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57화 (57/138)

57회

chapter2정원이의 표정이 점점 탈색됐다. 결국 무표정을 뒤집어썼다. 일부러 표정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정원이는 지금까지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 알아차리지 않으려고 했다. 필사적인 부정이었다. 다정원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껍질을 무자비하게 깨는 이가 나타났다. 다정원이 지금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지, 또한 신체적으로 어떻게 관찰되는지를 잔인하게 때려 박는 괴물이 나타났다. 정원이는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그것이 곧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원이 안에서 감정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자신과 상대의 사회적 관계, 그리고 나와의 싸움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 억누르고 있었다. 아주 간신히. 정원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주임님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저는!”

정원이는 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눌러 담았다. 무표정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얼굴에 금이 가고 있었다. 너는 원래 표정 관리를 잘 못하는 편이었다. 정원이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숙였다.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에 대한 감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주임님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요.”

“제 감정에 조금이라도 좋은 감정이 있다면 그렇게 잘라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줘요.”

“아니요. 싫어요.”

정원이는 딱 잘라 거절했다. 손이 베일 것 같은 단호함이었다. 총무과 녀석은 이를 꽉 깨물었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혹시 지금 남자친구 있어요?”

정원이의 가면이 무너졌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당황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질문에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그랬지만 정원이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하는 것에 서툴렀다. 정원이가 손을 저으며 어설프게 부정하려했다.

“아, 아니.”

“한강휘씨에요?”

“예?”

정원이는 이제 당황을 넘어서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 가설에 확신을 가진 총무과 녀석은 정원이의 비언어적 소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시 한강휘씬가보네. 왜요. 그 애송이는 되고 난 안돼요?”

“가, 강휘랑은 그런 사이 아니에요!”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휘랑은’ 이라는 명칭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네가 나에게 느끼는 친밀, 애정, 신뢰 그 모든 관계가 들어있었다. 눈치 없는 총무과 녀석조차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정도였다. 녀석은 비릿하게 웃었다.

“잘 돼가고 있는 사이였나 봐?”

어느새 말투까지 변해있었다. 사람의 비겁함과 음습함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릇이 작아서 밑바닥도 금방 드러난 걸까. 녀석의 급격하게 바뀐 태도에 정원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머리에서 많은 생각이 돌아서 과열된 상태일 것이었다. 패닉 상태였다.

“아직 사귀는 거 아니면 나한테도 기회 좀 줘.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잖아. 아, 혹시 그런 사이까진 안 갔어?”

“무, 무슨!”

“안 갔구나?”

정하가 일어나려고하기에 나는 정하의 손을 잡았다. 방금 전과는 입장이 역전된 상태였다. 정하가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정하가 했던 것처럼 정하를 바라봤다. 정하의 눈에서 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왜.”

나는 조용히 검지를 내 입술 위에 올렸다. 나는 정하를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눈짓했다. 정하는 한숨을 내쉬고 정원이와 나를 몇 번이고 돌아보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 정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기면 오빠 죽일 거야.”

싸늘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내 선택으로 인해 정원이가 잘못된다면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었다. 차라리 혼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정하는 혀를 차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다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정원씨, 정원씨. 내가 왠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그 애송이랑 잘 풀리고 있는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소문 신경 쓰고 있어?”

“그러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왜 이리 화를 내고 그래요. 캄다운, 캄다운.”

총무과 녀석은 이미 제 페이스를 찾은 상태였다. 흥분하고 있는 정원이를 제 입맛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아, 그 애송이랑 만나는 거 회사 사람들이 알면 앞길이 창창한 녀석한테 방해될까봐? 지고지순하네.”

“그런 거!”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다 말해버릴지도 모르겠네?”

정원이가 입을 다물었다. 정원이는 화를 내려다가 점점 표정을 잃어갔다. 허망한 표정이었다. 두 눈이 패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표정. 좌절, 절망, 자괴감. 정원이는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정원이는 고개를 점점 떨구었다. 그 고개가 정면을 향하지 못할 때쯤 총무과 녀석이 지껄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뭔가요.”

“아 별 건 아니고.”

녀석이 웃었다. 비열한 미소였다. 사람의 바닥을 보여주는 미소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를 부르게 하는 미소였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으며,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뱀의 혀가 움직였다.

“그 녀석 대신 나랑 사귀자. 그럼 원만하게 해결 아니야?”

정원이의 두 눈이 떨리고 있었다. 정원이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는 뛰어나가서 저 새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저 자신만만한 표정을 당장이라도 일그러지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내가 말린 정하도 참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정하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는 정하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정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빠, 나 저런 새끼 진짜로 드라마에나 있는 줄 알았어.”

“개새끼, 진짜 한 대 패고 싶네.”

우리는 별 시답잖은 말로 서로를 달래고 있었다. 분노를 참고 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이며, 정하에겐 하나뿐인 소중한 언니 다정원이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참고 있었다.

완벽하게 녀석의 모가지를 물어뜯기 위해 우리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숨조차 참고,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우리는 서로를 신호로 삼아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이는 마침내 완전히 고개를 떨궜다. 정원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자신감은 모두 사라진 채 정원이는 너무나도 작은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저는, 저, 저는.”

“아, 너무 그러지마.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아, 그래. 정원씨도 강휘씨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그래, 충분히 시간 줄게요.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정리하고 회의실에서 보고하도록 해요.”

보고라.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까지 끌고 올 셈이었다. 비열하고 치사한 수작이었다. 녀석은 승리를 확신한 표정이었다. 나는 비수를 품었다. 이 짧은 송곳니로는 녀석의 목을 꿰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좀 더, 좀 더 참도록 하자. 시위를 당기는 것을 이후로 미루자. 정원이도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으니까. 나도 저 새끼를 죽여 버리고 싶지만 참자.

녀석은 여유 있게 식사를 했다. 정원이는 그 순간부터 단 한입도 음식에 입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식탐이 많은 녀석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다. 총무과 녀석은 어느새 매너를 갖추며 정원이의 등을 쓸었다. 정원이가 흠칫거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으로 고통을 짓눌렀다.

“그럼 월요일 날 봐요.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

“대답 안 해요?”

“죄, 송합니다. 감사, 히 잘, 먹었, 습니다.”

정원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 땀 한 땀 말을 빚어나갔다. 쥐가 고양이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원이는 그렇게 희롱당하고 있었다.

“데려다 드릴까요?”

“아니, 요. 잠시만, 잠시만 더 있다, 갈게요.”

“그래요. 월요일 날 봐요.”

녀석이 손을 흔들자 정원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가 가게를 나서고 정원이는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나와 정하는 한참을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누가 먼저 참지 못하고 시위를 당겨버리고 말까봐,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도 정원이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원이에게 달려갔다.

“흑, 흐윽. 흑.”

“야! 야, 너 괜찮아?”

“언니! 언니 괜찮아?”

“흑, 어?”

정원이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당황해서는 눈물을 훔쳐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빨을 세게 악물었다.

“너, 너네가, 여기 왜 있어. 응? 흣.”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하에게 눈짓했다. 정하는 정원이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언니, 미안해. 다 봤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으, 왜. 왜 니가 미안하다, 그래. 흣!”

나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다시 정원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뒷목을 잡고 주물렀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물었다.

“자리 비켜줄까?”

“이, 이! 바보야아!”

정원이는 내 말을 기점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대성통곡했다. 가게의 모두가 정원이를 바라볼 정도로 시원하게 울었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봤다. 그저 바라만 보고 싶었다. 점원이 내 앞을 막아서기 전까진.

“엉?”

“손님 죄송하지만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아니, 아니. 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야! 정원아! 정하야! 야!”

나는 점원에게 강제로 이끌려서 가게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점원은, 아니 이런 짓을 하려면 점장은 돼야겠지. 점장은 내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하, 씨.”

점장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방금도 정원이가 눈물을 터트렸다면 점장을 이런 조치를 취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화는 나지 않았다. 데이트 명소라고 알려진 곳에서 여자애가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대성통곡을 한다면 내려질 조치야 뻔했다. 그래도 점장의 싸늘한 눈빛은 잊혀 지질 않았다. 나중에 해명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카톡으로 정하에게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세지를 남기고 차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가게 안에선 정원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욕지거리가 입을 비집고 나왔다.

“하, 시발.”

바로 앞에 세워둔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네 울음소리가 내 발을 잡아당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

차안의 온도가 내가 처음에 설정했던 온도가 됐을 때쯤 정원이와 정하가 들어왔다. 정원이는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다. 풀이 죽어있었다. 정하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미안하다니까.”

“아니 안 삐졌어. 진짜로.”

“흑, 미아내, 흑.”

“아니 넌 됐으니까 좀 진정하고.”

백미러로 정원이를 힐끗 보자 정원이는 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농담을 하듯이 하염없이 가벼운 어조로 준비했던 말을 던졌다.

“아니 역대 급으로 잘 준비해놓고 지고 오냐?”

“아니! 머, 뭘 준비했는데 내가!”

“전번에 화장은 전쟁 준비라며.”

그러자 정원이는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울다가 웃음이 저도 모르게 배어나와 표정을 잡고 있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맘껏 울던가. 아니면 웃던가. 뭐냐 그 표정은?”

“나아쁜새끼!”

정원이는 나를 탓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예 뒤돌아보면서 제 얼굴을 보고 킬킬 웃어대자 정원이는 정하의 품속으로 얼굴을 가리며 안겼다. 정하는 그런 정원이를 안아주면서 정원이의 등을 툭툭 쳐줬다.

“다 너 때문이야! 나쁜 새끼야!”

“멍청하게 너 혼자서 넘어진 거지. 에휴, 모자란 놈아.”

“너 좆 될까봐 그런 거잖아!”

“니 꼬라지를 봐라. 내가 좆 됐냐, 니가 좆 됐냐?”

“다 들었다면서 꼭 그렇게 말해야겠냐?”

“들었으니까 더 그러는 거다, 이 병신아.”

“누가 병신이야! 이 병신아!”

“에붸붸붸 병신이라고 한 놈이 병신이래요.”

“그럼 니가 먼저 말했으니까 니가 병신이지, 시발!”

“응, 아무튼 니가 병신.”

“아, 진짜 애냐 둘 다? 적당히 하고 출발 안 해?”

“예.”

“으흑. 정하야아.”

정원이는 치사하게 정하에게 투정부렸다. 정하는 한숨을 쉬고는 정원이를 달래주며 나를 째려봤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동을 걸고 정원이네 집으로 출발했다.

“하여간에 강휘 오빠도 에휴, 말을 말자.”

“야. 정하야. 정원이랑 나는 이게 맞아. 그치?”

정원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정원이를 비웃었다. 그래. 우리의 방식은 딱 이 정도의 무게가 딱 좋았다. 내가 너를 위로하는 데 있어 무거운 위로는 필요 없었다. 세상이 널 때려도 우리는 소주 한 잔이나 하며 서로 비웃고 바보 같은 서로를 보며 웃으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게 우리의 방식이니까.

물론 그것이랑 별개로 시위는 계속 당겨져 있겠지만 나는 네게 그 사실을 조금은 더 숨기기로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네가 알게 되면 나를 말릴까봐. 내가 너를 알듯이 너도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작품후기]정원이는 사실 별로 우는 편은 아닙니다. 예전엔 더욱 그랬고 이렇게 변하면서 좀 눈물샘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참는 편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자꾸 우네요 애가. 음...

이리저리 고민을 좀 해봤는데 아쉬운 전개는 영 고쳐지지 않더라구요. 작가의 부족입니다... 그래도 뭐 방향성 자체는 원래 계획한 바와 같으니까.

부족한 글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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