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회
2부 막간강휘는 좋은 친구다. 가장 좋은 면은 자기가 잘난 줄 알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면이다. 이건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잘난 줄 아는 녀석들은 잘난 체를 하는 것을 즐기니까.
아마 그런 잘난 강휘가 없었다면 나는 목을 매달았을지도 모른다. 그 타이밍은 아마 믿었던 동향 친구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였겠지. 처음엔 정하가 타이밍 좋게 구해준 지 알았더니 그것조차 강휘가 부탁한 것이었다고 한다. 생리도 하기 전에 피를 볼 뻔했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자가 됐다는 사실은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엔 실감하지 못했지만 생리를 하는 데 더 이상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첫 생리를 할 때 모종의 사건이 겹쳐 까무러쳐버리고 말았다. 그 충격적인 기억은 내게 여자라는 성을 각인시키기엔 더 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나는 내가 여자라고 완벽하게 인정하지 못했다.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인정하게 됐다. 그 때부터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다.
어느 날 여자의 몸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이 몰려왔다. 처음엔 샤워할 때 거울도 못 바라봤는데 이젠 덤덤하게 거울을 바라보며 씻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거울 속에 있는 여자애를 자신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여자의 몸이 익숙해질 때 쯤 강휘랑 대판 싸웠다. 어쩌면 아직 익숙하지 않아 싸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 역시 나는 생리를 했다. 여자가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것을 보며 생리를 한다고 하는데, 그걸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생리는 짜증의 이유가 절대적으로 될 수 있다.
여차저차 하다 보니 화해를 했다. 나도 강휘도 오해하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퍼즐을 맞추듯 대화를 하다 보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오해라고 하니 강휘네 가족들도 우리 가족들도 우리를 사귄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집안이야 강휘가 그렇게 채, 책임을 진다고 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강휘네 가족들은 왜 나랑 강휘가 사귄다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역시 그 날 강휘네 집까지 찾아간 게 문제였을까?
가족이라고 하니 생각난 건데, 우리 집에서 나를 본가로 돌아오라고 할 때 나는 강휘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있겠느냐고. 서울에 남고 싶기도 했고, 동향 친구들을 보는 게 무서웠다. 그러자 강휘가 엄마 아빠한테 멍청한 소리를 했다. 나와 함께 직장을 들어가면, 자신을 믿고 나를 서울에 남겨달라는 것이었다. 바보, 멍청이. 그게 되겠냐?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강휘는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정확히는 아버지의 빽으로 낙하산을 탄 것이었지만 그래도 해낸 것은 해낸 것이었다. 아무튼 간에 대단한 녀석이다.
서울에 남게 된 것은 참 좋았지만 직장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처음엔 내 사수, 그러니까 직속 선배도 나를 잘 챙겨주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톱니바퀴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학창시절에도 겪어본 적 없었던 왕따를 다 크고 나서 당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자들의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여자들의 세계를 너무 우습게 봤던 것이다. 여자들끼리의 대화, 여자들끼리의 눈치, 여자들끼리의 공감, 여자들끼리의 약속.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실 예전부터 여자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 생소했고, 어려웠다. 괜히 모쏠이었던 것이 아니다. 모쏠이라기보다 친구도 많이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러고 보니 이제 남은 친구라 봐야 강휘 뿐이다. ……자괴감이 든다. 아니,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내 존재 자체가 세상에 둘도 없는 특수 케이스니까!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각설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고립되었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팀 내에서 고립된 것이고 팀 외의 사람들은 의외로 나를 잘 대해줬다. 거의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그 때의 나는 그것조차 고마워서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그 남자들을 대했었다. 그에 비례해서 팀 내에서 나를 꾸짖는 일이 잦아졌으니 정말이지 멍청한 대응이었다. 그 때 팀원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요즘 회사 생활 즐거우신가 봐?”
“네?”
“많이 웃더라고. 회사 놀러오는 기분으로 오나봐. 나도 그럼 정말 좋을 텐데.”
“그, 데스크에선 웃는 얼굴로 있어야 한다고 하셔서…….”
“아. 우리 탓이다?”
“아, 아닙니다.”
괜히 핑계를 대다가 말꼬리만 잡힌 셈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은근히 눈치 주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남자였을 때,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이라 봐야 그 순간 같이 노는 것 정도였고 이익을 추구하는 녀석도 분명 있었으나, 그래봐야 자신에게 도움 될 녀석을 찾는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게 총무과 주임 녀석이었다.
사실 주임이 처음부터 짜증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분명히 사근사근하게 매너를 지켜가며 나를 챙겨줬었다. 물론 그게 묘하게 기분 나빴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인내했다. 주임님은 나를 신입계집애라고 챙겨주는 건데, 정작 내가 나 자신을 완전하게 여자라고 여길 수 없기에 기분이 나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팀에서 너무 심하게 갈굼을 당해 우울했었다. 평소엔 은근히 꼽을 줘서 못 알아 챌 정도였지만 그날따라 표현이 직접적이었다. 일이 끝나고 정하에게 물어봤었는데 이 정도면 회사 그만두고 나가라고 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울적하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니 더욱 울적하다.
“정원씨, 쉬프트 대체 어떻게 짰길래 이렇게 된 거에요?”
“그, 잘 모르겠습니다. 다 보고 제출한 거였는데, 죄송합니다.”
“정원씨는 너무 모르는 게 많네요.”
“죄송합니다.”
“하아. 방금 말했던 것 같았는데. 뭐 됐어요. 근데 모르면 안 되잖아요. 그게 자기 업무니까.”
“……네.”
그 말을 들으며 나 역시 표정이 일그러진다. 표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팀원은 내 표정을 바로 캐치하고 더욱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기 업무도 모르면서 실수도 잦죠? 실수도 두 번 하면 실수가 아니잖아요. 언제까지 봐줘야 되요?”
“아, 그게.”
“안 배웠다고?”
“아, 아닙니다.”
“그래요. 안 배웠다고 못하면 그게 말이 되요? 회사가 학교도 아니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이었으며,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특히 나는 더욱 그랬다. 하염없이 내 자신이 비참해졌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잘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잘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 상대하는 일은 원래부터 잘 못했는걸.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저번에 울었다가 두 시간 동안 조리돌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아니 적어도 인포팀 내에서 눈물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그렇게 한 차례 갈굼을 당하고 데스크로 나와 웃는 얼굴로 버텼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피곤하다. 인포팀에 있을 땐 인포팀을 상대해야 했으며, 데스크에 있을 땐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피곤이 짜증을 물고 오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강휘가 지나가듯이 쿠키를 놓고 갔다. 아무 말 없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내게 선물을 주고 갔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데스크에 서있느라 억지로 짓고 있는 미소가 아니었다. 내가 힘들 때 마다 꼭 이렇게 멋진 센스를 부린단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 기분을 알아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어차피 지금은 못 먹는다고.”
그러면서도 웃음기가 서린 투정을 내뱉고야 만다. 너라면 내 투정을 받아줄 지 알고 있으니까. 그 날은 손에 쥔 쿠키가 너무 따뜻해서, 너무 포근해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가 쿠키를 받은 것을 언제 봤는지 주임이 내게 이거저거 마실거나 먹을 것을 들고 오며 내게 치근대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팀 내에서 겉돌고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챙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묘한 끈적거리는 느낌이 피부에 닿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누구에게 말도 못할 스트레스가 다시 몽글몽글 쌓이고 있었다.
그 날은 비가 왔다. 하필 생리도 같이 찾아왔다.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짜증을 눌러 담아 강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말은 같이 노는 날이었으니까. 그런데 강휘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속적으로 세 번의 전화를 걸었다가 핸드폰을 침대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정하가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허이구, 언니야. 강휘 오빠 전화 안 받는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짜증을 내냐?”
“내가 뭐!”
“아냐. 에휴, 그래 오늘 첫 날이든가?”
“……그래.”
“안 아프니?”
“그냥 욱신거리는 정돈데.”
“그래도 그 정도면 축복이네. 잠깐 누워봐.”
내가 누워서 팔로 눈을 가리고 있자 정하가 와서 배 아래를 문질 거려줬다. 그렇게 좀 있다가 괜찮아지는 것 같아서 컴퓨터에 앉아서 던파를 하던 중에 강휘가 왔다. 뒤를 돌아 반기려다가 왠지 얼굴을 보면 짜증을 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그 날이라 그런 것이리라. 강휘는 오자마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슬쩍 가까이 가봤더니 술에 쩐 냄새가 났다. 어제 한창 달린 모양이었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 날은 강휘가 일어나고 나서 결국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강휘가 전화 몇 통 안 받았냐고 짜증내냐는 말에 아니라고는 했지만 사실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생리하냐고 대놓고 물어본 건 강휘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친해도 이제 그런 말은 대놓고 안 해도 되잖아. 바보.
그 날 강휘가 너무 힘들어보여서, 그리고 나도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강휘를 빨리 돌려보냈더니 다음 날 강휘에게서 메세지 한 통이 왔다.
[미안. 뒤질 듯. 약속 취소.]
술병이 난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서 한달음에 강휘네 집을 찾아갔다. 강휘네 집에 도착하자 강휘네 누나랑 어머니께서 날 반겨주셨다.
“어머, 정원이 왔구나. 강휘 깨울까?”
“아, 아니에요. 강휘 아픈 거 같아서 왔어요.”
“어휴, 기특하기도 하지. 벌써 제 남편 챙기고.”
“그런 거 아니에욧!”
강휘네 어머님께선 정말 친절하고 성격 좋으신 미인분이시지만 그래도 정말……, 주책이시다.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걸 들키진 말아야지. 방에 들어가니 강휘는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와서 닦아주고 있노라니 전에 이곳에 왔던 것이 생각났다. 그 때도 상황이 비슷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땐 내가 사과하러 온 거였지만, 그래도 강휘가 쓰러져 있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못난 남동생을 챙겨주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강휘가 일어나고 나서 녀석은 퍽이나 부끄러워했다. 예전부터 내 앞에서 토악질이라곤 뒤지게 해놓고 갑자기 왜 그래? 그랬더니 그제야 진정을 한다. 문제는 그러고 나서 누나모드가 너무 길게 지속됐다는 점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강휘에게 아,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앙을 해주고야 말았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진짜로! 너무 부끄러워서 집안을 방방 뛰다가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 어머님과 누님을 바라보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강휘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강휘가 나를 다시 놀려댔다. 참을 수 없어서 다시 나왔다가 누님에게 결국 붙들렸다.
“왜 그래?”
“아니, 아니, 아니에요.”
“음, 강휘가 뭐 했어?”
“아니에욧!”
나도 모르게 빽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나도 아차 싶어 입을 가리는데 누님은 전혀 화가 난 기색이 없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휘도 그렇고 이 집안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는 걸 정말 잘한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진정하게 만들어준다.
“그, 죄송합니다.”
“응? 뭐가?”
“갑자기 소리 질러서요.”
“아. 난 또 뭐라고. 괜찮아. 그래, 이제 좀 진정 됐니?”
“네,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가 좋아. 죄송은 무슨.”
나는 그렇게 누님께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강휘방으로 들어갔다. 강휘가 놀릴 걸 대비해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들어갔더니 다른 방법으로 내 멘탈을 건드렸다.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을 정리해서 내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강휘가 조심조심 하면서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더 심한 소문도 돌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강휘가 묘한 말을 했다.
“그, 혹시 금요일 날 나 회식하러 갈 때 남자는 누구냐?”
“왜?”
나도 모르게 감정이 메말랐다. 무서웠다. 강휘가 그 질문을 하는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그게 너무 무서웠다. 너마저 그러면 안 돼. 제발 부탁이야. 그런 감정이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다행히도 강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요새 도는 소문이 남자 얘기가 나오니까. 괜히 그 남자가 문제가 된 게 아닌가 싶어서.”
“아? 아, 그래?”
나는 안도했다. 강휘는 어디까지나 소문의 연장선으로 그 남자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면 뭐든지 해주려고 하겠지. 넌 그런 친구니까. 그래서 나도 미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상사야 상사. 인포팀 관리하는 사람. 총무과 주임! 아니 시발 돌겠네. 왜 그런 소문이 돌지?”
“글쎄.”
“넌 알잖아. 내가 남자랑 그렇고 그렇게 되는 게 말이 되냐?”
“그거야 딴 사람들은 모르니까. 뭐, 그 사람이 음료수 같은 거 하나씩 챙겨줘서 그런 거 아닌가?”
그 말을 강휘가 뱉으니 뭔가 억울해졌다. 주임이 내게 음료수 같은 걸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날’ 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치면 니가 시작이지!”
“어?”
“니가, 전번에, 나한테, 쿠키 준, 그, 날부터, 그런, 선물공세가, 들어온다고!”
“아, 아.”
강휘가 당황해하며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잡았다. 강휘는 당황할 때, 그리고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할 때 뒷목을 잡는다. 이번엔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뒷목에 손이 간 것이리라. 곧 강휘가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뭐.”
그러자 나도 괜히 미안해졌다. 네가 미안해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날 나는 정말로 기뻤으니까. 네 선물이, 네 쿠키가, 네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참지 못한 말이 분위기를 흔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러워하며 묘하게 달콤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가슴 한 편이 울렁거려서 싫다. 좋냐 싫으냐를 정하라면 분명히 좋은 감정 쪽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가 간질간질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커트했다.
“아무튼 간에! 그 사람도 그냥 힘내라고 준거야.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서 있는 모습 보기 좋다고.”
“그, 그래.”
그렇게 서로 의미 없는 말을 나누다가 강휘는 내게 이제부터 어찌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방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자. 그 외엔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알았다면 이미 썼겠지.
강휘는 그런 나를 보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힘내라, 힘내라, 힘내라. 그런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 누님한테서도 느낀 거였지만, 이 집안사람들은 정말 머리를 잘 쓰다듬는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너무 포근해져서,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열심히 했다고, 내 노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그만 너에게 기대고 싶어지고야 만다.
“수고했다.”
“응.”
나는 목이 메지 않게 감정을 매어, 간신히 입을 연다.
“하여간에 나는 이럴 때 열심히 하는 법 말고는 모르니까.”
“그래.”
“솔직히 좀 힘들었는데 너한테 말하니까 좀 풀리는 기분이고.”
“잘 됐네.”
“뭐, 그래도 너한텐 말 못하는 건 있지만.”
그러자 강휘가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던 강휘의 손을 가볍게 때내고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됐어. 이걸로 충분해.”
강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휘야. 나는 도저히 너에게만은 말 할 수 없어. 처음 한 직장 생활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네가 너무 부러워서, 질투 나서, 그에 반해 나는 하염없이 하찮게 보여서, 그래서 너한테 자격지심을 느낀다고는, 너에게만은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기댈 게 너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너에게만은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그러니까 더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 납득하지 못했는데도, 그냥 그렇게 고개를 끄덕여 줘서 고마워.
그렇게 몸이 아픈 강휘를 병문안해주려던 나는 그만 강휘에게 위안을 받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아픈 애 찾아가서 정작 내 멘탈 케어를 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음엔 강휘에게 좀만 더 잘 해주자라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만의 비밀이다.
[작품후기]1부 살짝~ 50화까지의 정원이 side입니다. 아마 막간은 2~3화 정도로 구성되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엔 그냥 중요한 장면만 빼서 쓸까 했는데 이게 쓰다 보니 묘하게 재밌어서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 사족을 붙이게 되네요. 역시 관찰자 시점보단 주인공 시점이 편하긴 합니다. 강휘보다 정원이가 더 귀엽기도 하고.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