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회
2부 막간그 날 이후 강휘가 나를 피한다. 그 날이라 함은 내가 주임에게 고백을 강요받았던 그 날이었다. 주임은 그 이후로도 계속 내게 치근거렸다. 꾸준히, 부지런히, 쉬지 않고, 질리지도 않고 치근거렸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대놓고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묘한 태도를 유지한 채 마치 데스크 업무를 하듯이 웃는 낯으로 대응을 했다.
웃는 낯에 반해 속은 점점 썩어갔다. 그 날 나는 한바탕 울었고, 강휘는 그런 나를 놀려대며 달랬지만 중요한 문제는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어떻게 할 거냐고 강휘에게 물어봐도 강휘는 알아서 한다는 소리뿐이었고 정하도 수상한 태도를 보이며 모르겠다고 했다. 어느 쪽을 둘러봐도 희망이 없었다.
잡고 버틸 동아줄도 없이 금요일이 슬금슬금 찾아온다. 도망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나는 제 자리에 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뛰어 내릴까. 모르겠다. 강휘한텐 미안하지만 주임새끼 알아서 하라고 하고 회사를 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는 못하겠다. 아마 그렇게 하는 순간 평생 강휘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지나며 주임이 더 눈에 띄게 치근거렸다. 월요일엔 가볍게 치근대는 수준이었다면 화요일은 좀 더 노골적으로 치근댔으며 수요일엔 은근슬쩍 내 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에 비례하여 인포팀 내부에서 당하는 갈굼도 심해졌다. 나는 갈굼을 버티며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말하며 실제로 솔선수범하며 더 열심히 일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정원씨가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네요.”
“네?”
“열심히 하는 척은 정말 잘하잖아요. 그걸로 주임님 꼬신 거 아니에요?”
열심히 해도 이런 반응이었다. 열심히 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해도 돌아올 반응이 호의적일 것 같진 않았다. 가불기에 걸린 셈이었다.
수요일이 되자 이상하게 컨디션이 다운됐다. 처음엔는 주임이 내 팔을 쓰다듬은 게 계속 끈덕지게 나를 괴롭히는 줄 알았는데, 달력을 바라보니 내일이나 모레쯤 생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번만큼은 무리였다.
금요일이 다가오며 이미 정신은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할 만큼 몰려있었다. 그런데 몸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업무를 제대로 해낼 리가 없었다, 팀장님께 생리 휴가를 냈다. 팀장님은 내 휴가 신청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걸 내가 보는 앞에서 찢었다.
“열심히 하자면서요. 벌써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 할 거야?”
“아니, 저, 정말 그 날입니다.”
“목요일이랑 금요일이? 목금토일을 쉬면서 그 날이 생리날 일 것 같다? 이봐요, 다정원씨. 스탠스를 하나만 취하는 게 어때? 열심히 하는 척을 하든, 아니면 아예 노는 티를 내든 둘 중 하나만 하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이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구나. 멋대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나를 재단하고 있겠구나. 그렇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팀장의 꾸지람을 듣다가 가만히 돌아 나오자 뒤에서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쏘아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지 말자. 요즘 너무 울었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버틸 수 있어.
그런데 내일도 버틸 수 있을까? 내일이 되면 금요일까지 겨우 하루밖에 남지 않는걸. 내일은 몸도 안 좋을 텐데. 기분도 내 맘대로 컨트롤 되지 않을 텐데. 내일은 주임이 더 노골적으로 치근댈 건데. 강휘도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데. 내일 나는 정말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탄식을 내뱉듯이 감정을 내뱉는다. 여남은 마음이 맺혀 입을 타고 흘러나온다. 내일은 고단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목요일이 되서 아침에 일어나니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시작이구나. 아프진 않지만 충분히 아린 고통이 자기주장을 해왔다. 이 고통이 내 현실을 일깨우고 나를 못 견디게 한다. 내가 멍하게 찡그리고만 있자 알람을 끈 정하가 다시 내 고개를 뒤로 젖힌다.
“시간 얼마나 있어?”
“어, 한 10분 정도 여유 될 거 같은데.”
“그럼 잠시만 누워있어.”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내가 누워있자 정하는 내 아랫배 부근을 살살 쓰다듬어줬다. 정하는 내가 처음에 까무러치고 나서 그 날이 될 때마다 군말하지 않고 나를 챙겨준다. 정하에게도 그 날의 풍경은 충격이었던 걸까. 나를 하염없이 걱정해주는 정하가 고맙다. 또한 무섭다.
“괜찮겠어? 무리하지 말고 오늘 그냥 쉬는 게 어때?”
그러고 싶었다. 내가 오히려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정하는 이미 내 문제로 너무 많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정하에게 얼마나 더 짐을 실을 수 있을지, 그러다가 정하가 견디지 못하게 될 때가 언젠지 가늠할 수가 없어 두렵다. 나는 정하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며 최대한 평온하게 말했다.
“힘내야지.”
“어휴, 그러다 진짜 크게 고생한다?”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에휴. 10분 지났어. 일어나.”
“응.”
정하의 손길이 닿은 곳이 따뜻하다. 이걸로 힘내서 오늘을 견뎌보자. 그렇게 다짐을 하고 있던 게 우습게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저 혼자 쉬프트가 맞습니까?”
“맞아. 애들이 다 휴가를 간 걸 어떡해?”
팀장이 오히려 배짱을 부린다. 쉬프트가 꼬인 것은 어디까지나 팀장의 실수였다. 나를 오늘 쉬지 못하게 한 것도 팀장의 오판. 나 혼자 데스크에 서야하는 것도 팀장의 오판. 모든 것이 틀린 판단이었다. 그러나 따질 수는 없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부탁했다.
“저 오늘 혼자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뭐 어떻게 하라고. 그럼 휴가 간 인원들 부르란 말이에요?”
“적어도 한 분이라도 같이 붙여주시면…….”
“다정원씨.”
팀장이 나를 노려봤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려던 말조차도 모두 끊겨서 제 형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팀장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기만 하다가 씹어 뱉듯이 뾰족하게 지껄인다.
“헛소리하지 말고 일하러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를 세게 물고 데스크로 나선다. 기나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버텨야 한다. 오늘을 어떻게든 버텨야한다. 그리고 버티고 나면 금요일이 찾아와. 내가 외면하고 있던 그 날이 찾아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그 날이 찾아와. 오늘을 버텨내면 대체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비적비적 데스크를 나와서 업무를 보던 중에 몇 번이고 위기가 왔다. 배 아래에 자기주장을 하는 고통을 견뎌내고 웃는다. 그래도 첫 날인 게 다행이었다. 둘째 날엔 더 심하니까. 그러고 보니까 둘째 날이 내일이구나. 금요일이 평생 오지 않았으면. 시간이 흐르는 것에 감사한다. 시간이 흐르는 것에 초조해한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차에 흐르는 느낌이 든다. 아랫입술을 깨문다. 일부러 피를 내려고. 혹시라도 나를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냄새가 날까봐, 일부러 얼버무리려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냄새가 난다. 내 입술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직감한다. 하지만 이걸로 얼버무릴 수 있다. 얼버무릴 수 있다. 얼버무릴 수 있을까? 겨우 이거로? 정말? 그 때 손님이 찾아왔다. 한 번씩 인사과를 들리는 분이었다. 필사적으로 웃는 낯을 한다.
“아가씨?”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장님과 약속이 있어요. 혹시 안내 좀 해 줄 수 있나요?”
낭패였다. 지금은 움직일 수 없어. 새어 나올 것 같은 걸. 이미 새어나왔을 지도 몰라. 지금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를 그만 괴롭히란 말이야. 비릿한 철향이 코를 스친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필사적으로 얼굴을 식히려 한다. 감정을 가라앉히려 한다.
아니야. 저 사람한텐 냄새가 안 났을 거야. 났으면 저렇게 태연하게 서 있을 리가 없어. 나한테만 나는 거야. 나도 옛날에 여자 직원들이랑 일해 봤어도 그런 거 한 번도 못 느꼈었잖아.
하지만 걔네들은 다 갈았을 거고. 나도 이제 갈아야 하는데. 솔직히 이미 지난 거 같은데. 들킬 거야. 움직이면 무조건 들킬 거야. 싫어. 들키기 싫어. 부끄러워.
그러니까 시프트에 한 명 더 넣어달라고 내가 말했잖아.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이런 일 안 생겼잖아. 팀장 개새끼. 진짜로 개새끼. 이걸 어쩔 거야. 진짜로 나 이걸 어쩌면 좋아. 실타래를 일부러 헝클어트린 듯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실타래 미로에 갇혀버린 생각이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어, 아가씨? 혹시 문제 있어요?”
“앗, 아, 아닙니다.”
사내의 반응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죄,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어, 그래요.”
전화기를 든다. 전화는 비서실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말만을 빠르게 전달한다.
“인포데스크입니다. 사장님과 약속이 잡힌 손님이 한 분 계십니다. 현재 제가 안내가 불가한 상황이라 혹시 안내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곧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해냈다. 곧 여자 한 명이 내려왔다. 저번에 사장실에 들어갈 때 봤었던 분. 사장님과 잡힌 약속이니 사장님 비서분이 내려오시는 구나. 비서는 손님께 바로 인사를 드리고 안내를 하려다가 나를 보더니 손님께 잠시 고개를 숙이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혹시 문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오늘 그 날인데 시프트가 꼬여서 화장실도 못가고 있어요. 적어도 새 거로 갈 시간이 필요해요. 제발 부탁드려요. 말해도 될까? 인포 팀에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 인포팀에 해코지 하는 건 사실 상관없지만 그 해코지가 내게 다시 내려올 거야. 그대로 물림이 될 거야.
그래도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지금 이렇게 비서님을 보내고 나면 난 이 상태로 시프트가 끝날 때 까지 서있어야 해. 그럴 순 없어. 그리고 어차피 내일이 지나고 나면 내가 회사를 더 다닐지 안 다닐 지도 모르잖아. 품 안에 넣은 사직서가 내게 입을 뗄 용기를 준다. 나는 비서님이 한 것처럼 조심히 귓가에 손을 대고 속삭인다.
“오늘 그날인데 으, 교대해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자 비서님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귓속말로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람을 보낼 테니.”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비서님이 손님을 데리고 갔다. 손님을 앞에 두고 굳어 있었던 것 치고는 잘 해결한 셈이었다. 곧 사람을 내려주신다고 했으니 그 점도 안심이 됐다. 내심 손님께 냄새가 났을지 안 났을지 그게 걱정이 됐다. 일부러 낸 입술의 상처를 봤으면 좋으련만. 아니 그냥 냄새 못 맡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사람이 찾아왔다. 비서님이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내심 반가워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한다.
숨을 들이켰다.
주임이었다.
주임은 묘한 미소를 걸고 내게 다가왔다.
오지 마. 제발. 지금은 정말로 싫어.
혐오감이 치솟는다.
부끄럼이 내 목을 조른다.
숨을 내뱉지 못한다.
“사정은 들었습니다. 다녀오세요. 제가 대기하죠.”
주임은 능글맞은 얼굴로 내 등을 밀었다. 녀석의 손길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주임은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시선이 머무른다. 시선이 내 얼굴이 아닌 그 아래 언저리에 머문다. 나는 숨도 내뱉지 못하고 떨다가 도망치듯이 뛰었다. 어째서,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화장실에서 패닉에 빠져 그래도 어떻게든 생리대를 갈고 뒤처리를 하고 데스크로 향한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어내며 거울을 바라본다. 핏기 없는 여자애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괴로운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본다.
데스크로 돌아가기 싫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도 돌아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더 괴로워질 것을 직감한다. 실시간으로 빚이 쌓이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이끌어 데스크로 돌아가자 주임은 나를 보낼 때처럼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저 때문에 살았죠? 역시 저밖에 없죠?”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 팔을 떨쳐내고 나왔다. 내가 제 팔을 떨쳐내자 주임은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놀리듯이 입을 연다.
“어때요. 어차피 내일 말해야 할 거. 여기서 대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요.”
간신히 부정의 메세지를 전한다. 그 후에 쏟아내고 싶은 욕설을 겨우 참아낸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피부에 남아있다. 당장 털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사적인 공간에 침범해온다. 내가 거북하게 여길 범위까지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가 참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
“하하. 아, 혹시 부끄러우세요? 어차피 이런 거 자주 보게 될 텐데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한 마디 더.
“더 부끄러운 것도 볼 텐데요.”
아. 못 참겠다. 그릇에 담겨 있던 물이 흘러넘치고야 말았다.
“개소리하지 마.”
“예?”
녀석은 당황한 듯이 반문한다. 그 표정을 보자 이제 뭐든지 다 상관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 모르겠다. 시발 못 참겠네. 나는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풀어낸다. 방금 전까지 느끼던 기분 나쁜 감정을 털어내듯 소리친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시발새끼야!”
혐오를 담아 발악한다.
“나한테 그만 찝쩍대라고! 발정 났어? 어떻게 이런 순간까지 그런 소리를 해! 이 발정난 개새끼야!”
그리고 참지 못해 새어나온 욕들을 지껄인다.
“미친, 미친 새끼. 넌 정말 미친 새끼야.”
한바탕 욕설을 쏟아내고 숨만 색색 들이쉰다. 주임은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하아, 다정원씨. 뭐 좋아요. 이번엔 넘어가죠.”
그리고는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내 말이, 내 혐오가, 내 분노가 하나도 닿지 않았다. 주임의 태도에서 그것을 깨닫는다. 그것이 분해서 이를 까득 깨물고야 만다. 그 순간, 분노를 쏟아낼 때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던 강휘가 내게 묻는다.
이걸로 됐어?
됐을 리가 없잖아. 뒤늦게 찾아온 자괴감이 나를 덮쳐왔다.
주위의 시선이 남은 내게로 쏠린다. 나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인원이 부족하다던 인포 팀에서 귀신 같이 사람이 나왔다.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내 등을 떠밀었다.
팀으로 돌아가자 그곳은 재판장이었다. 나와 같이 시프트를 서지 못하겠다던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나를 가운데에 세운다. 그들은 나를 세우고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심판한다.
“데스크에서 큰 소리를 냈다던데. 욕까지 하고.”
“주임님이랑 싸웠다면서요? 끈 떨어진 신세네요?”
“그러게 적당히 굴 것이지.”
“뭐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나댄 게 문제죠.”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하죠? 총무과에선 묻자던데.”
입을 꾹 닫고 있자 그들은 한참동안 나를 씹어 내린다.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들은 선심을 썼다는 듯이 내게 선언한다.
“경고에요. 총무과에서 묻자고 하니까 더 이상 말은 안하겠지만 처신 똑바로 하세요. 팀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자기니까 어쩌고 의미 없는 말이 꼬리를 물고 다시 내게로 드리운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기분이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팀장이 내게 지껄였다.
“꼬우면 책임지시던가요?”
“예.”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이런 말이 나온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나는 지친거구나.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소란스러워진 팀을 등지고 나왔다. 지쳤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쉬고 싶다. 인포팀에서 나오자 주임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마지막 기횐데요?”
“지랄하지 마세요.”
나는 싸늘하게 대꾸한다. 녀석과 대화하는 것조차 지쳤다. 모든 게 귀찮아서 다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자 총무과 주임이 내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인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강휘씨는 안 됐네.”
“읏.”
강휘. 강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미 지쳐 나가떨어졌던 마음조차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감정이 나를 다시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주임을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뛰쳐나왔다.
뛰어온 곳은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한쪽 칸으로 들어와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눈물이 비질비질 나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결국 이겨내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그리고 결국 노력한 결과가 강휘를 떨어트리는 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임과 사귀는 건 너무 무서워서 그 사실이 비참해서 그래서 비질비질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그래도, 그래도 강휘한텐 말해야해.”
각오를 다진다. 회사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사라지게 된다면 강휘는 영문도 모른 채 내 치부를 짊어져야 한다. 그렇겐 할 수 없다.
모든 일을 말하자.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강휘에게 전달하자. 적어도 강휘가 대비할 수 있게 하자. 그 과정에서 강휘가 나를 책망하더라도, 결국 버텨내지 못한 나에게 실망하더라도 전달하자. 물론 그렇게 되서 강휘가 너무 실망을 해서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해도, 그냥 받아들이자.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자 계속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닦아내며 카톡으로 메세지를 보낸다. 가볍게, 그렇지만 거절할 수 없게.
[나 : 오늘 술 좀 같이 마셔주라. (대충 눈물 이모티콘)]
[나 : 제발]
[나 : 제발 (대충 눈물 이모티콘)]
강휘는 내 절박함을 눈치 챈 건지 아니면 자기도 술이 마시고 싶었던 건지 알겠다고 했다. 퇴근을 하고 약속장소에 앉아있었더니 강휘가 왔다. 맨 정신으론 차마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술을 연거푸 마신다. 강휘는 그런 나를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들이킨다.
정신이 흐려지고, 그렇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기 좋은 상태가 됐다. 오늘 하루 있었던 말을 전한다.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다. 숨기고 싶은 얘기였다. 그래서 도중에 전하지 못할 뻔도 했지만 치사하게 강휘의 손을 잡아 그 온기에 기대어 전달한다. 강휘는 그저 듣고 있었다.
모든 말을 다 뱉어버리자 불안이 나를 엄습했다. 강휘를 바라본다. 네가 나를 책망할까봐. 결국 회사에서 버티지 못했냐고 실망할까봐. 물론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불안하다. 만에 하나라도 네가 그렇게 생각할까봐.
그러나 강휘는 가만히 그저 내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강휘는 그저 내 말을 들어주며 눈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내 감정에 공감하고 있었다. 내 아픔을 들으며 너는 나와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야 할 말뿐만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했던, 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조차도 모두 다 털어놓고야 만다.
“너한테, 강휘 너한테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흑, 그런데.”
눈물이 흘러나온다. 불안해하며 떨던 감정이 터지고야 만다. 너의 상냥함에 기대어 감정을 쏟아낸다.
“왜 그냥 다 들어만 주는 거야 이 바보야아. 그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아!”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나는 더 이상 회사를 다니지 못할 거지만.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을 너한테 미안해서. 그러면서도 주임과 사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내 자신이 미워서. 이 와중에도 너한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서.
그래서 나는 그냥 너에게 안겨 울었다. 너는 나에게 괜찮다는 듯이 기댈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온기에 기대어 나는 오늘 하루의 아픔을 너에게 쏟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