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회
chapter2만감이 교차한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눈을 찡그렸다가, 다시 내렸다.
[다정원 : 나 내일은 약속 있어. 내일 못 봐.]
만감이 교차한다. 그야말로 만개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수능을 보고 난 후 시험장을 나서며, 군대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의 차를 타고 ‘어서 오세요, 인제에.’ 라는 표지판을 보며,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에 나는 만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만감이라고 해도 항상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더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과, 더 약하게 느껴지는 감정도 있었으며, 심지어 만감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느껴지지 않는 감정 역시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전의 감정과는 달랐다.
좀 더 알아차리기 힘든 감정이었다. 수능을 보고 나선 시원섭섭했다. 군대에 들어갈 땐 개좆같았다.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났을 땐 걱정이 됐다. 그렇다면 이 메세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냥 이유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언제, 어디서? 글자를 쳐보다가 다시 지운다. 통화버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핸드폰 화면을 끈다. 컴퓨터를 켰다가 전원도 누르지 않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생각을 하려다가 다시 핸드폰을 바라본다. 그 모든 과정엔 이유도, 감정도, 생각도 없었다. 그냥 하는 것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 냉장고에서 얼음을 내리고 물을 따라 마셨다. 차가웠지만 시원하진 않았다. 다시 물을 따르다가 싱크대에 물을 버렸다. 이걸로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갈증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란 말인가. 한참을 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를 하다가 마침내 핸드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정하였다.
[어, 오빠 왜?]
“혹시 정원이랑 같이 있냐?”
[어. 그]
정하의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말을 끊었다.
“일단 그럼 자리에서 살짝 피해줘. 정원이 못 듣게.”
[응? 아 그래? 알았어, 용하오빠~.]
문고리를 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각또각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 말해봐, 오빠.]
“어, 일단 고맙다.”
[아니 뭐, 됐으니까 왜 그러는데?]
정하가 재촉했다.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 없이 본론부터 꺼내도 된다는 것은 오히려 편했다.
“정원이 내일 뭐하는 지 들었어?”
[상사랑 식사한다며. 자기도 엄청 귀찮아하던데.]
“그거 나도 가게 도와줘.”
[뭐?]
정하는 내 말에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더니 곧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시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놨다. 정하는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진정이 됐는지 내게 물었다.
[하, 하아. 그래? 좋아. 뭘 도와주면 되는데?]
“정원이가 어디로 가는지. 언제 만나는지만 알면 돼.”
[아, 좋아. 대신 나도 따라갈 거야. 괜찮지?]
“뭐? 니가 쫓아가면 들키잖아.”
정하는 정원이 정도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예쁜 편이었다. 이는 눈에 띄는 편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원이와 한 자리에 있으면 더욱 눈에 띌 것이었다. 정원이와 정하는 분위기의 차이가 있어서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한 자리에 있으면 누구나 자매라고 생각할 만큼 닮아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정원이를 동생으로 생각할 것이었지만. 그러자 정하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화장은 꼭 예쁘게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사실 오빠의 의견은 필요 없어. 무조건 따라갈 거거든.]
“뭐?”
[아니 이걸 어떻게 놓쳐, 푸흡. 큭큭. 아, 아니야. 진짜 아니야.]
정하는 그렇게 다시 웃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 마디를 더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여간에, 꼭 장소랑 시간 보내놔. 카톡으로.”
[알았어.]
전화가 끝나고도 나는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언제 정하에게서 메세지가 오나 망연하게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인지하지 못할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다정하 : 내일 저녁 7시. 장소는 xx]
[나 : ㅇㅇ 그럼 6시까지 oo로]
[다정하 : (대충ok라는 이모티콘)]
xx를 인터넷에 쳐보자 바로 상단에 유명한 고백 장소로 어쩌고저쩌고 적혀있는 블로그가 보였다. 들어가 보니 연인들이 함께 가기 좋은, 고백하기 좋은, 데이트하기 좋은 등의 태그가 적혀있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개수작이었다.
물론 내가 이곳에 가서 뭘 어찌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 녀석이 어떤 의도로 정원이를 부르는 것인지, 정원이는 그 사실을 알고 나가는 것인지.
정원이가 녀석의 고백을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이는 대로 나는 그것을 납득할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약에 정원이가 바라지 않는 행동을 강제로 그 녀석이 할 경우에만 나설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 되풀이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있었다. 그럴싸한 목적으로 나 자신도 속이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은지 아닌지는 본인이 가장 모르고 있는 주제에, 나는 그렇게 그럴듯한 말로 내 자신을 홀리고 있었다.
***
“안녕? 오, 꽤 차려입고 나왔잖아.”
“어? 어. 아. 정하냐?”
약속장소는 정원이네 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지하철 역 앞이었다. 모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접근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정하였다. 나는 정하가 어제 한 말을 납득했다.
“그래, 진짜 너인줄 못 알아보겠다.”
“그치? 내가 원래 이런 걸 좀 잘해.”
정하는 평범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평범하기보다 좀 더 어리숙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패션도 얼굴도 그런 식의 컨셉이었다. 제일 중요한 정원이와의 연관성은 놀라울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었지만 오히려 더 인상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오히려 정하가 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오빠야말로 옷 좀 갈아입어야 할 것 같긴 한데.”
“근데 거기 분위기 좀 있는 곳이라 차라리 차려입는 편이 낫지 않냐?”
“아슬아슬하게 밸런스가 맞을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차피 시간도 별로 없으니 일단 가자. 오히려 오빠같이 입는 게 눈에 덜 띌 수도 있겠다. 아 근데 선글라스는 정말 최악이야.”
나는 평소보다 더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낀 상태였다.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하의 반응을 보니 썩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선글라스는 안 끼면 바로 들킬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해서 예약한 좌석에 앉았다. 정원이의 자리가 어딘지 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구석진 자리로 이동을 했다. 정원이의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나와서 앉아서 기다리는 와중에 정하가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뭐 시킬까?”
“어, 너 알아서.”
“쿡쿡. 그래 알았어.”
정하가 입을 가리고 메뉴판을 바라봤다. 나는 평소에 쓰지 않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출입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곧 정원이가 들어왔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오빠. 진짜 수상해 보이니까 그냥 편하게 있어. 제발.”
“어, 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정쩡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음식과 맥주가 도착해있었다.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포크를 들고 음식을 넘겼다. 내가 음식을 코로 넣고 있는지 입으로 넣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넘어가는 것을 보니 입으로 넘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이가 앉았다. 정원이 자리를 흘끔 바라봤다. 정원이는 정갈한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A형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구두 역시 검은색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화장은 평소보다 좀 더 앳된 느낌이 들었다. 차려입으면 저렇게까지 다른 분위기가 되는구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나는 정하를 힐끗 바라봤다. 정하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중요한 자리 나간다 길래 풀 세팅 해줬지. 예쁘지?”
“너, 후, 말을 말자.”
“어차피 문제 생기면 오빠가 끼어들 거 아니었어?”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서.”
정하는 피식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전혀 믿어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숨으로 대답했다.
곧 한껏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총무과 주임 녀석이었다. 녀석은 정원이에게 느끼하게 미소 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서로 고개를 숙였다. 홀을 울리고 있는 노래가 우아한 계통이었고, 가게가 별로 크지 않은데다가 자리 역시 멀지 않아 그럭저럭 주의를 기울이면 대화가 들릴 법 했다.
“오늘은 좀 차려입고 나오셨네요?”
“주임님도 꽤 차려입고 나오셨네요.”
“하하, 그럼요. 정원씨 만나러 왔는데. 아, 오늘 정말 예뻐요.”
“감사, 합니다.”
정원이는 겨우 표정을 유지했다. 정원이에게 예쁘다는 말은 절대로 칭찬이 아니었다. 아마 욕지거릴 참고 겨우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총무과 녀석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몸을 조금 꼬는 것이 어떻게 보면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대화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대화는 보통 총무과 녀석이 이끌면 정원이가 대답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저쪽 테이블에도 식사가 나왔다. 식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총무과 녀석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 음식은 꽤 괜찮더라고요. 어때요, 입에 맞으세요?”
“아, 음. 네.”
정원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우리 테이블에 나온 음식을 포크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여기 음식은 대체적으로 짠 것 같았다. 맥주가 같이 나오는 것을 보니 여기 음식은 태생이 술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놓은 안주의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정원이야 막입이니 그런 걸 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정원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정원이 성격에 안주의 가격을 보자마자 이딴 짭조름한 뭐시기가 왜 이렇게 비싼데? 하고 호들갑을 떨 것이었다.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정원이의 반응이 데면데면하자 총무과 녀석이 비 맞은 강아지 표정을 지었다. 강아지는 귀엽기라도 하지 같은 남자입장에서 보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애교였다. 정원이 역시 살짝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표정을 숨겼다. 나니까 봤을 정도로 작은 균열이었다. 내심 안심이 됐다.
“혹시 자리 불편하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물론 즐겁죠. 하.하.”
“하하, 영 그렇게 보이지 않네요. 오늘 놀러 나온 거 에요. 긴장 푸세요.”
“네에.”
정원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볼수록 오히려 안심이 됐다. 그렇게나 자리가 불편하냐. 나는 포크를 들고 음식을 천천히 맛봤다. 그럭저럭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왜 갑자기 여유를 부리고 그래?”
“어? 아니 뭐.”
“묘하게 기분 나쁜 얼굴인데.”
“야, 얼굴가지고 뭐라고 좀 하지 말자.”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나는 검지를 입가에 댔다. 정원이네 일행이 다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정하 역시 내 눈짓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부른 건 다른 게 아니고, 힘든 일 있으시면 저한테 털어놓으시라고 부른 거에요.”
“예?”
총무과 녀석이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정원씨가 요즘 정말 힘내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자꾸 나쁜 소문이 나니까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힘드실 땐 저한테 좀 기대셔도 되요.”
“지랄하네.” “지랄하네.”
나와 정하가 참지 못하고 이구동성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뻔한 수작이었다. 정원이만 빼고 모두가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정원이는 아직 저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저런 의도의 말이 자신을 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걸 정원이보다 내가 먼저 깨달았다는 것이 허탈하면서도 묘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정원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늠름하게 말했다.
“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주임님께서 요즘 제가 겉돌아서 절 개별적으로 신경써주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부족하기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정원이는 마지막에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한 표정이었지만 다시 자신감을 찾은 얼굴로 말했다. 묘하게 거슬리는 표정이었다. 마치 다짐을 함으로써 자신을 북돋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상처투성이면서. 나는 한숨을 흘렸다. 총무과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소 지었다.
“정원씨가 괜찮다면 그런 거겠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자꾸 주임님이라고 부르시네요. 제 이름 불러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여기는 회사 밖이잖아요.”
“개수작부리네.” “개수작부리네.”
또 다시 정하와 이구동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 새낀 정말 눈치와 염치가 없나. 아니 하지만 저런 쪽으로 눈치 없는 정원이에겐 오히려 저렇게 철면피를 쓰고 들이대는 게 효과적일 지도 모르겠다.
“그, 죄송하지만.”
“나는 정원씨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정원이가 입을 달싹거렸다. 정원이도 슬슬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이가 지금까지 맞춰주던 건 이전에 등산이나 술자리 같은 데에 끌려 나갔던 것을 생각하고 맞춰주던 것일 터였다. 즉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 나오기까진 긴가민가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정원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확실했다. 정원이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저는 정원씨랑 더 친밀한 관계가 되고 싶어요.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되지, 이 답정너 새끼가. 내가 고개를 돌리고 일어나려하자 내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정하였다.
“오빠. 일어나지마. 일 복잡해져.”
“그렇지만!”
“언니가 확실하게 대답하게 내버려둬.”
나는 정하를 봐라봤다. 아니 노려봤다. 정하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정하를 바라보면서 감정을 가라앉혔다. 정하의 말이 맞았다. 다리의 힘이 풀렸다. 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식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정원이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작품후기]묘한 부분에서 끊겨서 죄송합니다. 사실 이전의 전개가 달랐었는데 계속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리저리 수정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반절정도를 아예 갈아 엎다 보니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이전 전개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만은.
하여간에 그래서 끊기는 부분도 좀 애매하고 퇴고 시간도 짧았네요... 글 퀄리티 자체는 떨어진 기분이라 죄송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런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 총무과 주임 수정했습니다. 제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