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58화 (58/138)

58회

chapter2정원이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정하에게 미리 언질을 줘야할 것이 생각났다. 동시에 정원이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정원이쪽의 좌석을 손수 열어주며 정원이에게 말했다.

“우리 공주님 얼굴 좀 봅시다.”

그러자 정원이는 필사적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며 집으로 전력질주했다.

“너한테만큼은 절대로 안 보여줄 거야! 이 나쁜 놈아!”

나는 정원이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는 정하를 바라봤다. 정하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언니 달랠라고 해도 오빠 방식은 너무 섬세함이 부족해.”

“알아. 그리고 이번엔 달래려고 한 거 아니야.”

“그럼?”

나는 정하가 신뢰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진지한 자세로 말했다.

“오늘 일은 정원이한텐 숨겨줬으면 해.”

“왜?”

“확실한 시기에 확실한 수단으로 찌를 거야.”

“근데 왜 언니한텐 숨기는데.”

“그거야 저 녀석.”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연기 존나 못하잖아.”

“아항.”

정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정하는 돌아서는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대며 말했다.

“오래 숨기진 않을 거야. 언니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오래 숨길 필요도 없어. 이번 주 내로 끝장 볼 거니까.”

“그래? 그럼 됐고.”

정하는 그제야 웃으며 나에게 손을 저었다. 나 역시 손을 저으며 정하를 배웅했다. 정원이 좀 잘 챙겨주랬더니 당연한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한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덕분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아버지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기꺼이 받아들여주셨다.

“오늘 정원이 걔는 잘 보고 왔고?”

“어, 예. 아, 오늘 할 얘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 네 얼굴을 보니 할 말이 있어 보이는구나.”

아버지께서 소파에 앉으셨다. 나도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아버지께서는 내 말을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 조심히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 이번 인사과에서 프로젝트 마치면 아버지 아들인 거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눈을 감고 손가락을 턱에 댔다. 그리고는 어조의 변화 없이 평온하게 물으셨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요즘 회사 내에 떠도는 소문, 인지하고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래. 알고 있고 말고. 그래서 오늘 네가 나간 줄 알았다.”

“뭐 그것도 맞습니다만.”

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뜨셨다.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였다.

“네가 이사 아들이라는 것을 밝혀서 얻고자 하는 게 대체 뭐냐.”

“더 큰 가쉽거리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선 나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셨다.

“좋다. 네가 생각하는 걸 모두 말해 보거라.”

“괜찮습니까?”

그 말엔 두 가지의 뜻이 담겨있었다. 정녕 아버지의 이름을 내 마음대로 팔아도 되겠느냐,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가 낙하산으로 가지 않으려 할 때 지지해주셨던 마음을 배신해도 되겠느냐. 그 두 가지의 질문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온한 어조로 말하셨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지탱할 뿐이다.”

“……감사합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지지해주실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 행동에 합당한 명분이 있다면 아버지께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내 의견을 경청해 주실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입이 더욱 썼다.

내가 지금부터 사용할 방법은 내가 제일 혐오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가장 혐오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버지 역시 썩 좋아하시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것을 이제부터 아버지께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자기혐오에 발목을 잡혀있을 순 없었다. 아버지는 그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내 무엇을 보고 납득하신 지도 모르겠으나, 내 계획에 헛점이 있다면 그 부분을 날카롭게 찌를 분이셨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감으로 자괴감을 포장했다. 결전의 시간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모든 생각을 전달하자 아버지께선 내 의견에 동의하셨다.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 아버지의 평가였다. 아슬아슬한 합격이었다. 이제 난관을 해결하는 데까지는 단 한 개의 계단이 남아있었다. 바로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이 방법이 정원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임을 알았다. 정원이는 이미 스스로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해있었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무너져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조차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내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내가 도와줘야 정원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한강휘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원이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이 주장을 하는 한강휘는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대표여당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스탠스가 그저 지켜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 정원이가 그 녀석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그리고 오늘 그 자리에 나가서 흐느끼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안타깝지만 인정하고야 말았다. 정원이에겐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제 내가 혐오하는 방법을 사용해야했다. 나는 권력으로 개인을 찍어 누르는 것을 혐오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권력이라는 이름의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려 한다.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관습이라는 무기를 통해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식이었다. 자기혐오가 치밀어 올라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정원이를 내버려두는 것보단 나았다. 정원이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 역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최악이었다.

그래, 나는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정원이를 위해서라고, 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는 내 자신을 필사적으로 세뇌시키고 있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 하자.

마침내 나는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정원이가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원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밤이었다.

***

일요일이 되고 나는 몇 가지 준비를 했다. 아버지께선 내 계획에서 세밀함이 필요한 부분을 몇 가지 수정해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cctv를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cctv는 직원들의 근무태도를 찍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억지로 준비를 하더라도 큰 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가능한 이쪽이 책잡힐 일은 최소화하라. 그래야 더욱 견고하게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아버지께선 조언을 해주셨다.

나 역시 짧은 생각을 반성했다. 아버지께선 나의 위치를 최대한 이용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에 회사에 나갔다. 그리고 관련 자료를 준비하며 암기했다.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이제는 상대를 고꾸라트릴 가장 좋은 시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월요일에 출근을 하고 나서 인사과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앞으로 몇 개의 테스트가 더 필요했지만, 대략적인 업무는 끝난 셈이었다. 인사과장님과 팀장님, 그리고 재성선배와 눈빛을 교환했다. 뭔가 후련한 기분이었다. 과장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 인사과 회식 한 번 할까?”

“아직 일 안 끝났습니다. 과장님. 그리고 월요일입니다.”

팀장님이 과장님께 가볍게 주의를 줬다. 월요일부터 회식을 하는 부서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과장님도 농담을 한 것이었는지 어설프게 웃었다. 내가 입사하기 이전부터 장기간동안 지속되던 긴장감이 풀려있었다. 다들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직접 참여한 인원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원도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원래 모두가 평소에 해야 할 일들을 문제없이 서포트 한 사람들이었다. 업무가 과중된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 기념으로 인사과에서 점심을 다 같이 먹으러 나갔다. 가는 길에 정원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식사를 선번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서로 누가 잘했네 하며 서로 칭찬을 돌렸다. 술만 마시지 않았지 숫제 회식자리와 흡사한 분위기였다. 인사과장님이 식사를 마치고나서 주의를 집중시키고 말씀하셨다.

“자, 프로젝트 거의 끝났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예!”

점심식사를 기분 좋게 마치고 돌아와서 보는데 정원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동시간까지 포함하면 꽤나 긴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돌렸다. 준비가 될 때까지는 나도 정원이에게서 관심을 끊을 생각이었다. 정원이가 지금의 나를 보는 것이 싫었다. 이왕이면 일을 아예 마치고 보고 싶었다. 그렇게 애써 무시하며 일과를 마쳤다.

그렇게 이것저것 준비하며 보내던 일주일 동안 나는 눈으로만 정원이를 쫓았다. 그 동안 정원이는 더 자주 데스크에서 자리를 비웠고, 점점 더 힘들어보였다. 언제까지 정원이가 버틸 수 있을까? 정원이의 정신을 배팅하여 치킨레이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나는 정원이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정원이에게 내 계획을 모두 내뱉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반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목요일, 퇴근을 하자마자 정원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다정원 : 오늘 술 좀 같이 마셔주라. (대충 눈물 이모티콘)]

[다정원 : 제발]

[다정원 : 제발 (대충 눈물 이모티콘)]

굉장히 미묘하게 찌그러진 이모티콘이었다.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남자가 쓸 것 같기도 하고 여자가 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것은 이모티콘이 아니었다. 그 앞에 적힌 메세지였다. 금요일에 회의실로 와. 총무과 녀석이 정원이에게 지껄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답장을 했다.

[나 : ㅇㅋ]

어디로 갈까 했더니 정원이는 우리 집 근처를 찍었다. 술에 취한 정원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 근처는 안 됐다.

[나 : 근데 너 내일 출근 안하냐?]

[다정원 : 너도 출근하잖아.]

[나 : 걍 니 집 근처서 보자.]

[다정원 : 그 새끼 나타나잖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정원이의 의견에 승낙했다. 퇴근을 하고 약속장소에서 기다렸더니 정원이가 곧 나타났다. 정원이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화장을 새로 한 얼굴이었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체했다. 정원이가 먼저 말하기 전엔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왔냐?”

“어.”

정원이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울 것 같기도,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정원이가 무슨 말을 꺼낼지 가늠이 안 됐다. 정원이가 갑자기 ‘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면 모든 걸 말해버릴 것 같았다. 정원이가 저런 표정으로 물어보면 숨기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냥 소주를 정원이에게 따라줬다. 내 잔도 따르려하자 정원이가 내 손에서 병을 뺏어가서 내 잔에도 소주를 따라줬다.

“자작하고 지랄이야.”

“오냐, 고맙다.”

짠. 약속한 듯이 첫 잔을 원 샷하고 빈 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잔을 채우고 다시 짠. 다시 빈 잔이 두 개 생겼다. 다시 서로의 잔을 채운다. 정원이는 잔을 들었다. 이전에 술을 마시던 생각이 났다. 정원이는 힘들 때 이런 식으로 말없이 술을 들이키곤 했지. 이번엔 술잔을 마주하지 않았다. 나는 술잔을 내려놨다.

“그만하자.”

“왜?”

“너 더 마시면 쓰러져.”

“그래?”

정원이는 살포시 웃으며 술잔을 입가에 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미처 그 행동을 막지 못했다. 정원이는 빙긋 웃으며 빈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하아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이 살짝 풀려있었다. 잘 마셔봐야 소주 네 잔이나 마시는 놈이 연속으로 세 잔을 들이켰으니 당연히 취기가 올라올 만했다. 내가 정원이를 다그치려고 하기 전에 정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원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응, 이제 말할 수 있겠다.”

“나 오늘은 생리 날이었어. 나는 생리 휴가를 내고 싶었지만 참았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열심히 하려고 했어.”

“그런데 나는 오늘 혼자서 데스크를 봤어. 바꿔달라고도 해봤어. 그런데 항상 열심히 하자고 해놓고 벌써 포기할거냐고 하더라? 더 열심히 해보라고 하더라? 응,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어.”

“나는 오늘 어, 이건 좀 부끄럽네. 그, 음, 그 상태로 데스크를 봤어. 응, 정말 부끄러웠어.”

나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내가 더러운 수단을 사용한다며 자괴감에 빠져 고고한 자존심 따위를 지키고 있는 동안, 너는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있었다.

정원이는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정원이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 하나를 꺼내서 정원이에게 넘겼다.

정원이는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받지 않고 그냥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원이는 소주를 한 잔 더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정원이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작품후기]어제도 오늘도 시간이 조금씩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개가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강휘도 정원이도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얘기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 외에도 좀 더 언급할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좀 늘어지는 기분이 드네요.

오늘도 이런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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