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66화 (66/138)

66회

chapter2나는 재성선배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재성선배가 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오래 전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정원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을 들고 내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정원이는 키가 작았다. 작아졌다. 나는 키가 컸다. 원래도 정원이보다 컸다. 그러니까 정원이는 낑낑거리며 까치발을 들고 내게 안기듯이 기대면서 내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야, 나 팔 아파. 고개 좀 숙여봐.”

“어, 야.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왜?”

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물도 어느새 쏙 들어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정원이와 재성선배를 한 번씩 돌아보며 정원이의 팔을 내렸다. 정원이는 내 눈길을 따라가서 재성선배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나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하아, 야. 나는 이미 각오했어. 쪽팔린 거 각오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왜. 너는 눈깔 뒤집어져서 지르고 봤는데 이제 정신 차리니 개 쪽팔리냐? 강휘야, 나는 너보다 수십만 배는 먼저 정신 차렸어.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고개나 숙여.”

“뭐? 아니, 하아.”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정원이도 얼굴이 빨갰다. 부끄러움을 고통으로 정산할 수 있으면 난 지금 당장 수치사 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정원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뭇거리고 있자니 정원이가 단호하게 다시 말을 뱉었다.

“숙여.”

“예.”

포기했다. 부끄럽다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냥 함께 부끄러워하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정원이는 화를 풀어내듯이 억세게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어휴, 이 문디새끼, 진짜. 내가 이걸 친구라고 에휴.”

“야, 야! 야! 아파! 아프다고!”

“뭘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이야. 남자가 돼가지고.”

“아니, 하아. 씹.”

마법의 말이었다. 정원이가 내뱉기에 수십 배의 힘을 가지는 단어. 남자. 할 말이 없었다. 정원이도 이미 숱하게 걸어와서 알고 있는 그 길. 가오의 길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얌전히 정원이의 억센 손길을 받아들였다.

평소 같으면 투덜거리기라도 했겠지만 오늘 내가 싸질러 놓은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투덜거리다가 혹시라도 정원이가 ‘아프냐? 난 더 아팠다.’ 한 마디만 하더라도 유죄 확정. 더 이상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정원이는 내 얼굴을 제가 원할 정도로 닦아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재성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휘 좀 빌려도 괜찮을까요?”

“헛! 예. 편하실 대로!”

“따라와.”

정원이가 눈을 흘기며 매섭게 말했다. 모자란 동생을 대하는 태도라 묘하게 거슬렸으나 나는 얌전히 정원이를 따라갔다. 재성선배가 멀어지고 주위에 아무도 없을 쯤까지 걸어가고 나서 정원이가 나를 째려봤다.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니 선배, 그러니까 어, 재성선배?”

“어.”

“재성선배 말하는 거 다 들었지.”

“뭘?”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정원이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성을 냈다.

“아 따가!”

“이 화상아! 니 선배도 너한테 나에 대해 뭐라고 하디. 어?”

나는 맞은 등을 손으로 문지르고 싶었지만 정원이가 때린 곳이 너무 환상적인 위치였다. 즉 손이 닿지 않았다. 내가 허우적거리자 정원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지가 때린 곳을 문질러줬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기였다. 정원이가 내 등을 문지르며 탄식하듯이 내뱉었다.

“에이구, 이 웬수야. 니 선배가 나보고 니 여자친구라 안 카든?”

“아.”

그제야 재성선배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네 여친 아니야? 여친하고 얘기 안 해봤어?’

아, 나는 그 때 정원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서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 때 나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경악하자 정원이가 다시 내게 눈을 흘기며 이를 갈았다.

“그.래.서! 저 선배 앞에서 저를 책임진다고 까지 지껄인 한강휘씨는 대체 무슨 행동을 하실 작정이신가요?”

정원이는 기분 나쁠 정도로 예의바르게 내게 한 자 한 자를 씹어내며 말했다. 단호함과 엄격함이 그 속에서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그 창을 마주했다. 정원이를 마주봤다. 내 등을 쓸어주느라 정원이가 눈앞에 있었다.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말하기 편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가 말을 내뱉었다.

“응, 그래. 정원아.”

“뭐야, 진지 빤 얼굴로.”

“우리 사귀자.”

“어?”

정원이는 눈이 똥그래졌다. 그래서는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그 이상 더 빨개질 구석이 있었는지 건드리면 피가 나올 것 같이 새빨개진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딸꾹.”

“아니, 야. 아, 내가 말이 너무 짧았다. 그, 사귀는 척을 하자.”

“딸꾹! 헷?”

정원이의 눈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그 정도로 놀랄 일인가 생각했다가 역시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 놀랄 일이었다. 떠올리면 나도 수렁에 빠질 것 같았다. 의식하면 끝도 없이 의식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한 말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평소 같이 어투로 소리를 냈다. 아니, 사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것뿐이었다.

“사실 정원이 니랑 사귄다고 대부분이 짐작할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시간을 두고 좀 니가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재성선배 반응을 보니까 너랑 나랑 사귄다고 이미 확정하고 있는 것 같고, 거기다가 내가 너한테 울면서 책임진다고 했을 때도 옥상에 재성선배 말고도 몇 명 있었고, 그리고 또, 어? 정원아?”

정원이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치켜올리자 두 눈엔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죽어.”

“뭐?”

“죽어! 죽어! 죽어!”

정원이가 나를 진심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원망이 서린 주먹질과 발길질이 나를 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막았다가 정원이가 잘못 때렸다간 도리어 다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정원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정원이가 바둥거리면서 발길질을 하며 내게 화를 냈다.

“너는! 진짜! 나쁜! 놈이야! 어! 죽어! 그냥 죽어! 그냥 죽어어어!”

“아니, 아. 미안, 야, 진짜 미안. 내가 잘못했다. 어? 내가 죽일 놈이다. 어?”

“죽일 놈인 줄 알면 이 손 놓고 그냥 죽어!”

정원이가 진정하기까지 10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정원이는 간신히 진정을 했다. 굳이 말하면 힘들어서 색색거리느라 강제로 진정 당했다. 눈빛에 살기가 어린 것을 보니 그다지 진정한 것도 아닌 듯 했다. 정원이의 눈빛처럼 목소리도 살기가 가득했다.

“한 대만 더 맞아.”

“야, 나 아까도 뒤질 뻔 했어.”

“그래서, 여자애한테 구라로 프로포즈까지 해놓고 이 정도 부탁도 들어주지 않으시겠다?”

“하아니, 이럴 때만 여자애냐?”

“그럼?”

정원이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분노에 몸을 실어 되는대로 말을 주워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내가 오늘 정원이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면 죽을 때까지 맞아도 쌌다. 나는 인정했다. 우리 정원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내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내밀고 있자 이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이 빙시새끼 진짜.”

“때려. 왜.”

“됐다. 김 빠졌어.”

눈을 뜨자 이번엔 정원이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상태로 턱에 손을 올리고 묘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정원이에게 못다 한 얘기를 이어서 했다.

“어, 연인 행세라고 해야 하나. 일단은 누가 물어보면 부정하지 않고, 그냥 어, 너희 부모님 앞에서 한 거처럼? 그렇게 하자고. 기한은 누군가 회사를 나가게 되거나 혹은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정원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뜨고 나에게 물었다.

“나한테 너무 손해 아니야?”

“왜?”

“나 솔직히 애인 못 사귈 거 같아. 적어도 한동안은. 솔직히 여자를 봐도 남자를 봐도 음, 잘 모르겠어.”

“여자도 그래?”

“모르겠어.”

정원이는 쓸쓸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달싹거리다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야, 다정원. 나 모쏠이야 모쏠!”

“뭐?”

“니가 뭐 사귀니 못 사귀니 한다고 난들 사귀겠냐? 아서라. 나 1년만 있으면 마법사 전직이야.”

“뭐? 하. 하하. 하하하하.”

정원이는 점점 웃음을 실없이 내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모르시나본데 댁은 이미 마법사고 1년 지나면 그냥 계란 한 판 아저씨에요.”

“뭠마? 야! 나는 아직 29살이야! 그리고 외국 나이로 치면 아직 27살이야! 이십대 후반이라고!”

“누가 뭐래? 1년 지나면 계란 한 판이시라고.”

“너는 뭐 씹 다르냐?”

정원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씁쓸한 웃음은 어디가고 어느새 의기양양한 기색이었다.

“이 몸은 올해로 28살이시다. 내년에도 29살이야. 아직 20대 후반이지. 알겠냐? 아니지. 알겠어요, 오빠아?”

“아, 하지마라.”

“아잉, 오빠도 참 내년부턴 아저씨라고 부를 거에용.”

“흐즈믈르그.”

정원이가 깔깔대며 웃었다. 방금 실없이 웃은 것과는 달리 진심으로 즐거워서 웃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나도 같이 웃을 것 같아서 억지로 인상을 쓰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여간에, 어차피 인포도 다 박살났겠다, 너 원하는 부서로 옮겨줄 거고. 연인행세도 하면서 너 최대한 실드칠거야. 니 좆같은 소문도 아버지 통해서 지우고 있는 중이고, 한동안은 내가 이사 아들이라는 소문이랑 쫓겨나간 사람들 소문이 돌 거니까 그렇게 알아.”

정원이는 내가 말하자 웃음을 멈추고 너무 웃어서 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게 니가 생각한 거야?”

“어.”

“하여튼 간에.”

눈가가 부드럽게 휘고,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숨이 멎을 만큼 다정한 미소였다. 햇살이 비추는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정원이는 천천히 입을 열어 짓궂은 어조로 속삭였다.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까.”

“뭐? 무슨 말이야?”

“됐어, 안 말해줄 거야. 돌아가.”

정원이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걸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정원이를 쫓아가서 손목을 잡고는 물었다.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직 정원이가 대답해주지 않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야, 너.”

“왜?”

“너, 하아. 너 회사 그만두지 않을 거지?”

“으음. 글쎄?”

정원이는 고민하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속을 태웠다. 정원이는 턱을 잡고 한참을 그런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다가 다시 빙글 돌아 나를 마주보며 말했다.

“1일 째야.”

“뭐?”

정원이가 개구쟁이 같이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내비쳤다. 노란색 수선화가 햇살을 받은 채로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부터 우리 1일째라고. 구라지만.”

“뭐, 하아.”

안도의 한숨이 가장 깊은 곳에서 부터 흘러 나왔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자 정원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손을 마주잡았다. 정원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자, 이제 같이 고개 숙이러 가자.”

“그래. 그러자.”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싸질러 놓은 똥을 뒤처리 할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재성선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재성선배는 퉁명스럽게 여자친구랑은 화해를 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씨익 웃으며 ‘그래 보인다. 다행이네.’ 라고 말했다. 우리는 재성선배의 눈길이 닿은 곳을 바라봤다. 우리는 두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들짝 놀라 손을 뗐더니 재성선배가 식은 눈으로 무슨 어린애들이냐고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정원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에게 보이는 건 또 다른 의미였나 보다. 하긴 나도 그랬다.

인사과에 내려와서 과장님께 고개를 숙였다. 특히 정원이가 더 죄송스러워 했다. 회사를 나갈 기색으로 사표를 던지고 갔다니 그 때의 모습을 짐작할 만 했다. 인사과장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표? 그런 건 받은 적이 없는데. 재성아! 오늘 사표 받은 거 있냐?’ 라고 재성선배에게 큰 소리로 물으셨다. 재성선배 역시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인사과장님께선 내 어깨를 툭치며 앞으로 잘하라고 하셨다. 들은 건 난데 옆에서 정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썰이나 풀어보라는 말에 내가 모자랐던 부분을, 특히 정원이에게 상처가 될 만했던 것을 중심으로 준비했던 것을 적당히 각색하여 풀어냈다. 야유와 함께 인사과장님께 등을 한 대 맞았다.

“우리 마누라였으면 임마! 바로 이혼이야!”

할 말이 없었다. 하필이면 재성선배가 깐족거리며 정원이한테 울면서 프로포즈를 했다가 까였다는 소리를 했다. 이런 개 시발. 좆같은 거. 정원이의 얼굴이 빨개지고 결국 고개를 수그렸다. 잘 익은 벼는 겸손을 가르친다고, 오늘이 제대로 겸손을 배우는 날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성선배가 그 말을 하고 나서 몇몇이 와서 나에게 위로를 해줬다. 필요 없는 참견이다.

그렇게 되고 나서 사장님께 연락을 넣고 사장님께 찾아갔다. 사장님께선 나를 반겼다. 정원이는 비서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장님께선 어차피 니 여자친구 어떻게 할 건지가 궁금한 게 아니냐며 데려와서 얘기하자고 하셨다. 곧 정원이가 들어오고 나서 사장님께선 내게 물으셨다.

“이번에 한강휘 자네가 한 일이 참 많아.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나는 그 질문에 나는 승진도 월급인상도 그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다만 정원이가 원하는 부서로 가게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사장님께서 정원이에 대해 조금 더 신경써주시어 나쁜 소문이 돌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사장님께서 너털웃음을 치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다.

“이사 아들놈 애인을 누가 건드려 이 멍청한 사람아!”

사방팔방에 우리 사귑니다라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혈액이 돌게 되면 건강에 좋아진다는데 정원이도 나도 오늘 적어도 십 년은 수명을 번 것 같았다. 사장님께선 정원이에게 가고 싶은 부서가 있느냐고 물었다.

정원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 마케팅 관련해서 갈 수 있는 부서가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께선 바로 전화기를 누르더니 누군가를 호출했다. 곧 사장실 문이 열렸다.

“흐익.”

정원이가 몹시 놀라며 숨을 들이 삼켰다.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정원이는 더욱 아는 얼굴이었다. 이전회사에서 정원이를 가르친 정원이의 직속상사 서다혜씨였다. 정원이를 한참 매섭게 가르치시다가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고 들었는데 그 회사가 우리 회사였던 모양이었다.

서다혜씨라면 성격은 시원시원한 미녀지만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깐깐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서다혜씨의 출현은 정원이에게 실시간으로 트라우마 스위치를 올려버리는 트리거인 모양이었다. 정원이가 고양이 앞에선 쥐 마냥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어. 홍보팀장. 이 인원 오늘부터 자네 부서에서 데려가서 잘 가르치게.”

“뭐야. 한강휘잖아? 너 인사과 아니니? 너 우리 부서 온다고?”

“아닙니다. 제 옆에 있는 그, 정원이가 홍보팀으로 들어갈 겁니다.”

“정원이? 다정원? 그 덩치가 어디 있는데?”

홍보팀장님도 나라는 존재 때문에 이전의 정원이를 연상하고 있었다. 정원이가 신입으로 전에 있는 회사에 들어갔을 때, 나는 정원이의 일을 잠깐이나마 도왔었고, 홍보팀장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있었다기보다 직접적으로 나와 정원이를 갈아버리던 사람이었다.

“아, 이 아가씨 이름도 정원이야? 성은 뭐에요?”

“그, 다 씨입니다. 다정원이에요.”

“와, 내가 아는 누구랑 이름이 똑같네요. 다씨가 그렇게 흔한 성씨도 아닐 건데. 아 어차피 우리 팀일 건데 말 놔도 되지?”

“네에.”

홍보팀장님이라고 해도 정원이를 이 전의 다정원이라고 눈치 채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누구라도 그런 연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원이는 그 자리에서 홍보팀으로 끌려갔다. 지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 꽤 좋아하는 일이면서도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는 것 같았다.

사장님께선 내게 자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보상은 주어져야 한다며 넉넉하게 보너스를 챙겨주셨다. 그러면서 정말로 원하는 게 없냐고 물으셨다. 나는 사장님을 바라보다가 속에 담아두고 있던 다짐을 내뱉었다.

“하나 부탁드릴 수 있다면 저를 총무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총무과?”

사장님께서 놀라며 반문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예. 인사과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추가로 제가 공개적으로 총무과를 너무 두들겨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야할 것 같습니다.”

“힘든 길을 걷는구만.”

“예.”

“뭐, 자네가 원한다면 좋아. 총무과 주임 자리가 비긴 했으니까. 그 자리로 가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생각해둔 말을 계속 내뱉었다.

“총무과 주임이라는 자리 자체가 인포팀을 관리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인포팀도 없는데 주임 자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참에 주임이라는 직급도 없애고 총무과로 가겠습니다.”

“허. 그래? 좋아.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사장님께서 바로 전화를 걸어 총무과장을 불러왔다. 총무과장은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사장님께서 이어 하신 말씀을 듣고는 죽상을 지었다.

“이 녀석 이제부터 총무과에 데려가서 쓰게. 바로는 아니고, 한 세 달 뒤에 가겠군. 한강휘 너는 네 자리 대신 할 녀석 인사과장이랑 해서 뽑아. 면접하는 법까지 인사과에서 다 해봐. 그리고 네 업무 인수인계 하고 나면 총무과로 인사이동 시켜주지.”

“예, 알겠습니다.”“예, 알겠습니다.”

총무과장은 주저하면서도 사장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께서 나와 총무과장을 돌려보냈다. 총무과장님께선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총무과에 들어왔나?”

“제 입장에서 회사 내부에 있는 일은 여러 가지 배울수록 좋습니다.”

“후, 그래?”

총무과장님께선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아. 대신 총무과로 오게 되면 빡세게 굴릴 테니 그렇게 알아.”

“예, 알겠습니다.”

이는 내가 바란 결과였다. 정원이는 인포팀에서 자신의 적들과 함께 일을 해왔다. 나는 인사과에서 승승장구하며 슈퍼 루키마냥 일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뭐라도 된 냥 느꼈을 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내게 벌을 내렸다. 사장님께서 내게 무언가 보상을 해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이번에 해놓은 성과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리 다짐했다. 사장님이 원하는 게 무어냐고 물었을 때 내가 가장 힘들만한 부서, 총무과로 가게 해달라고 말하자고.

이는 가장 힘든 환경에서 버텨왔을 정원이에 대한 작은 속죄였다. 정원이는 무슨 멍청한 짓을 하겠냐고 타박을 주겠지만.

정원이가 타박을 주는 모습을 상상하니 이상하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에 벌써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몸에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지만, 오늘은 끝나고 나서 꼭 정원이가 보고 싶었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작품후기]이상하다? 나는 어제? 2부를? 끝냈을 텐데?

어... 2부 후일담입니다. 막간으로 올릴까 했는데 이거까지가 왠지 2부인 것 같았어요. 3부 시작에 달기도 영 지저분할 것 같았고. 막간은 정원이 시점에서 바라본 2부가 될 예정입니다.

매 번 부족한 점이 많은 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소중한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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