 팩트를 전달하자.
“넌 뭐 먹을 때만 되면 엄마가 되더라. 여기서도 그러니까 그게 웃겨서.”
“아니 맛있는 거 먹는데 제대로 먹으면 좋잖아.”
“누가 그게 나쁘데? 그냥 뭐 좋다고.”
“뭐?”
강휘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음, 그래. 내가 얼마나 지금 행복한지, 얼마나 네 행동을 포근하게 느끼는지를 전달하자. 사실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는 것도 오랜만이고, 그게 정말로 기분 좋기도 하니까.
“니가 나 챙겨주는 게 확 느껴져서 좋다고. 요새 하도 들들 볶이기만 해서 그런가. 생각해보니 옛날에도 좀 맛있는 거 먹겠다 싶을 땐 원래 잔소리 좀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 때 생각도 나고 좋아서.”
“그러냐.”
“그럼”
그제야 강휘도 고개를 돌리고 초밥을 먹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오해를 사진 않은 것 같았다. 말하고 보니 이렇게 편안하게 밥을 먹은 게 언제였나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방심했다가 코끝이 찡하게 아파왔다. 아, 이거 문어초밥, 와사비가 좀 많았구나. 나 근데 원래도 와사비에 약했나?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코를 감싸고 눈을 세게 감고 있었더니 강휘가 넌지시 와사비를 좀 줄여달라고 부탁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세심한 배려에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음이 나오고 만다. 너의 그런 점이 정말로,
“그런 점이 엄마 같다고.”
“……칭찬이지?”
“방금 좋다고 안 하드나?”
“왜 갑자기 사투리야?”
“엄마 옆에 있음 원래 사투리 나와. 맞제. 엄마야?”
“아이고야, 다 큰 딸이 생긴네.”
강휘가 나를 따라 어색하게 사투리를 쓰자 경상도의 혼이 울부짖어서 억양이나 그런 걸 조금씩 손봐줬다. 그렇게 투닥거렸더니 어깨의 힘이 더 풀리는 기분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친구와 편안하게 발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행복이 천천히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원래 최악인 날이 될 뻔했는데, 네가 오늘도 마법같이 행복한 날로 바꿔주는 구나.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밥을 다 먹고 나오자 행복이 배 안에 가득 차있었다. 그래서 각오가 섰다. 강휘가 나에게 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응, 지금이 최고의 시기인 것 같아. 이렇게나 행복하니까. 조금 힘들더라도 분명 괜찮을 거야. 내가 불러 세우자 강휘가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왜?”
“잠깐만 얘기 좀 해.”
“뭔 얘기.”
내가 갑자기 진지하게 묻자 강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휘야. 나도 어리둥절했어. 네 행동이 이해가 안 되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네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거. 그건 확실한 것 같아. 그러니까 말해줘.
“너 지금 뭐 꾸미고 있지?”
“얘기가 좀 길어질 거라서 이따 저녁에 할래? 오늘부터 집에 태워다 줄게.”
“그래?”
강휘는 딱히 숨기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로 말이 길어질 것 같으니 이후에 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일단은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그럼 일단 한 가지만 답해줘.”
“어.”
“너 지금 꾸미는 거 설마 나 때문이야?”
그러자 강휘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자기는 표정을 잘 관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너랑 지낸지 이미 10년도 더 됐는걸. 네가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너를 아는걸. 그래, 나 때문이구나.
“뭔 소릴 하나 했더니. 이번에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마쳤겠다. 아버지 자리 물려받을 준비 하는 거야.”
“정말 나 때문 아닌 거 맞아?”
“야,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그 정도면 병이야, 병. 다 나를 위해 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강휘의 태도를 보면서 확신한다. 강휘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이유는 나 때문이다. 그걸 알고 나자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강휘가 엄마, 아빠 앞에서 무리하다가 헛짓거리를 하고 만 그 때가 생각이 났다.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그 때도, 지금도 강휘가 무리할 것 같아서였을까? 그리고 너를 위해서라면 더욱더 나와 멀어져야지. 너를 위해서라고 변명할거면 차라리 나랑 약속해줘.
“그래, 알았어. 그럼 하나만 약속해.”
“뭐?”
“이제 회사에서 나 아는 척 하지 마.”
“왜?”
“너 앞으로 해야 할 일 생각하면 나 모른 척 하는 게 맞아. 너도 알다시피 나한테 그, 이상한 소문 많이 붙었잖아. 내가 어떻게든 말해 볼 테니까 앞으로 그냥 모른 척 해.”
강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나는 그 기세에 살짝 눌리고 만다. 강휘는 화를 참고 있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묻는다.
“그럼 그 총무과 새끼는 어쩔 거고?”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뭘?”
강휘가 고개를 들이민다. 강휘와 거리가 가까워진다. 얼굴을 마주한 거의 제로거리. 강휘를 바라본다. 강휘의 눈에는 강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강휘의 눈을 피한다.
어차피 회사 나갈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하는 거 맞잖아. 그러면서도 차마 그 말을 입에 올리진 못했다. 강휘의 눈이 너무 진지해서. 그 얼굴에 대고 나 회사 나갈 거니까 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강휘는 다시 거리를 벌리고 다시 가벼운 어조로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리고 니가 말해봐야 누가 들어준다고. 말마따나 너 회사에서 같이 말할 사람도 없잖아.”
“……그렇지.”
“아니, 그렇게 비 맞은 멍멍이 같은 얼굴 하지 말고. 너 놀리려고 한 말 아니니까.”
회사 얘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감싸는 형태가 된다. 그렇게 내가 왼팔로 오른팔을 감싸고 있자 강휘는 바로 말을 이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고, 너 알잖아. 나 다른 친구들도 힘들 때 가만히 못 두는 거. 니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너 하나 돕는다고 내가 아버지 자리 물려받는데 걸림돌이 되겠냐.”
그리고는 강휘는 내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저절로 짜증이 난다. 아마 그렇게 내 생각도 헝클어버릴 작정이었으리라. 의도를 파악하자 왠지 모르게 강휘의 행동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강휘의 손을 쳐냈다.
“하지 마! 머리 망가져!”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이 형님은 다 계획이 있다.”
“……정말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씁! 끈질기네, 진짜!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 때문에 아니야. 나르시스트 말기 환자야. 됐냐? 이제?”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 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모두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니까. 네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결국 회사에서 나를 모른 체 하겠다고 약속해주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계속 내 말을 부정하고 있으니까.
거짓말, 안 했었잖아.
“그래, 알았어.”
나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한 채. 그냥 관성적으로, 그저 그렇게.
[작품후기]62화까지 내용입니다. 연참을 한 이유는 자꾸 막간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내일이면 무조건 끝이 나니까요. 애시당초 막간을 쓴 이유 두 가지 중에 하나도 다음 장면을 쓰고 싶어서였고. 그래서 그 장면전까지 내용을 다 적었습니다.
Hilde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슬럼프도 이겨 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자구 -> 자꾸 수정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