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68화 (68/138)

68회

2부 막간주말은 대부분 강휘와 함께 보냈다. 토요일에만 만날 때도 있었고, 일요일에만 만날 때도 있었고, 양일을 다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은 양일을 만났다. 이전에 자주 보던 이유는 던파 레이드 때문이었다. 옛날엔 주말에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주말마다 만나서 놀다보니 습관화가 된 것이었다.

요즘에도 그런가 하면 조금 애매하다. 강휘와 주말에 보는 것은 이전과도 같지만 꼭 던파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강휘가 일을 시작하면서 좀 더 설렁설렁한 모드가 됐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만나냐고 한다면 그냥이라고 밖에 대답 할 수가 없다. 그냥 보고 싶어서 만나서 논다. 그게 다였다.

굳이 만나는 이유를 짜내라면 회사에 다니면서 생긴 일종의 보상심리 같다고 생각한다. 한 주간이 너무 고되고 힘드니 주말이라도 고민 없이 편한 사람을 보고 쉬고 싶다. 그런 기대가 마음속을 맴돌았다.

특히나 이번 주는 좀 더 강휘를 보고 싶었다. 전 주에 약속을 펑크 낸 강휘가 오늘은 뭐든지 먹고 싶은 걸 사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래놓고 카톡쳐씹고 자러 간 걸 보면 열불은 좀 났지만 밥을 산다니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강휘가 밥을 차리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된장찌개의 고소한 향기가 가장 먼저 났고, 뭔가 달달한 냄새와 매콤한 냄새가 빈 속을 자극했다. 알고 보니 유부초밥에 제육볶음이었다. 잠이 덜 깼어도 알 수 있다. 강휘는 정말 좋은 녀석이다. 요리를 잘 하는데 남한테 먹이는 것도 즐긴다. 옆에 있는 사람 입장에선 그야말로 축복이다. 씻고 와서 된장국을 마시며 나도 모르게 입이 풀렸다.

“강휘야. 너 나한테 시집오지 않을래?”

“미친년아. 굳이 말하면 니가 신부 쪽 아니냐?”

어허. 아빠에게 물려받은 경상도 사나이의 혼이 울부짖었다.

“아니 신성한 부엌데기에 어찌 남자가 감히 설 수 있단 말이냐.”

“지랄을 해라 지랄을.”

“진짜 지랄을 해라 둘 다.”

정하가 우리를 째려봤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요즘 들어 정하 앞에서만 서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정하가 여자로써 부족한 부분을 계속 챙겨주기 때문이리라. 요즘엔 내가 오빠가 아니라 정하가 언니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내가 둘이서 꽁냥대는 걸 봐야 되니? 애인도 없어서 죽겠는데.”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그리고 지금 해가 중천에 떴다 정하야.”

“둘이 하여간에 쿵짝 잘 맞는다니까.”

정하가 한숨을 내쉬자 정하 몰래 강휘랑 눈을 맞추고 키득거렸다. 정하가 한 다른 소리는 다 개소리라고 치더라도 강휘와 쿵짝이 잘 맞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정하 눈치를 보며 나갈 각을 재다가 정하의 허락 하에 강휘와 던파를 하다가 고기를 먹었다.

강휘는 고기를 먹을 때 일부러 내가 집게를 잡고 헛짓거리를 좀만 해도 집게를 뺏어가서 고기를 구워준다. 편리하다. 그런 만큼 강휘가 없으면 불편하다. 오늘은 강휘가 고기를 사주기까지 하니까 두 배로 맛이 좋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은 건 딱 거기까지.

행복한 시간은 언제나 짧은 법이었다. 고기를 먹고 나오는 길에 불행이 우리를 마주보며 인사를 해왔다. 주임을 마주쳤다.

“어, 이게 누구야. 정원씨 아니야?”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서 강휘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듯이 이래저래 변명을 했다. 주임은 강휘가 인사과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강휘를 보며 계속 눈치를 줬다. 게다가 내게도 자꾸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소문 돌고 있는 거 알면서도 개인적으로 남자를 만나는 거냐. 대충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가만히 있었어도 될 일인데 마음속에서 뭔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도 되는 냥 구는 주임의 태도가 거슬렸다. 강휘를 깎아내리기 바쁜 주임의 말이 거슬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날 선 대응이 나오고 말았다.

“선배님. 한강휘씨랑 저는 그런 사이도 아닐 뿐더러, 제가 누구랑 친하게 되더라도 제 사생활입니다.”

“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주임은 내가 얼굴을 굳히고 기분 나쁜 티를 내자 바로 사과를 해왔다. 사과라기엔 그 안에 들어있는 뼈가 너무도 선명했다. 인사과랑 아는 척 하지마라. 총무과와 불편한 사이다.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려다가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며 알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강휘를 데려가서 둘이서 얘기를 나누시겠단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으나 강휘를 보면 알 수 있다. 절대로 좋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리라. 얼핏 봐도 강휘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왔는지 주임이 나와 식사를 하자고 한다. 그제야 뭔가 불온한 공기가 느껴졌다. 강휘와 같이 다녔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테니 식사를 하자? 칼만 들지 않았지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휘를 바라봤더니 내가 나서지 않으면 바로 한바탕 싸움이라도 낼 기세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나섰다.

“후, 예. 알겠습니다.”

그러자 강휘의 얼굴이 썩는다. 알아. 나도 좆같아. 어쩌겠냐, 근데. 내가 나서지 않으면 네가 주임을 죽일 것 같았어. 주임은 내 대답을 듣고 만족했다는 듯이 사라졌다.

가자마자 쌍욕을 뒤통수에 박아 넣었다. 강휘는 그러고도 내 걱정을 계속했다.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강휘를 대충 안심시키려고 네 걱정이나 하라며 말했다.

“너한테 피해 안 가겠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냐?”

“야!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완전 잘 나가고 있는데!”

“아니, 하아. 그래.”

강휘의 눈빛에 걱정이 겹겹이 쌓였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난 지금 소문의 핵이었다. 강휘가 나와 함께 다닌다는 사실을 주임이 슬쩍 흘리기만 해도 강휘가 걷는 탄탄대로에 금이 날 것이었다. 강휘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지만 나로 인해 강휘가 피해를 입는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나도 훌훌 털어내고 같이 잘 됐으면 하는 것이었지, 내가 있는 수렁으로 강휘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강휘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그래.”

“오냐.”

서로 웃음을 주고받는다. 서로 웃고 싶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웃음을 나눈다. 너 먼저 안심해, 아니야 너 먼저 안심해. 그런 의미를 서로 주고받는다. 누구 하나 안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의미 없는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

며칠이 지나고 주임과 함께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인포 팀들은 나와 밥도 같이 먹어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항상 식사는 혼자 혹은 주임과 함께였다. 예전이었다면 주임이 겉도는 나를 챙겨주겠거니 생각했겠으나 같이 따로 식사를 하자는 말을 듣고 나선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설마 절대로 그럴 린 없지만 주임이 내게 마음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 식사자리에 나갔는데 묘한 분위기가 되면 정말로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렇지만 괜히 싫은 티를 냈다가 아니기 라도 하면 그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복잡한 심경이었다. 덕분에 밥도 잘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주임이 하는 말에 대충 장단을 맞춰주면서 피곤한 참에 갑자기 강휘가 내 옆으로 와서 식판을 내려놨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예의를 차리듯이 내게 인사를 해왔다. 어색한 태도는 둘 째 치고서라도 강휘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회사에선 서로 아는 척 안하기로 했잖아. 나한테 무슨 소문 도는지 다 알잖아. 너도 아는 척 안하기로 한 거 납득한 거 아니었어?

당황을 숨기고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을 했다. 그 사이에 강휘는 제 선배와 함께 주임을 박살내고는 남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유치한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저번의 복수라도 한 걸까.

집으로 돌아가서 강휘에게 왜 아는 척을 했냐고 카톡을 남겼다. 강휘는 대충 얼버무렸다. 강휘가 얼버무리자 오히려 마음이 심란해진다. 뭐라도 좋으니까 아는 척을 한 이유를 알려줬으면 좋으련만. 강휘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자 꽉 막힌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답답하다.

주임은 그 날 바로 내게 저녁 약속을 전달했다. 이상하게도 강휘가 주먹을 꽉 쥐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는 반 강제성이 서린 협박이었다. 날짜는 이번 주 토요일, 장소는 회사 근처에 있어 지나가면서 한 번씩 봤던 레스토랑이었다. 장소를 보자마자 다시 답답하다.

당일이 되자 정하가 나를 꾸며줬다. 그런 자리에 나가면서 꾸미지 않는 건 실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꾸미기 싫었다. 주임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간접적인 형태라면 어떤 식으로든 거절의 메세지를 내보이고 싶었다. 그러자 정하는 그럼 꾸미지 않은 듯이 꾸미자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주임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좀 차려입고 나오셨네요?”

정하의 꾸미지 않은 듯은 주임에겐 충분히 꾸민 모습으로 여겨진 모양이었다. 속으로 혀를 찼다. 주임은 누가 봐도 차려입은 것처럼 입고 나왔다. 나도 체면치레를 하듯이 답했다.

“주임님도 꽤 차려입고 나오셨네요.”

“하하, 그럼요. 정원씨 만나러 왔는데. 아, 오늘 정말 예뻐요.”

“감사, 합니다.”

자리에 온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예쁘다는 말은 아직도 조금 거부감이 있었다. 하물며 주임의 눈이 내 온 몸을 훑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시선강간이라고 했던가? 아니, 그냥 내 자의식이 과잉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애써 자신을 달랜다.

자리에 앉아 의미 없는 맞장구를 치며 시간을 보낸다. 빨리 식사를 마치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음식이 나왔을 때는 평소보다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음식의 맛을 느낄 틈은 무슨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주임은 내가 음식이 마음에 든다고 여겼던 모양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 이리 오늘따라 음식이 양이 많은 건지, 다 먹기도 힘들었다. 여긴 다신 안 와야지. 불편함이 엉켜서 체를 할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주임이 민감한 주제를 꺼냈다.

“정원씨가 요즘 정말 힘내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자꾸 나쁜 소문이 나니까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힘드실 땐 저한테 좀 기대셔도 되요.”

먹던 수저도 내려놓는다. 숨이 막혀왔다. 불안이 실체가 되어 차츰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못 알아들은 척 하며 씩씩하게 답했다.

“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주임님께서 요즘 제가 겉돌아서 절 개별적으로 신경써주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부족하기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하겠다는 말은 차마 쉽게 나오지 않았다. 노력, 노력. 이미 노력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다 같이 열심히 해보죠. 제가 좀 더 하겠습니다. 그럴 때 마다 돌아오는 것은 모멸, 시기, 비웃음. 인포 팀의 얼굴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광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들키지 않게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주임만 경계하기에도 바쁜 상황이었다. 여기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더 큰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잠시 딴 생각을 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 요인이 됐다.

“정원씨가 괜찮다면 그런 거겠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자꾸 주임님이라고 부르시네요. 제 이름 불러 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여기는 회사 밖이잖아요.”

대처가 늦었다. 낭패였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분위기를 쇄신시키려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죄송하지만.”

“나는 정원씨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주임은 기회라는 듯 나를 몰아붙였다. 묘한 끈적거리는 느낌이 피부를 훑는 기분이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침잠해가고 있었다. 입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돼. 일단 거절하자. 거절하고, 죄송하다고 하자. 뭐라고 거절해야하지?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못하겠다고 하자. 싫어. 남자한테 이런 소리 듣기 싫어. 내가 잘못한 거야? 이 자리에 나오면 안됐던 거야? 당황이 나를 삼켜 공황상태를 만들었다. 머릿속에선 일단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단지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는 정원씨랑 더 친밀한 관계가 되고 싶어요. 안 되나요?”

더 이상은 못 참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강휘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해 강휘야. 나 더 이상 너랑 같이 회사 못 다닐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 이 사람과 친밀한 관계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아. 못하겠어. 나약한 감정이 내 머릿속을 잠식한다. 일단 머릿속에 가득 찬 거절을 그대로 전달한다.

“저는 주임님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저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새빨개졌다가, 난 싫어. 싫다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당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다시 암전.

이를 꽉 깨물고. 좋아, 가라앉혀. 괜찮아. 다정원. 할 수 있어. 강휘야 나를 도와줘. 네가 나에게 기대했던 걸 내가 배신하지 않게 도와줘. 난 아직 회사에 다닐 수 있어. 정말이야.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끓어오르는 화를 이름 모를 감정으로 찍어 누른다.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내 생각을 차분하게 토로한다.

“저에 대한 감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주임님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요.”

“제 감정에 조금이라도 좋은 감정이이 있다면 그렇게 잘라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줘요.”

“아니요. 싫어요.”

끊어낸다.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내가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전력으로 표현한다. 그것만 하기에도 너무 벅차다. 당신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 혐오스럽다. 그런 스탠스를 취하자 주임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툭하고 폭탄을 내던졌다.

“혹시 지금 남자친구 있어요?”

“아, 아니.”

가면이 무너진다. 다잡았던 감정이 다시 휘몰아친다. 당황이 나를 삼킨다.

“한강휘씨에요?”

“예?”

막아놨던 뚜껑이 열린다. 나도 나를 제어할 수 없어진다. 강휘? 왜? 어째서? 강휘가 왜? 남자친구? 강휘가? 모든 생각이 차단된다. 머릿속을 채우는 건 오직 순수한 의문.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다.

“역시 한강휘씬가보네. 왜요. 그 애송이는 되고 난 안돼요?”

답을 할 수 없다. 나조차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니, 답은 없었다. 강휘는 그런 게 아니야. 강휘는 남자친구 같은 그런 얄팍한 사이가 아니야. 헤어지면 끝인 애인 따위가 아니야. 나랑 강휘는 그런 게 아니야. 네 맘대로 그런 관계로 우리를 정의하지 마. 나는 강휘는 그런 게 아니야.

“잘 돼가고 있는 사이였나 봐?”

적의, 그리고 물씬 느껴지는 음습한 감정. 내 코와 입을 막는다.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직 사귀는 거 아니면 나한테도 기회 좀 줘.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잖아. 아, 혹시 그런 사이까진 안 갔어?”

“무, 무슨!”

“안 갔구나?”

이젠 음습한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나는 직설적인 성희롱에 매달린다. 의미를 본능적으로 파악하지만 이성적으로 외면한다. 당황, 오롯이 당황만 하기 에도 벅찼다. 이미 내 안을 소용돌이치는 감정에게, 그리고 내게 부딪쳐 오는 음습한 감정에게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정원씨, 정원씨. 내가 왠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그 애송이랑 잘 풀리고 있는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소문 신경 쓰고 있어?”

정신이 든다. 강제로 정신 줄을 붙잡게 된다. 이 새끼 지금 강휘를 엮으려고 하고 있어. 나를 무기로 삼아서 강휘를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어. 안 돼. 그러지마. 강휘는 지금 잘하고 있어. 열심히 하고 있잖아. 열심히 하는 걸로 부족한 건 나뿐이면 되잖아.

“그러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왜 이리 화를 내고 그래요. 캄다운, 캄다운.”

이미 녀석은 제 페이스대로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요리할까.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녀석이 나와 강휘를 엮지 않을 지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회사는 나가도 돼. 물론 강휘는 조금 실망하겠지만 나도 그건 싫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임과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아. 하지만 회사를 나가는 걸로 끝이 나지 않는다면? 내가 나가고 나서 강휘가 그대로 피해를 입게 된다면? 나의 탓으로? 내 탓이야? 싫어. 그런 건 싫어.

“아, 그 애송이랑 만나는 거 회사 사람들이 알면 앞길이 창창한 녀석한테 방해될까봐? 지고지순하네.”

“그런 거!”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다 말해버릴지도 모르겠네?”

발밑이 무너져 내린다. 상상했던 최악의 사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 상황.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허물어져 내린다. 제발, 부탁이야. 그러지마. 강휘는 상관없잖아. 내 선에서 끝내달란 말이야. 허탈하다. 허무하다.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 힘써준 강휘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더러운 소문을 묻히고 가는 것뿐이구나. 그렇구나.

독사는 약해진 마음 틈에 속삭인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뭔가요.”

“아 별 건 아니고.”

주임이 웃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들려주던 뱀과 같은 미소로. 역겨운 미소를 내게 들이밀며 내게 속삭인다. 이 선택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 녀석 대신 나랑 사귀자. 그럼 원만하게 해결 아니야?”

아. 그렇구나. 나는 이미. 처지를 깨닫는다. 이 남자와 사귀거나, 나를 위해 노력해주던 강휘를 배신하거나. 선택지는 그것뿐 인거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뒤로도 물러날 수 없어. 강휘야. 나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 응?

“저는, 저, 저는.”

“아 너무 그러지마.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아, 그래. 정원씨도 강휘씨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그래, 충분히 시간 줄게요. 다음주 금요일까지 정리하고 회의실에서 보고하도록 해요.”

그 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를 여유 있게 즐기는 주임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부평초처럼 흔들거리며,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을 뿐이었다.

울고 싶어서, 하지만 이 녀석 앞에선 울고 싶지 않아서, 이제 팀 안에서 우는 것은 그냥 지는 거니까, 이미 졌으면서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래서. 고집을 부리고 싶어서. 나는.

주임과 내가 무슨 말을 나누는 지도 모르겠으나 녀석은 뭐라고 하다가 돌아갔다. 자리에 혼자 남은 나는 이제는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더 이상은 참지 않아도 되니까.

“흑, 흐윽. 흑.”

“야! 야, 너 괜찮아?”

“언니! 언니 괜찮아?”

“흑, 어?”

강휘가 있다. 정하가 있다. 너희들이 나를 보고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게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황급하게 소매로 눈물을 닦고.

“너, 너네가, 여기 왜 있어. 응? 흣.”

“후.”

“언니, 미안해. 다 봤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으, 왜. 왜 니가 미안하다, 그래. 흣!”

필사적으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하고, 그런데 그게 안 되서. 너희들 앞에서만큼은 지는 게 아니니까 울지 않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자리 비켜줄까?”

“이, 이! 바보야아!”

너의 따뜻함이 사무치게 반가워서. 네가 이 와중에도 내 눈치를 보는 게 고마워서. 그런데 나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주임은 나보고 그런 너를 배신하기 싫으면 자신과 사귀자고 해서. 너무 복잡해서. 그럼에도 난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나는 정하에게 안겨서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작품후기]50~ 57화 시점. 아무래도 57화의 시점이 정원이 입장에선 감정의 요동이 심했던 지라 길게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네요.

아이고... 복통에 시달리며 썼는데도 오히려 후반부는 집중하고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주신 여러분 감사드리고, 지각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파센타우리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  나도 보러 갈 거야...

매 번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날려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 사기 고기기 => 고기를 사주기 수정 했습니다. 대체 저런 걸 퇴고하면서 왜 못 본 걸까...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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