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회
2부 막간이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정신을 잃고 싶어졌다. 28살 먹고 주점에서 대성통곡?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죽을래.
“아니, 야! 뭐하는데?”
“아 제발. 히끅. 남 보기 쪽팔리잖아! 히끅!”
“이건 괜찮고?”
“나는 흐끅 안 볼란다.”
“아오, 시발.”
내가 강휘 품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며 혼자 시선을 피하자 강휘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 와중에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 숨을 참았다가 다시 뱉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강휘가 이내 점원을 불러 뒤처리를 한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강휘에게 그대로 속삭였다.
“좋아, 난 준비됐어. 히끅. 준비 됐어? 히끅.”
“너나 잘하세요. 에휴 시발.”
강휘가 슬금슬금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자 나는 전력으로 내뺐다. 사람들의 시선을 강휘가 알아서 잘 막아준다. 미안해 강휘야. 그치만 너무 쪽팔리는 걸 어떡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달리다가 주점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고 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하아, 하아. 후우. 흐끅! 아, 쪽팔려!”
“하아. 쪽팔린 줄은 아냐?”
강휘가 빈정거리며 내게 물었다.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여력이 모자랐다. 나는 달뜬 숨만 겨우 내쉬다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강휘를 때려주려고 강휘의 손을 내치고 팔을 들었다. 그 순간 균형이 무너졌다.
“흐억!”
“야!”
강휘가 순간 나를 잡고, 균형이 무너져서 나는 강휘에게 폭 안겨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 술집에서도 사람들 눈을 피한다고 안겼었지만 지금은 뭔가가 달랐다. 뭔가 따뜻하고, 뭔가 포근하고, 뭔가 부끄럽고, 뭔가 강휘가 듬직하고, 으악, 아니야! 방금 전에 느낀 생소한 감정을 내치려고 고개를 흔드는데 강휘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위험하잖아.”
“앗, 네.”
반쯤은 쫄아서, 반쯤은 어,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내가 모르는 표정. 내가 모르는 목소리. 기분이 이상하다. 정신 나갈 거 같아. 긴장이 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존댓말이 당황하게 만든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강휘도 방금까지 짓던 진지한 표정이 아닌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고민하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내가 아는 표정이다. 강휘가 당황할 때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익숙한 표정을 보니 왠지 안심이 돼서 긴장의 끈이 풀리고야 만다. 아, 딸꾹질 멈췄다.
“아, 딸꾹질 멈췄다.”
긴장의 끈이 풀리자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야 만다. 아, 옷 더러워지겠다. 그러자 강휘가 내 허리를 잡고 받쳐준다. 눈치 빠른 녀석이었다. 강휘를 짚고 버텨보려는데 도저히 무리. 다리에 힘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강휘에게 약한 소리를 냈다.
“어, 강휘야 미안한데.”
“어.”
“나 다리 힘 풀려서 더 이상은 못 걷겠다야.”
“뭠마?”
강휘가 짜증을 내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 생각해보니 나 오늘 그 날이라고도 말했잖아.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감정이 들쭉날쭉 끝내주는 신축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아니 힘이 안 드는 걸 나보고 어쩌라구.”
“아니, 뭐라는 거 아니야. 못 걷겠냐? 업어줄까?”
그러자 강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여간에 눈치 빠른 녀석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짜증내려고 하니까 바로 알아채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 정말이지 대단한 녀석이다. 하지만 업히는 건, 조금, 그, 곤란하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말을 가까스로 이어간다.
“나, 아까도 말했지만 그 날이라서……. 그, 업히기는, 좀,”
“아, 미안.”
그러자 강휘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몇 번 긁더니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어, 일단은 택시 부를 테니까, 그 때까지도 못 걷겠으면 그, 뭐시냐, 안길래?”
“뭐?”
어안이 벙벙했다. 안긴다는 건, 어, 그러니까, 뭐시냐. 공주님 안기? 그거 맞지? 아니, 네 판단이 틀린 건 아닌데. 그래 업을 순 없고, 그렇다고 짐짝처럼 들쳐 매는 것도 무리니까 네 판단이 무조건 옳은 건 맞는데. 모양새가, 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렇게 당황을 하다가 문득 강휘의 귓불이 새빨개 진 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부끄러운 만큼 너도 부끄러웠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 것조차 조금 미안해진다. 강휘 역시 부끄러웠을 텐데. 나처럼. 그래도 무덤덤하게 공주님 안기를 해달라고 할 수는 없어 가까스로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택시가 오자 강휘가 나를 조심스럽게 안고 택시에 태운다. 그대로 보낼 줄 알았더니 자기도 타서 우리 집을 목적지로 삼는다. 강휘의 세심한 배려가, 걱정이 느껴진다. 포근하다. 따뜻하다. 강휘가 마치 기대도 좋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오늘은 너무 지쳐서 그 호의에 몸을 누이고 조금은 쉬고 싶다.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는걸.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잠이 들고 말았다.
***
금요일이 되자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물론 주임의 고백은 이미 거절한 상태였다. 강휘에게 안 좋은 소문이 퍼질 거라고 말도 했다. 강휘의 생각은 알 수 없으나 그걸로 나를 만나주지 않거나 절교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안절부절못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나는 인포팀에 내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고 말도 했고, 주임이 내 소문을 이용해서 강휘를 먹칠하려고도 했으니 ‘강휘에게 머리를 숙이고 회사를 나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강휘 때문이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주임은 끈질기게 오늘도 내게 추근대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나? 어제 그렇게 대놓고 쌍욕을 박아대면서 쪽을 줬는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굴다니. 아, 안 그래도 아랫배에서 자기주장이 가장 심한 날인데다가 그 고통덕분에 감정이 감각과 감성을 잡아먹어서 가만히 참아주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교대할 사람이라도 있다는 점이었다.
“어제 일은 다 용서해준다니까요? 정말로 한강휘씨랑 사이 들켜도 되겠어요?”
오늘도 그냥 쌍욕박고 소리 지를까. 어차피 나갈 거. 아 맞다. 강휘한텐 회사 나간다고 말 안했었구나. 만나면 말해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됩니다. 맘대로 하세요.”
강휘였다. 강휘는 내게 손 인사를 하며 웃었다. 이 미친 새끼! 회사에서 아는 척 안하기로 해놓고! 저번에도 이 지랄하다가 지네 과장한테 까였다고 해놓고 정신을 못 차려! 안 그래도 나가기 전에 강휘와는 최대한 접점을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강휘는 내 생각과는 달리 주임을 무시하고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야, 다정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야, 너 미쳤어?”
“아니 뭘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는데 미쳤니 뭐니 그러냐. 아 왜. 바꿔줄 사람 없냐? 그럼 마음 넓은 ㅎ, 아니 오빠가 기다려준다.”
“아니, 너, 하.”
헛웃음이 나왔다가 이내 한숨을 몰고 온다. 강휘는 나를 평소처럼 대하고 있었다. 다른 공간도 아니고 회사에서. 나랑 엮여봐야 좋을 거 없는 거 알면서. 심지어 나랑 자기를 엮어대는 걸로 날 협박하는 주임 앞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나 주임은 강휘를 향해 바로 빈정거렸다.
“역시 사귀고 있었군요? 하, 이것 참. 신입 둘이서 사내 연애한다고 소문이 퍼지겠네요.”
“지, 아. 방금 제가 말했던 것 같은데, 다시 말씀 드립니까? 예, 됩니다. 맘대로 하세요.”
강휘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이 순간 마음을 졸이는 건 나뿐이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눈빛으로 강휘에게 욕을 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강휘가 무슨 생각으로 태도를 바꿨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주임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지껄였다.
“절 고르지 않은 걸 정말로 후회하시게 될 거에요, 다정원씨. 오늘 일은 모두가 알게 될 거에요.”
“읏!”
채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회사에서 아는 척하지 말랬잖아. 강휘에게 괜히 짜증이 났다. 적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 지라도 말해줬으면 좋겠다. 답답했다. 강휘는 슬쩍 내 앞을 가리더니 주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뭡니까?”
“뭐긴 뭡니까. 소개지. 저번부터 이름도 말 안 해주시길래 명함이라도 교환하면 될까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명함 받을 수 있습니까?”
“하!”
그러자 주임은 고개를 돌리고 사라졌다. 얼핏 보기엔 이 자리를 피해 도망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겐 다르게 보였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우리 둘을 엮으려는 더러운 소문을 뿌리리라고 이를 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불안했다.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그러자 강휘가 태연하게 데스크에 팔을 올리고는 묻는다.
“뭘 그리 두리번거려? 뭐 잘못한 거 있냐?”
“너! 으.”
소리를 지르려다가 참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지 않는가를 체크한다. 그리고는 조심히 강휘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미쳤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뭘 들켜. 됐어. 너도 슬슬 힘들었잖아.”
힘든 이유가 뭔데! 내가 지금까지 힘들어도 참은 이유는 혹시라도 내가 강휘의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강휘는 갑자기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도 갑자기 공든 탑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그치만, 너는 괜찮아?”
“에휴, 세 번째로 말하는데. 예, 괜찮습니다. 말하고 다니셔도 됩니다.”
“아니, 하아. 됐다. 걱정하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야.”
“그래, 너 바보 맞아.”
강휘를 째려본다. 그러자 강휘가 능글맞게 웃는다. 그렇게 강휘는 누군가에게 보이듯이 마치 과시하려는 듯이 나와 친한 척을 했다. 나는 주위 눈치를 보느라 신경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었다. 신경이 예민해지자 보란 듯이 자기주장을 하는 녀석이 다시 출현했다. 윽. 또 새네. 그 때 강휘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를 놀리듯이 물었다.
“야, 넌 친구도 없냐? 대체 식사를 얼마나 짧게 하는 거야?”
“……너뿐이거든 이제.”
“……미안.”
안 그래도 찝찝한 기분 때문에 빡치던 차에 저런 말까지 들으니까 더욱 기분이 다운된다. 우울하다. 내가 아싸긴 했어도 정말 강휘 하나밖에 친구가 없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된 경위를 생각하니 또 다시 우울하다. 꿀꿀한 돼지가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내 아랫입술은 호응이라도 하는 냥 늘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강휘가 내 눈치를 보더니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미안.”
“됐거든? 원래 아싸니까 괜찮다고.”
용서해 줄 기분이 안 난다. 아니 삐진 거 아니거든? 그냥 팩트가 아팠을 뿐이고. 나 아싸 맞으니까 상관없고. 그냥 아래가 찝찝해서 얼굴 찌푸린 거뿐이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살게.”
“뭐. 저녁에?”
“아니 지금.”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간다. 핫. 절대로 먹을 거로 화가 풀린 건 아니고. 아니, 애초에 화 같은 거 안 났으니까. 그냥 맛있는 거 먹는다니까 조금 기분이 좋아진……게 아니라 그냥 먹으러 가기 전에 화장실가서 갈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아졌을 뿐이니까. 정말이야. 어? 그런데 지금? 지금?
“야, 점심시간 30분밖에 안 남았어!”
“어, 그리고 아직도 네 식사교대는 안 나타나고 있지.”
“평소에는 이쯤이면 오는데.”
괜히 민망해져서 말을 줄인다. 평소에는 진짜 이쯤이면 오는데. 이렇게까지 괴롭힘 당하는 건 아닌데. 음, 강휘를 볼 낯이 없다. 왠지 강휘가 이걸 노렸던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멀리서 직속 선임이었던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왜 뛰어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다급해보였다. 아, 그래도 나 밥 못 먹을까봐 뛰어오는 걸 보니 괜히 민망해하던 내가 미안해진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고개를 숙일 대상이 틀린 것 같습니다.”
강휘가 싸늘하게 말하자 선임은 바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입을 헤하고 벌리고 말았다. 겨우 이 정도로 사과한다고? 그런 적 없잖아.
“미안해요, 정원씨.”
“아니, 어. 오늘 교대가 분명히.”
“저에요. 저 맞아요!”
시프트를 떠올려보지만 아무래도 이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소한 감각과 머리를 자극하는 기억에 이마를 찌푸리자 강휘가 그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뭐, 어때. 정원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으음, 어. 그래.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아니요, 편하게 다녀오세요.”
언제 저런 말 했다고. 강휘가 옆에 있어서 다른 부서에 나 대놓고 쪽주기 싫어서 그러나? 하긴 그런 모습을 타부서, 심지어 인사과에 알리는 것은 인포팀의 이미지에도 영 좋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된다.
“아, 그리고 1시간만 정원씨 좀 빌리겠습니다. 이유는 그쪽과 같은 이윱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비서실로 연락 달라고 인포팀에 전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1시간? 그쪽과 같은 이유? 비서실? 알쏭달쏭한 단어들이 조합되고 있었다. 의문을 품을 것이야 많았지만 강휘가 주차장으로 바로 가려고 하기에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화장실로 달려 갔다.
[작품후기]미묘한 데서 끊은 이유요? 연참입니다. 아무리그래도 11000자를 한 화에 때려박기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