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chapter2머리가 아프다. 어제 오랜만에 달려서인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숙취의 요정이 달팽이관을 부지런히도 두들기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 요정의 폭동을 제압하려 했지만 턱도 없었다.
“으, 시발.”
확실히 유진선배가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어제 술자리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과장님이었으나 결국 마지막에 술자리를 정리한 것은 유진선배였다. 그 사람, 많이 마시는 건 그렇다고 쳐도 페이스가 엄청 빠르단 말이야. 어디 가서 술 못 마신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조금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이대로 다시 자더라도 나쁠 건 없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일에 가까웠다. 억지로 비질비질 발걸음을 끌면서 냉장고를 열어 초코우유를 마셨다. 나름의 해장 방법이었다. 정원이는 이걸 애새끼 같다며 놀리곤 했다. 외국에선 피자로 해장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이 정도는 애교지.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니 문득 어제 운동을 빼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차피 회식 때문에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딱히 죄책감이 들진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나서 핸드폰을 켰다. 부재 중 전화 세 통.
다정원
다정원
다정원
그 이름 석 자가 마음을 퉁, 퉁, 퉁 두들겼다. 핸드폰을 바라보며 오만 생각이 들었다. 아마 누나가 부르지 않았다면 가만히 자리에 서있기만 했을 것이다.
“강휘야, 팬티만 입고 화장실 앞에서 뭐하는데!”
“아, 미안.”
버릇 나쁜 아이를 혼내는 듯한 말투였다. 썩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옷을 대충 차려입고 나가려는데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쉴까? 다정원이름으로 온 세 통의 전화가 내 발목을 잡았다. 정작 내 등을 떠민 것도 그 세 통의 전화였다.
습관처럼 정원이를 보러가는 것이었지만 괜시리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신발장에서 허리를 숙여 풀릴 것 같은 운동화 끈을 다시 맸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속이 다시 안 좋아졌다. 오늘은 절대 차는 못 몰겠구나. 내가 생각해도 지금 후하고 불면 바로 면허정지가 뜰 것 같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다시 대중교통을 사용해야겠다.
오랜만이라고 해봐야 겨우 한 달 남짓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익숙하게 몸은 움직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애매한 시간대인 3시쯤이라서인지 몰라도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선잠에 들었다.
전화 세 통에 적힌 이름 다 정 원.
그 이름에서 떠오르는 얼굴. 그 얼굴에서 떠오르는 그 날의 장면. 내가 고개를 돌리고 무시했던 그 순간. 내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 세 통의 전화에 담긴 메세지, 나에게 전하려던 말. 그리고 네가 그 순간 짓던 미소의 의미. 나의 감정, 너의 감정.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 우리가 차마 꺼내지 못할 이야기.
[--역입니다. 내리실 곳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흐엇!”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선잠에서 깼다. 내려야할 역이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뛰쳐나오자 바로 지하철문이 닫혔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이 순간만큼 나는 9회 말 역전을 한 홈런왕이었다.
“아, 시발.”
세이프는 무슨, 한 정거장 전이었다. 투수가 공도 던지지 않았는데 도루를 뛴 격이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겠지만 얼굴이 홧홧해져갔다. 자의식이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괜히 자리를 옮겼다. 별 것도 아닌데. 다음 차도 길어봐야 10분 안에는 올 것이었다. 괜찮지 않은 것은 오롯이 나뿐이었다.
***
“어 왔어?”
“하이.”
정원이네 도착하자 정하가 문을 열어주고 반겼다. 매 주 오는 내가 귀찮을 법도 한데 매번 반겨주는 것이 고마웠다. 문을 들어가니 정원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옷차림으로 던파를 하고 있었다. 옛날엔 입던 잠옷은 아니었으니 아마 정하가 사준 것이리라. 다소 품이 넉넉하고 깜찍한 디자인이었다.
“왔다.”
“어.”
정원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컴퓨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레이드를 혼자 뛰고 있었다. 눈을 떼기가 힘들 법도 했다. 어차피 말을 걸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도 돌아오지 않지 싶어 바닥에 앉아서 끝나길 기다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어느새 의식이 멀어졌다.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머리도 그에 맞춰 욱신거렸다. 숙취와 졸음이 내 고개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결국 졸음이 시소게임을 이기자 순간적으로 휘청하고야 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지하철에서처럼 나는 다시 두리번거렸다. 정하도 정원이도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서둘러 입에 조금 흐른 침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 뺨을 몇 대 툭툭 쳤다. 그러자 정하가 내가 깬 것을 눈치 챘는지 말을 걸어왔다.
“어, 일어났어?”
“응. 지금 혹시 몇 시야?”
“음, 4시? 오래 안 잤어.”
정하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4시, 대충 한 시간 남짓 졸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정원이를 바라봤다. 정원이의 캐릭터가 바뀌어있었다. 정원이는 그대로였다. 정원이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던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정원이가 앉아있는 의자에 손을 올렸다.
“깨우지 그랬어.”
정원이는 답하지 않았다. 집중을 하나 싶었는데 별로 중요한 페이즈도 아니었다. 머리가 조금 욱신거렸다. 나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빡집중 중이냐? 딱히 그럴 때도 아니잖아.”
정원이는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정하를 바라보고 정원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일 있었어? 정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다시 정원이를 바라봤다. 정원이는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길드말로 몇 마디가 오고가는 와중에도 정원이는 엔터 한 번 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보상창이 떴다.
“어? 골칸데? 뭐야 니 꺼네? 축하한다야.”
그래도 정원이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원이는 무표정이었다. 나도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정원이는 의도적으로 이쪽을 무시하고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홧김에 입을 열려다가 본능적으로 다시 다물었다. 일촉즉발의 타이밍이었다. 내가 원래 꺼내려던 말을 꺼냈다간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는 다시 얼굴을 붉혔을 것이었다. 그런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를 했다간 다시 무시당하겠지. 나는 일단 의자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삐졌냐?”
“누가!”
정원이가 순간적으로 이쪽을 돌아봤다. 오늘 처음으로 본 얼굴엔 짜증이 가득 차있었다. 내가 한 말이 도화선이 될지 아닐지는 앞으로의 내 태도와 말에 의해 결정되겠지.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내 감정을 억제하고 일단은 달랠 뿐이었다.
천천히 원인을 규명해봤다. 정원이는 지금 삐져있다. 서운해 하고 있다. 무엇에 대해서?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삐져있는 건지 아니면 요즘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를 들어보기로 했다.
“니 전화 씹었다고 삐졌냐?”
“안 삐졌다고!”
정원이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방금 돌아볼 때 말을 삼키듯이 뱉어낸 것과는 온도차이가 꽤 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정원이쪽으로 손바닥을 펼쳐 맹수를 달래듯이 두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너 안 삐졌어. 그래서 전화 씹은게 서운했냐?”
“하, 씨발. 됐어.”
정원이가 홱하고 고개를 돌려서 다시 키보드를 잡으려고 했다. 이대로라면 다시 무시를 당할 것 같아서 나는 정원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했다. 그러자 정원이가 내 손을 쳐냈다. 과민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나도 순간적으로 무슨 대처를 해야 할지 난처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놀란 것은 정원이쪽이었다. 정원이는 제가 쳐놓고는 오히려 자기가 흠칫하고 놀랐다. 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오래되지는 않은 그러나 충분히 오래됐다고 느껴지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내 뺨 싸다귀를 올려붙였을 때였던 것 같다.
정원이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 눈을 피하는 듯한 제스쳐였다. 나는 다시 정원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엔 정원이는 내 손을 쳐내지 않았다.
“어, 미안?”
그러자 정원이가 나를 올려봤다. 정원이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네 표정을 하나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말로 하지 않아 정확하게 네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정원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가 미안한데.”
“어, 전화 씹어서? 아니 야. 상황이 웃긴데? 왜 내가 있어본 적도 없는 여친한테 사과하는 거 같지?”
정원이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흐름이 이쪽으로 온 것 같아 나는 이어서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꺼낸 말은 내 의도와는 먼 것이었다.
“전화 씹은 게 문제가 아니었나? 아 혹시 너 생리 하냐?”
“야, 한강휘! 미쳤냐!”
소리가 뒤에서 닥쳐왔다. 숨을 죽이고 우리를 바라보던 정하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실책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소, 아니 완전히 배려가 부족한 행태였다. 정원이에게만 이상하게 거리감을 재지 못해서 잦은 실수를 하게 된다.
그건 네가 지닌 특수성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너를 특별하게 여기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보다 생각이 짧아서 저지른 실수일 뿐일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번엔 정원이가 모기가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냈다.
“끄으으래. 승르흔드, 왜.”
잘 익은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자 내 행동도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나는 정중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머리를 박았다.
“미안.”
고개를 숙이고 있자 머리위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리고 있었다. 신음소리하나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정원이가 얼굴을 식히며 뱉고 있는 무언의 욕바가지에 노출되어있었다. 아마 내 얼굴도 만만치 않게 붉어졌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것이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지만. 내 얼굴마저 식을 즈음 머리위에서 정원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강휘야.”
“어.”
“너는 왜, 아니.”
나는 고개를 들으려했다. 그러자 정원이가 내 고개를 두 손으로 눌렀다. 그 힘을 무시하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들 수 있겠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벡터에 순응했다.
“술 냄새 나. 머리 들지 마.”
“미안.”
정원이는 내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는 끙끙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너는 왜 나한테 항상 먼저 미안하다고 해?”
“뭐?”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자 정원이가 다소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전도 내가 쌩깐 거잖아.”
“아니 방금은 내가 존나 병신같이 생리얘기 했잖아.”
“그거 전에! 그건 당연히 좆같은 거고!”
그 전이라. 내 좆같은 언사에 나도 모르게 잊었던 그거 전에. 아, 삐졌냐는 말에 정원이가 짜증을 내자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그 때였다. 그러던 와중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 나는 죽는 소릴 냈다.
“끄응, 일단 머리 들고 얘기하면 안 되냐?”
“안 돼. 얘기하고 머리 들어 그럼.”
좋아.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단지 자세가 불편하고 지긋하게도 날 괴롭히는 숙취가 불러일으키는 두통만 아니었다면 더욱 쉬웠을 터였다. 나는 고통에 쫓기며 말했다.
“일단 너도 알다시피 난 친구랑 싸우는 게 싫다. 옛날부터 그랬잖아.”
“어. 그랬지.”
“다음으로 항상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것도 아니다. 전번만 해도 니가 한 달이나 꼬까옷을 차려입고 사과하러 왔잖냐.”
“씨발, 꼬까옷이라고 하지마라.”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킬킬 웃으며 이유를 댔다.
“마지막으로 엄마랑 누나가 여자애한테는 맨날 져주라고 했어. 니 손에서 짐 뺏는 거랑 비슷한 원리야. 우리 집 와봤지? 우리 집이 그래.”
이번에 정원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머리를 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것을 이제 머리를 들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고개를 들고 이 난감한 분위기를 해쳐나가려고 방금 전에 낄낄거리며 지었던 표정을 지으며 정원이를 마주했다.
정원이는 무표정이었다. 표백제라도 마신 냥 하얀 얼굴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내 가슴께에 닿아있었다. 무엇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어느 것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져준 거라고…….”
“정원아?”
그러자 정원이의 눈빛이 돌아왔다. 정원이는 황급하게 나를 바라보며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냈다. 짓궂은 미소가 얼굴에 걸려있었다.
“아, 아니야! 시발, 괜히 나만 병신같이 굴고 있었네. 아, 그래. 그러니까 누가 생리얘기하래? 조심성 모자란 놈아. 내가 아니었으면 넌 바로 매장이야, 알아? 고마운 줄 알라고!”
“어, 어.”
“그리고 너 술 냄새 나! 어제 얼마나 쳐 마신거야!”
“아니, 좀 달리다보니.”
정원이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갔다. 역시 이유를 들어보니 잘 알겠다며 정원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그에 맞게 어설프게 웃으며 괜히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방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과장되게 웃었다. 그런 행동들이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뚜렷하게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알면서도.
네가 짓지 못한 표정이, 네가 잇지 못한 말이, 내가 뱉어버린 말이 마음속에서 멍울지어 가라앉고 있었다. 네 안에선 어떨까.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감정이 다시 수포처럼 방울방울 떠오르고 있었다.
[작품후기]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번 챕터는 저번에도 제가 한 번 언급했듯이 기승전결에서 '승, 전' 이 유독 긴 챕터입니다. 애시당초 찝찝한 감정을 어떻게든 묻어나오게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는 분들에게 다소 답답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미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전개가 빠르진 않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연참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게 영 힘드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부족한 작품도 항상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 정말로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