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47화 (47/138)

47회

chapter2홀리듯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쏠려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인포데스크로 향하려던 발을 멈췄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정원이가 알아서 잘 대처할 터이다. 내가 괜히 끼어들어봐야 우리가 이전에 나누었던 다짐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정원이정도 되는 외모라면 말이야 걸어보고 싶을 것이었다. 음료수를 넘기며 추파를 던지는 행위야 정원이도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닐 것이 아닌가.

저렇게 목적이 뚜렷한 행위라면 오히려 좋았다. 수작이 뻔히 보여 정원이가 거절하기 쉬울 것이었다. 오히려 은근히 압박을 하는 것이 더 귀찮을 테지. 그러니 차라리 좋았다. 차라리 좋을 것이다. 정원이는 애가 아니다. 정원이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옆에서 효웅선배가 말을 걸었다.

“와, 역시 쟤 인기 많아. 그치?”

“아, 예……, 예.”

“어? 뭐야. 강휘도 대쉬할 생각이었어?”

효웅선배가 옆에 있었다. 나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나의 행동을 주시할 수 있는 사람이 근저에 있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애써 그 광경을 무시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에이, 저쪽 뚫어져라 보던데.”

“커피 드는 거 도와드립니까?”

“어 진짜? 에이, 미안한데? 하긴 뭐 야근도 월요일 날부터 할 테니까 도움 좀 받아볼까?”

“예, 이동하시죠.”

“오케이.”

나는 효웅선배가 관심이 있을만한 주제로 말을 돌렸다. 효웅선배 역시 혹할만한 말이었기에 어느새 정원이에게서 신경을 껐다. 하지만 정작 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쥐덫에 발목을 물린 것 같았다. 오히려 데스크쪽으로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역주행하는 무빙워크를 걷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왜? 역시 귀찮아?”

“……아닙니다. 가시죠.”

나는 효웅선배를 따라서 회사를 나갔다. 잠깐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본 풍경에선 정원이가 웃는 얼굴로 사내를 응대하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에 불편함을 느낀 것은 내 감정을 멋대로 너에게 전이시킨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네가 불편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 사실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

숱한 의문들이 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에도 나는 기계적으로 오후 업무를 수월하게 시행했다. 과장님 옆에 앉아 던지는 인풋에 대해 머릿속에 저장을 하고 부족한 것은 노트에 정리를 했다. 사이사이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등 위기는 있었으나 그럭저럭 잘 넘길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와중에 딴생각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은 이미 과부화 상태였다. 연기인지 뭉게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점점 내 머릿속에 차는 기분이었으나 나는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아야 했다. 회식이라는 좋은 핑계도 있었다.

“집중해라. 회식 생각하나?”

“하하. 티 납니까?”

과장님은 이런 식으로 내가 딴 생각을 할 때마다 회식 탓을 했다. 나에게는 썩 좋은 일이었다. 과장님은 회식자리를 좋아하기에 다소 딴 생각을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회식자리를 싫어하는 나에겐 후일 역풍으로 다가올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실히 호운이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고 모든 인원들이 컴퓨터를 끄고 나갈 준비를 했다. 회식 날엔 무슨 일이 있어도 야근을 시키지 않겠다는 과장님의 강한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물론 비상사태가 터지면 가장 먼저 뛰어 들어와야 하는 것도 과장님이겠지만.

나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인포쪽을 바라봤다. 한 달 간 생긴 나쁜 버릇이었다. 역시나 정원이가 서있었다. 요즘 들어 퇴근을 할 때마다 정원이를 보며 퇴근을 했던 것 같앗다. 같은 팀의 여자들과 함께 옷 갈아입기가 힘들다고 불평을 토로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의적인 선택이었겠지.

인사과가 전체적으로 다 움직이기에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정원이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일까? 내일 당장 물어볼 수 없었다면 아마 주위 신경도 쓰지 않고 물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걱정이 됐다. 남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정원이에겐 좀 더 다른 의미로 받아 들여 질 테니까.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인원들과 합류했다.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왠지 술이 생각나 과장님의 상대를 하며 술을 들이켰다. 술이 한 잔 두 잔 굽이굽이 넘어가 분위기를 설렁설렁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술은 감정을 흐르게 만드는 가교의 역할을 했다. 평소 서로 친근하지 않던 재성선배와 과장님도 서로 한 잔씩 나누며 교류의 장을 열고 있었다.

“과장님, 강휘 이 녀석 진짜 쓸 만하지 않습니까?”

“암, 소주 한 병도 못 받는 너보다야 훨씬 쓸 만하지.”

“아니, 이렇게 나오시깁니까? 인사과 탈주하겠습니다!”

“으하하, 넌 이미 못 나간다! 시스템 구축 반 이상 해놓고 나가려고?”

“야, 강휘야. 이거 봐라. 니가 들어온 자리가 이런 자리다.”

“하하, 영광입니다.”

재성선배는 평소와 다르게 나와 과장님께 은근한 친근감을 보여 왔다. 아마 이쪽의 모습이 진짜이리라. 술은 거짓말을 오려내고 안에 숨어있던 진심을 튀어나오게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받는 칭찬은 오히려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진심과 알코올의 농도가 내 얼굴을 붉혀왔다. 그때 효웅선배와 술을 마시던 유진선배가 술잔을 들고 이쪽 테이블로 찾아왔다. 언뜻 바라보니 효웅선배가 이미 꼴아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까 다른 쪽 친구덕분에 더 떠오르는 신성 같은 느낌도 있구.”

“다른 쪽 친구? 아. 인포 아가씨?”

인사과장님조차 아는 체 하는 걸 보니 정원이 소문이 생각보다 넓게 퍼져있는 것 같았다. 유진선배가 말을 이었다.

“인포에서 손님들한테 설명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면서 정작 남자들이랑은 그렇게 잘 말한다고 하던데요. 저도 동기 중에 인포 한 명 있는데 그러면서 꼽주는 건 다 씹는다구 그러든데.”

“꼽을 주면 쓰나, 꼽을 주면. 잘 알려 줘야지.”

과장님께서 유진선배를 다그치자 유진선배가 과장님께 술을 따라드리며 말했다.

“제가 꼽준 것도 아닌데요, 뭐. 어차피 저쪽 일은 저쪽에서 하는 건데. 뭐 눈치가 없는 건지 무시를 까는 건지 중요한 것도 아니구요.”

“그런가? 뭐, 인포일이야 인포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긴 한데.”

과장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나는 그에 맞춰 술잔을 함께 비우고 바로 과장님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고 술을 받았다.

그러나 내 관심은 오롯이 지금의 대화에 쏠려있었다. 유진 선배가 술을 마셔서 그런지 계속 그 얘기를 하기에 내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근데 그거 다 여자들이 뒷담 까는 거 아니야? 걔가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됐는데 벌써 고문관이니 뭐니 나올 구석이 있나?”

“에이 재성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겠어요?”

“말이야 뭐든 못하겠냐. 세 명이 모이면 호랑이를 만든다는 말도 있잖아.”

“그릉가? 그런 거 같기도 하구? 모르겠다. 우리 빠릿한 신입인 강휘를 위해 건배!”

“건배!” “건배!” “건배!”

그렇게 술을 털어 넣고 나자 정원이 얘기가 더 이상 나올 구석이 없었다. 한참을 마시다가 2차를 가겠냐는 말에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과장님과 유진 선배를 제외하면 모두 파하는 분위기였다. 나까지 빠지면 당연히 이 자리에서 파하겠구나 싶어서 손을 들었다.

“저도 과장님 따라 가겠습니다.”

“하, 이 놈 참. 이거 봐라 재성아, 역시 너보다 낫지?”

“아, 인정합니다!”

재성선배가 실실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과장님을 잘 챙기라는 모습으로 보였다. 2차는 음악이 시끄러운 펍이었다. 회사 근처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다가 앉아서 술을 재차 시키는 유진선배를 보며 물었다.

“근데 효웅선배 원래 술 약합니까?”

“어? 아니? 센 편인데.”

“아까 죽어있던 건…….”

“나랑 내기했는데 졌어.”

“아, 그렇습니까.”

유진선배는 내가 보기보다 훨씬 술고래였던 것 같다. 이전에 맛있는 걸 먹으니 회식자리가 좋다고 말할 때 맛있는 것은 술도 포함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진선배는 자몽맥주 두 개와 생맥을 하나, 그리고 간단한 안주를 하나 시켰다.

“앞으로 야근을 할 우리 막내 강휘를 위하여!”

“위하여!” “하하, 위하여.”

나오자마자 바로 술을 들이키고는 나는 관심이 없는 척 넌지시 운을 뗐다.

“유진선배, 혹시 인포쪽 얘기 더 나온 거 있습니까?”

“어? 관심 있어? 저번에도 걔 얘기 나오면 관심 보이던데.”

어느 쪽으로 답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관심은 없는데 나랑 자꾸 엮여서 그렇다고 말해도 나름대로 납득할 것이고, 관심이 있다고 해도 회사 내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유명해진 정원이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하는 것 역시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은 신중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

“관심 없습니다. 저랑 엮여서 언급이 되니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음, 수상하긴 한데. 일단 그래요. 그냥 찍힌 거 같든데.”

“한 번 눈 밖에 나면 고치기 힘들지.”

기본적으로 유진선배의 말을 꺼내고 과장님도 살을 덧붙여나가며 이야기가 진행되어갔다.

“들리는 불평이야 많지. 말은 우물쭈물하는데 벽치는 주제에 남자들은 꼬이고, 일은 못하면서 괜히 나대고, 또 뭐있더라?”

“벽을 치는데 나댄다는 건 또 뭡니까?”

두 말은 다소 모순이 될 수도 있는 말이 아닌가. 순수하지만은 않은 의문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과장님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말하지 않았나? 그냥 눈 밖에 나면 어떤 행동도 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

“그런가? 하긴 뭐 그렇기도 하네요.”

유진선배도 과장님 말에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불쌍하네요. 거기 여초 쪽이라서 은근히 계속 찔러댈 텐데. 맘 고생 심하겠다.”

“뭐, 우리 부서 일이 아니니 상관할 수도 없지.”

“그래도 같은 회사지 않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유진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과장님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강휘 네가 나서면 너도 같이 더러운 소문이 꼬일 거다. 인사과에 대해서도 안 좋은 이야기를 할 거고.”

“그렇습니까.”

나는 자몽맥주를 들이켰다. 마셔도 마셔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계속 들이마셨더니 어느새 잔이 비어 있었다. 맥주를 내려놓고 말을 잇지 못하던 중에 유진선배가 내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같은 동기라서 걱정될 수야 있겠는데 깊은 사이 아니면 신경 안 쓰는 게 좋아. 과장님 말처럼 너도 피해볼 수도 있어.”

“……예.”

나는 맥주를 한 잔 더 시키고 안주로 나온 소시지를 질겅질겅 씹었다. 맥주가 나오자마자 다시 들이키며 괜한 말을 함께 삼켰다. 뭐라도 물고 있지 않으면 엄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 때 과장님의 핸드폰이 울렸다. 과장님이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만. 어, 어. 어? 아니, 아 들어가죠, 에이, 우리 마눌님이 왜 이러실까. 뭐 사갈 거 있어? 아니, 그러지 말고.”

과장님의 비굴한 모습에 내가 휘둥그레져 있자 유진선배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조용히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 역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애처가셔.”

“그렇습니까?”

“응, 타의적 애처가.”

그 위트 있는 말에 나도 뿜을 뻔 했지만 애써 얼굴을 굳히고 서빙된 맥주를 들이켰다. 술은 현실에게서 눈을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재료였다. 일단 웃음을 참기에 좋다는 점이 지금 이 순간엔 가장 좋은 점이리라. 통화가 끝나자마자 과장님은 세 배는 늙어보였다.

“파하자. 오늘 즐거웠다.”

“예. 즐거웠습니다.”

“네. 담에 또 마셔요.”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유진선배를 챙겨야하나 물었더니 유진선배는 끄떡없다며 반듯한 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했다. 발걸음이 전혀 꼬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취해보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으로 대리를 부르고 회사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과장님이 보이지 않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한참을 웃었다.

“아, 진짜 너무 안 어울리잖아. 큭큭.”

한참을 웃고 나서 곧 대리기사가 왔다. 나는 차키를 넘기고 조수석에 앉아 턱을 괴고 창문 밖을 바라봤다. 창밖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내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일 정원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것에 대해서 최대한 생각했다.

차라리 한 번 웃고 나니 생각이 어느 한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나하나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흘리는 생각 가운데 부정적인 감정만이 오롯이 흘러가지 않고 내 안에 점점 침잠해가고 있었다.

[작품후기]정작 노트북으로 켜보니 차이가 없네요. 메모장도 큰 차이 없었구나...

선작이 어느새 400이 되었네요.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부족한 글에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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