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50화 (50/138)

50회

chapter2정원이가 드디어 진정했다. 진정을 했다기보다 강제로 자기 자신을 진정시킨 것에 더 가까웠다. 자신을 건드릴 시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뺨이 울긋불긋한 것은 숨길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생리현상이었다. 난 그것을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괜찮냐?”

“아니 다 죽어가는 놈이 누구보고 괜찮냬?”

“아니 뭐 괜찮으면 됐고. 좋은 구경 했다 치지 뭐.”

“뒤진다. 진짜.”

정원이를 놀리고 싶은 것은 참을 수 없는 본능이었다. 원래도 반응이 좋아 패기 좋은 친구였다. 요즘엔 골리고 나면 보기에도 즐거우니 더욱 참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제부턴 진지한 얘기를 해야 했으니 참아야 했다. 나는 내 의자를 꺼내서 손으로 의자를 툭툭 쳤다.

“여기 앉아. 얘기 좀 하자.”

“뭔 얘기?”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는 것을 보니 다시 골리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애써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놀리는 거 아니니까 앉아봐.”

정원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꺼림칙한 기색을 못내 드러내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침대에 앉았다가 몸을 겨누기도 조금 버거워서 벽에 몸을 기댔다.

“원래 너 오늘 보면 말할 얘기긴 했어.”

“뭔데?”

“일단 들어봐.”

정원이가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꺼내야 할 질문들을 반듯하게 정리해놓은 상태였다. 준비가 돼서 그런지 말을 꺼내는데도 감정이 크게 요동치진 않았다.

“너 요새 회사 내에서 도는 소문 들었어?”

“어? 뭔데 그게.”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본인은 용케 모르고 있었구나. 소문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한테까지도 들리던 얘기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포팀이 용의주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 요새 인포팀이랑 안 친해?”

“그게 소문이랑 무슨 상관……, 어, 설마?”

“어. 너랑 관련된 소문이야.”

정원이는 뱉으려던 말과 함께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니가 선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일처리도 잘 못한다. 그리고, 음.”

“그리고?”

정원이의 눈이 떨렸다. 불안한 눈빛이었다. 최대한 말을 순화시켜하는데도 악의라는 것은 쉽게 묽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선배들은 무시하면서 남자들한텐 잘 얘기하더라고.”

“아니 시발!”

정원이는 결국 분노를 표출했다.

“아니 띠꺼우면 제대로 말을 하던가! 알아 쳐 먹지도 못 하게 꼽 줘놓고 무슨 개소리야 시발?”

“어, 그거에 관해서 말인데.”

정원이가 불만에 찬 눈길을 던졌다. 울분이 쌓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됐다. 그 질문은 지금 던져야만 했다.

“그, 혹시 금요일 날 나 회식하러 갈 때 남자는 누구냐?”

정원이의 얼굴에서 가득 차있던 분노가 씻겨 내려갔다. 빈자리를 채운 대부분은 황당함이었고 그 외에도 만감이 서려있었다. 나 역시 그 만감을 모두 파악할 순 없었다.

“왜?”

많은 것이 담긴 질문이었다.

왜 그것을 물어보느냐.

왜 그것을 네가 물어보느냐.

왜 내가 너에게 말해야 하느냐.

왜 그걸 궁금해 하느냐.

나는 의도적으로 정원이의 질문을 제약해서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구체화했다.

“요새 도는 소문이 남자얘기가 나오니까. 괜히 그 남자가 문제가 된 게 아닌가 싶어서.”

“아? 아. 그래?”

정원이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지레짐작했다. 만감이 교차하던 정원이의 얼굴에 다시 분노와 억울함이 제 지분을 높여갔다.

“아니, 상사야 상사. 인포 팀 관리하는 사람. 총무과 주임! 아니 시발 돌겠네. 왜 그런 소문이 돌지?”

“글쎄.”

총무과라. 그러고 보니 과장님이 항상 욕하던 팀이었다. 좆도 하는 것도 없는 것들이 자꾸 인사과 영역을 침범한다고 짜증을 내시곤 했다. 게다가 필요도 없는 주임 같은 직책을 쳐 만들어서 일을 불린다고. 내가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정원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넌 알잖아. 내가 남자랑 그렇고 그렇게 되는 게 말이 되냐?”

“그거야 딴 사람들은 모르니까. 뭐, 그 사람이 음료수 같은 거 하나씩 챙겨줘서 그런 거 아닌가?”

내가 본심을 슬쩍 꺼내자 정원이가 억울하다는 기색을 한껏 드러내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 식으로 치면 니가 시작이지!”

“어?”

내가 뜻밖의 질문에 당혹해하자 정원이가 말 한 마디마다 손가락으로 나를 짚으며 말했다.

“니가, 전번에, 나한테, 쿠키 준, 그, 날부터, 그런, 선물공세가, 들어온다고!”

“아, 아.”

나는 탄식성을 내뱉었다. 확실히 그 때의 선택은 오판이었던 모양이었다. 전적으로 내 실수가 맞았다. 나는 뒷목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뭐.”

내가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을 비추자 정원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들릴 듯 안 들릴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긴, 했지만.”

툭하고 던진 말이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입이 제 때 열리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도래했다. 나도 정원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힐끗 바라 본 너는 귓가가 붉게 무르익었다. 톡 찌르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익숙하지 못한 것에 약한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빠-알간 네 귓불만 조심스럽게 힐끗거릴 뿐이었다. 결국 이 침묵을 끊어낸 것도 너였다.

“아무튼 간에! 그 사람도 그냥 힘내라고 준거야.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서 있는 모습 보기 좋다고.”

“그, 그래.”

갑작스럽게 낸 목소리는 병신같이 떨렸다. 나는 큼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말이 다소 빠르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여간에 그건 내가 미안했고. 요새 나쁜 소문 도는 건 어떻게 해야 될까?”

“그거야 뭐,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정원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더 열심히 하는 거밖에 없고. 그 뒤에서 뒷담 까는 것도 내가 열심히 하면 다 사라지지 않겠냐? 군대도 그렇잖아. 열심히 하면 폐급 취급 하던 것도 사라진다니까?”

“그래? 음. 그래.”

완전히 납득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수긍했다. 딱히 뚜렷한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게 학생 때 풀던 문제처럼 정확하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었다.

다만 판단하기에 여러 측면의 의견이 추가가 된다면 더욱 좋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정원이가 커뮤니케이션적으로 파멸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바였다. 그래서 그런 쪽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근데 니 선배들이 너한테 뭐라 그랬는데?”

“어, 음.”

정원이는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감았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고 있었다. 정원이는 생각이 나는 것부터 알음알음 내밀었다.

“왜 시간 끌리게 따로 갈아입냐고 핀잔줬었고.”

“일부러 말 골라 듣냐고? 했었나?”

“표정 관리 좀 잘하라고도 했는데.”

“우리가 불편한가 봐요? 그랬었나? 가물가물하네.”

“찾아오시는 분들한테 좀 더 사근사근하게 대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결국 언젠가부터 말 안했고.”

이어지는 말들을 들으며 나는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저 정도 말을 들었으면 아 이 년이 나에게 꼽을 주는 구나 정도는 느꼈을 것이었다. 이런데도 눈치를 못 챈 정원이도 참 문제가 많기는 했다.

하긴 저것도 다 어떻게 짜내고 짜내서 떠올리는 것이리라. 저것보다 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더 음습하게 너를 상처 입힌 말들은 더 많았을 것이었다.

여성어와 남성어가 괜히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더 나쁘다는 말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말 한마디를 건네면서도 더 함축적으로, 더 다원적으로, 더 이면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에 능했다. 그런 이면의 의미는 나 역시 캐치하기 힘들었기에 여자들과 친하지 못했고, 정원이는 더욱 그럴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원이가 저번에 나보고 뭘 잘못했냐고 계집애처럼 묻던 게 더욱 안쓰러워졌다. 정원이가 스스로 그런 말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은 아마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겠지.

나는 열심히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쥐어짜내려는 정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전에 했을 때도 정원이가 거부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서였다. 정원이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한숨을 내쉬고 몸에 힘을 풀었다.

“수고했다.”

“응.”

정원이가 그런 말을 들으며 무슨 태도를 취했을지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다 상상이 갔다. 먼저 사과하고, 자신을 책망하며, 열심히 고개를 숙였을 것이었다. 정원이도 나도 군필이었다. 위에서의 강압에 대해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며, 굴종하는데 익숙했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정원이가 혼자서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차라리 같이 회사를 들어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자기가 잘하는 일이라도 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정원이는 익숙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적응하기 어려운 집단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정원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수고했다고. 정원이에게도 내 그런 마음이 전해졌기에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으리라. 아마 조금이라도 장난을 치는 기색이 있었다면 바로 손을 쳐냈겠지. 정원이는 한참을 그렇게 의자에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여간에 나는 이럴 때 열심히 하는 법 말고는 모르니까.”

“그래.”

“솔직히 좀 힘들었는데 너한테 말하니까 좀 풀리는 기분이고.”

“잘 됐네.”

“뭐, 그래도 너한텐 말 못하는 건 있지만.”

아직도 그런 구석이 남았냐는 듯한 내 얼굴에 정원이는 내 손을 천천히 떼어내서 고개를 돌렸다.

“됐어. 이걸로 충분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숨기고 있는 것은 있었으니까. 묻지 못할 말은 있었으니까. 어제 네 표정에 대한 것도, 네 말에 대한 것도 차마 물을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네가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냥 납득하기로 했다.

그 날은 차마 내가 데려다주지 못해서 누나가 정원이를 배웅해줬다. 이거 빚으로 달아놓을 테니까. 누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갔다가 속이 다시 쓰려오는 사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정원이는 나에게 몸조리 잘하라고 말하고는 누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나 역시 너나 힘내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서로의 미소가 중간 그 어딘가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

다음 날이 되서 출근을 하니 미칠 듯이 일이 들어왔다. 대체 이런 짓을 내가 왜 하겠다고 한 거지? 아직 몸이 덜 나아서 제정신도 아니라서 더욱 힘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데이터가 구축되기 전에도 회사에선 인사 명령이 있었으며, 그 모든 인사 명령을 다시 정리해서 구축될 데이터에 정리해야 했다.

즉 원래 해야 하는 일에 추가적으로 귀찮고 반복적이며 좆같은 노동이 추가된 격이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말이 그야말로 딱 맞았다.

“이거랑 이거는 b폴더에 넣고, 이거랑 이거는 다시 정리해. 규격에 안 맞아. 자간 다시 바꿔. 이거 수기로 정리된 거 다시 문서화하고. 어.”

“네, 네. 알겠습니다. 네.”

내 직속 선임이 효웅선배에서 재성선배로 바뀐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재성선배는 술자리에서 보여줬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이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 더 흡사했기에 이상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 일을 하기 위해 한 번은 때려 박아야 하는 정보였다. 의외로 재성선배는 감정적으로 사람을 혼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을 잘못하면 엄하게 혼냈지만 이유 없이 혼내는 경우는 없었다. 내게 있어선 이상적인 관계에 가까웠다.

“야, 한강휘! 정신 안 차려?”

“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자마자 싸늘하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바로 반성하고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노트에 필기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모든 것을 순간순간 캐치하고 체득해야 했다. 어려운 일이었으나 재성선배는 끈질기게 나를 갈구고 가르쳐줬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번 주가 지났다. 체감 상으로도 순식간이었다. 야근을 매일 밥 먹듯이 했으니 노동시간은 배가 된 격이었지만 오히려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갔다. 다른 것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왜 돈이 쌓이는 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일주간이었다.

기본적인 것을 아침에 미리 끝내기 위해 조기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다. 특히 민경아 팀장님과 재성선배와는 셋이서 손을 잡고 퇴근을 하다 보니 없던 전우애도 생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금요일이 됐다. 오늘도 야근을 하려고 했는데 민경아 팀장님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오늘은 빨리 퇴근하세요. 다음 주를 견디고 싶다면.”

“엇, 하지만.”

“가랄 때 가.”

“예.”

재성선배까지 합류해서 나를 보내려 하기에 나도 수긍했다. 민경아 팀장님은 내가 이 일에 착수하고부터 내게도 반 존대를 해주셨다. 이 역시 맡은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지표였다.

내 빠른 수긍에 민경아 팀장님도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민경아 팀장님을 바라보며 어설프게 웃고는 빠르게 짐을 챙기고 도망갔다. 주차장에 들어가서 차를 타기 전에 정원이에게 카톡을 남겼다. 오랜만의 휴식을 즐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 오는 기분이었다.

[내일 전번에 캔슬난 맛난 거 먹으러 ㄱㄱ. 메뉴는 니가 정하셈.]

[작품후기]부끄럼이 많은 친구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쪽팔리겠죠. 맘 속에 있는 얘길 다 털어놓기는.

도중에 빠-알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 표현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새빨개진 정원이의 귓불만 힐끔거릴 수밖에 없는 강휘의 심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용...

오늘도 항상 부족한 작품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소중한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