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회
chapter2사장님께 모든 과정을 허락받았다. 정확히는 모두 내 재량 것 하라고 하셨다. 백지수표를 받은 셈이었다. 추가로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비서실장을 통해 전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회사 내에서 가장 힘이 센 호랑이를 등에 업은 순간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비서실장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인포팀에서 김가은씨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어디로 부르면 되겠습니까?”
“혹시 아무도 오지 않을 만한 공간이 있습니까?”
“예. 저희 과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존댓말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불편합니다.”
그러자 비서실장님께서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셨다.
“지금 한강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사장님 대리십니다. 오히려 한강휘님께서 저를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 다른 자리에서 뵐 때는 그 때에 맞게 대할테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자 비서실장님께서는 나를 비서실로 안내하셨다. 비서실 역시 부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비서실 안에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비서실장님께선 그곳으로 나를 안내하셨다.
“아, 혹시 인사과에 연락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자리 위에 있는 전화기로 인사과에 연결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비서실장님이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문을 나가셨다. 혼자가 되자마자 바로 인사과에 연락을 넣었다.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바로 사장실로 갔기에 인사과에서도 내 행적을 알 턱이 없었다. 인사과장 자리에 전화를 넣자 인사과장님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는 바로 본론을 말씀드렸다.
“과장님 저 오늘 사장님이 개인적으로 시키신 일이 있어서 인사과에 못 갈 것 같습니다.”
[알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냐?]
“어, 말하기 좀 곤란합니다. 사장님께서 허락하시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됐다. 됐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확실하게 처리하고 와.]
“예, 알겠습니다.”
[그거랑 별개로 인사과 오면 나랑 얘기 좀 하자.]
“예, 알겠습니다.”
[……좋아. 내일 보자.]
“예, 고생하십시오.”
전화를 끊자마자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끝내주는 일처리 능력이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했다.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비서실장님께서 김가은씨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김가은씨는 비서실장님의 호출에 조금 긴장한 얼굴을 했다가 내 얼굴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비서실장님께서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문을 나서자 경악했다. 나는 비서실장님을 대하던 태도 그대로 예의를 갖춰 맞은편에 의자를 끌고 와서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하세요? 앉으세요.”
“어, 예.”
김가은씨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긴장을 했는지 행동 하나하나가 경직된 모습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띄고 있자 김가은씨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한강휘씨? 인사과? 맞죠?”
“예, 맞습니다.”
“음, 혹시 방금 비서실장님과는.”
“아,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도록 하죠. 지금부터 제가 할 제안에 대해서 잘 생각하시고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얼굴을 싹 굳혔다. 그리고 이후로는 내가 할 말만을 하며 대답을 촉구했다. 과정은 별로 길지 않았다. 나는 법적으로 저촉되지 않는 정도에서 충분한 정보를 이끌어 냈으며 상호간의 합의를 마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았다. 내가 자료를 제시할 때 마다 김가은씨는 사시나무 떨 듯이 온 몸으로 반응을 해주었고, 나는 흐름이 내게 기울었음을 인지했다.
취조에 가까운 사실 확인과 제안이 끝나고 김가은씨는 방을 나갔다. 나가는 길에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더니 등을 90도로 굽히고 서둘러 도망갔다. 김가은씨는 내 등에 업힌 호랑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권력을 등에 업은 짜릿하고 구역질나는 이 기분이란.
김가은씨와의 대담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기분이 들었는데 정작 핸드폰을 바라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방을 나서니 비서실장님이 계셨다. 나는 비서실장님께 식사는 따로 하자고 말씀드리고는 비서실을 나섰다.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인포에서 정원이가 있었다. 그리고 총무과 녀석이 여전히 정원이에게 찝쩍거리고 있었다. 어제 분명히 정원이가 대놓고 쪽을 줬다고 하지 않았었나? 정원이가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긴 어제 정원이만 미친년을 만들어 놨으니 자신이 찝쩍거리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원이는 총무과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무시하고 있었다. 총무과 녀석은 정원이에게 정신이 팔려서, 정원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내가 데스크로 다가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일은 다 용서해준다니까요? 정말로 한강휘씨랑 사이 들켜도 되겠어요?”
“예, 됩니다. 맘대로 하세요.”
나는 다가가서 녀석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원이와 녀석이 순식간에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정원이에게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정원이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경악했다. 나는 정원이쪽으로 다가가서 총무과 녀석을 무시하며 정원이에게 말을 걸었다.
“야, 다정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야, 너 미쳤어?”
“아니 뭘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는데 미쳤니 뭐니 그러냐. 아 왜. 바꿔줄 사람 없냐? 그럼 마음 넓은 ㅎ, 아니 오빠가 기다려준다.”
“아니, 너, 하.”
정원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이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평소처럼 자신을 대하는 것에 대해 곤란해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총무과 녀석을 대할 때보다 더욱 난처해하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은 괴롭힐 때가 제일 즐겁다. 반응이 다채로워서 찔러볼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정원이를 놀리며 정원이는 골치 아파하고 있는 평소의 거리감을 나는 일부러 보란 듯이 과시하고 있었다. 과연 총무과 녀석은 바로 미끼를 물었다.
“역시 사귀고 있었군요? 하, 이것 참. 신입 둘이서 사내 연애한다고 소문이 퍼지겠네요.”
“지, 아. 방금 제가 말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립니까? 예, 됩니다. 맘대로 하세요.”
지랄하네라는 욕지거리를 겨우 참아내고는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얼핏 바라본 정원이는 나를 눈빛으로 쏴죽이고 있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나는 정원이를 무시하고 총무과 녀석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정원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자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가다듬고 진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필이면 녀석을 바라봐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교과서에 나올 만한 완벽한 표정을 보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비열함’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사전에 저 표정을 담으면 완벽한 교보재가 되리라. 녀석은 나를 노려보다가 내가 태연한 기색으로 바라보자 정원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스산하게 지껄였다.
“절 고르지 않은 걸 정말로 후회하시게 될 거에요, 다정원씨. 오늘 일은 모두가 알게 될 거에요.”
“읏!”
정원이는 자신을 향한 적나라한 악의 어린 말에 몸을 움츠렸다. 나는 슬그머니 정원이와 녀석의 사이에 섰다. 그리고는 명함을 모아 놓은 파우치를 꺼내 녀석에게 명함을 건넸다.
“뭡니까?”
“뭐긴 뭡니까. 소개지. 저번부터 이름도 말 안 해주시 길래 명함이라도 교환하면 될까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명함 받을 수 있습니까?”
“하!”
녀석은 이번에도 나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차피 이미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본인의 입에선 들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라. 익숙한 감정이었다. 나는 후회를 친구삼아 항상 나를 돌아보고는 했다. 녀석에게도 후회가 얼마나 무거운 감정인지 알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녀석이 사라지고 뒤를 돌아 정원이를 바라보니 정원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총무과 녀석이 했던 자세 그대로 책상에 팔을 올려두고 정원이에게 말했다.
“뭘 그리 두리번거려? 뭐 잘못한 거 있냐?”
“너! 으.”
정원이는 주위를 신경 쓰느라 차마 소리는 지르지 않고, 입만 움직여 소리 없이 말했다.
‘미쳤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뭘 들켜. 됐어. 너도 슬슬 힘들었잖아.”
‘그치만, 너는 괜찮아?’
“에휴, 세 번째로 말하는데. 예, 괜찮습니다. 말하고 다니셔도 됩니다.”
“아니, 하아. 됐다. 걱정하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야.”
“그래, 너 바보 맞아.”
“아니 씨, 진짜 너!”
정원이와 투닥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동안 많은 시선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오히려 보란 듯이 정원이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인포데스크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시시덕거리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은 태도였으며, 눈살을 찌푸릴 만한 행동이었다. 나는 그것을 인지하고서도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사회의 평가보다 당장 정원이의 멘탈이 더 중요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교대인원이 오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뒤져 방금까지 봤던 사람의 이름을 찾았다. 김가은씨. 그래. 김가은씨에게 가벼운 문자 한통을 넣고 정원이를 놀리듯이 말했다.
“야, 넌 친구도 없냐? 대체 식사를 얼마나 짧게 하는 거야?”
“……너뿐이거든 이제.”
“……미안.”
정원이가 입을 쭉 내밀고 툴툴거리며 뱉은 대답의 무게는 생각보다 굉장히 무거웠다. 정원이가 원래부터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는 그 꼴이었고, 원래 회사에서 알고 지내던 동료들에게도 현재 사정을 설명하긴 어려웠고,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됐거든? 원래 아싸니까 괜찮다고.”
이미 완전히 기분을 상한 어투였다.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바라봤다. 밖으로 나가서 식사를 하기엔 아슬아슬한 시간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오늘은 내게 주어진 자유의 총량은 방종이라고 여길 만큼 역겨울 정도로 많았다.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살게.”
“뭐. 저녁에?”
“아니 지금.”
정원이는 핸드폰을 슬쩍 들여 봤다가 경악했다. 얼굴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모습을 보니 저 녀석의 얼굴도 참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점심시간 30분밖에 안 남았어!”
“어, 그리고 아직도 네 식사교대는 안 나타나고 있지.”
“평소에는 이쯤이면 오는데.”
정원이는 말을 줄였다. 아마 총무과 녀석이 있었으니 하여간에 교대를 해준 것이겠지. 그래도 식사 교대 정도는 정시에 해줄지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정원이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음습한 새끼 같으니라고. 그 때 김가은씨가 왔다. 김가은씨는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고개를 숙일 대상이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가은씨는 바로 정원이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원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정원이의 반응을 보니 얼마나 생소한 행동이었는지 알 법했다.
“미안해요, 정원씨.”
“아니, 어. 오늘 교대가 분명히.”
“저에요. 저 맞아요!”
정원이가 이마를 찡그리며 쉬프트를 떠올리려 하자 김가은씨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라고 답했다. 정원이는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정원이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뭐, 어때. 정원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으음, 어. 그래.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아니요, 편하게 다녀오세요.”
“아, 그리고 1시간만 정원씨 좀 빌리겠습니다. 이유는 그쪽과 같은 이윱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비서실로 연락 달라고 인포팀에 전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비서실장님께도 관련 자료 조사로 인해 한 시간 정도 늦겠다고 말했다. 이미 관련 자료 조사 따위는 모두 마쳤지만 준비를 마쳤기에 오히려 가능한 행동이었다. 주차장으로 정원이를 데려와 차에 태우자 그제야 정원이가 참았던 감정을 토해냈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회사에서 모른 척 하기로 했잖아! 근데 은근히 말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데스크로 와서 말 걸고 친한 척 하면 어떡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봤는데, 아니 대체 뒤는 어떻게 할라 그래! 그리고, 가은 선배는 또 왜 갑자기 너한테,”
“워워.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정원이는 내가 말을 끊자 볼을 조금 부풀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평온하게 대처하기 어려운 그런 표정이었다. 내가 살짝 당황하는 동안 정원이가 고개를 돌리고 삐진 목소리로 흘리듯이 말했다.
“니가 산댔지?”
“오냐.”
“그럼 완전 비싼 초밥.”
“오냐.”
“어? 진짜?”
정원이는 내가 난처하기를 바라고 던진 말이었겠지만 나는 인터넷으로 비싼 오마카세 집을 검색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네비에 찍어놓고 운전을 시작하자 정원이가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정원이는 당황을 넘어 어이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너, 뭔. 허어.”
정원이는 넋이라도 나간 듯이 감탄사만 던지다가 결국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나는 그런 정원이에게 놀리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너 삐졌냐?”
“뭐? 아니거든? 안 삐졌거든?”
“근데 왜 고개는 돌리고 그러냐?”
“안 삐졌다고! 아나, 아니 니가 이상한 짓 해놓고 대답도 안 해주고, 그러면서 자꾸 놀리고, 어?”
“야야, 차 움직인다, 정신 사납다.”
“아오, 이걸 진짜!”
정원이는 성을 내면서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얼굴엔 삐진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힐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원이는 내가 웃을 때마다 점점 얼굴을 찌푸렸다.
“내리고 나면 두고 보자.”
“내리면 먹기 바쁠걸? 카드 내가 쥐고 있다?”
“하, 이 새끼, 하아아.”
가벼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평소와 같이 정원이와 투닥거리며 신경전을 하는 가벼운 분위기였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어깨 한 번 못 펴 본 너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고개를 치켜들고 내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싼 초밥집도, 네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먹을 맛있는 식사도, 모두 지금까지 힘을 낸 너를 위한 내 작은 선물이었다.
[작품후기]해결편에 들어섰네요. 강휘는 호랑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이제 뒤로 물러설 데는 누구에게도 없겠죠.
선작 500 감사드립니다! 근래의 목표였는데 달성이 되서 정말 기쁩니다.
그 외에도 항상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