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회
chapter2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러 내려왔는데 마침 정원이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참에 같이 먹을까 하다가 괜히 같은 자리에 갔다가 서로 모른척하기로 한 것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일부러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정원이 역시 오늘도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게 인포에서 식사교대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홀로 식사를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도 정원이는 요즘따라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딱히 풀이 죽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맛없게도 식사를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밥은 썩 나쁘지 않았는데도.
익숙하게 카페를 들려 인사과 인원들의 커피를 사들고 오후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재성선배에게 딸기요거트를 넘기던 참에 재성선배가 말을 흘렸다.
“땡큐, 저 쪽 신입이랑 다르게 우리 쪽은 일을 잘해서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나는 커피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넘기다가 방금 의미를 곱씹어보며 기분 나쁘게 목에 걸리는 듯한 이상함을 감지했다. 최근에 회사에 입사한, 즉 신입이라고 할 만한 대상은 나와 정원이가 유이했다. 나는 커피를 다 넘기고 빈 박스를 정리하며 재성선배 옆에 앉았다.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혹시 저 쪽 신입에 대해서 뭔 말 있었습니까?”
“어? 막내 이런데 관심 있었나?”
“그래도 같은 동기라서 조금 신경 쓰인 것뿐입니다.”
“아 그래?”
재성선배가 딸기요거트를 한 입 빨아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인포쪽 얼굴 반반한 애, 인포팀에서 영 못 쓰겠다 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렇습니까?”
“어. 뭐라더라? 도도한 주제에 일처리는 더럽게 못한다고 그러던 것 같았는데.”
“흠.”
“아, 강휘씨 혹시 그 쪽 신입한테 관심 있어요?”
유진선배가 장난스럽게 나를 찔러보듯이 물었다. 나는 오히려 정색을 하여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냥 궁금해서 그럽니다.”
“에이, 회사 내 이런저런 얘기에 관심 없었으면서.”
“저랑 엮이니까 관심이 가서 그렇습니다.”
“아 그래요? 뭐 요새 다른 파트에서도 솔로인 직원들이 대쉬했다 그러길래 강휘씨도 그런가 했죠. 아마 효웅씨도 까였을 건데?”
그러자 효웅선배가 부끄러운 얘기를 들은 냥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 얘긴 왜 해요. 쪽팔리게. 걔가 완전 철벽인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본인이 잘 했으면 잘 됐겠죠.”
“아니라니까, 진짜 씨알도 안 먹혔다니까.”
효웅선배가 억울하다는 듯이 과장된 제스쳐를 취했다. 유진선배는 그런 효웅선배를 놀리다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뭐 여러 말 나오고 있긴 한데, 일 못한다, 도도하게 군다, 남자가 맨날 붙어있더라. 그 정도 얘기 나오던데요? 정확히야 잘 모르겠지만 우리 부서는 일 잘하는 강휘씨 왔으니까 다행이네요.”
“아 동감.”
“점심시간 끝났다, 일 시작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났는지 과장님께서 떠들고 있는 우리에게 주의를 줬다. 나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며 오후타임 일을 준비했다. 인사업무를 정리하며 나는 정원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걱정이 막연했다면, 이번 것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걱정이 가시화되어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었다. 정원이를 향한 악의어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마 주체는 인포쪽이겠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재차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화요일이었다. 주말이 되려면 한참 날이 지나야했다. 몰래 정원이한테 주중에라도 만나자고 할까? 그렇지만 정원이가 이 소문을 모르고 있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또 다른 걱정의 꼬리를 물고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걱정을 털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일을 하자. 고민을 한 구석에 몰아놓고 나중에 퇴근하고 나서 정원이와 카톡을 하든 통화를 하든 그것도 아니라면 나 혼자서 생각을 좀 정리하든 하자. 우선은 내 앞에 닥친 이 일부터 끝내고.
***
회사가 끝나고 퇴근을 하고 난 후에 정원이에게 카톡을 언제 날릴까 고민하다가 9시쯤 되어 이 시간이면 퇴근도 했을 것이요, 씻기도 했겠지 싶어 카톡을 쳤다. 바로 응답이 없어 전화를 하려다가 급한 일도 아니라 핸드폰을 던지고 컴퓨터를 켜서 쉬고 있던 차였다. 핸드폰에 수신음이 울렸다.
까톡
[나 : ㅎㅇ]
[다정원 : ㅎㅇ왜?]
[나 : 먼 일 있어야 톡하냐?]
[다정원 : ㅈㄹㄴㄴㅋㅋㅋ]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넌지시 떠볼지 아니면 직접적으로 요즘 소문 도는 거 들어보았냐고 물어볼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닌 선택지를 골랐다.
[나 : 요새 힘든 거 머 없?]
그러자 잠시 응답이 멈췄다가 다시 알람이 울렸다.
[다정원 : 별 일 x]
[나 : 요새 표정 개같든디?]
[다정원 : 일나가서 안힘든게 말이대냐 넌 어떤데]
[나 : 그럭저럭임]
[다정원 : 요새 잘 나가네 한강휘]
[나 : ?ㅂㅅ임?]
[다정원 : 아니 그럭저럭이면 잘대는거지 ㅅㅂ]
[나 : ㅈㄹㄴㄴ 근데 ㄹㅇ 괜찮?]
[다정원 : 오늘따라 징그럽게 왜 ㅈㄹ임;]
[나 : 아니 ㅅㅂ 걱정해줘도 ㅈㄹ임?]
[다정원 : ㅗ 이번 주말에봐 잔다 ㅃㅇ]
[나 : ㅇㅇ....]
한숨이 나왔다. 카톡은 이게 불편했다. 면대면 대화가 아니기에 정보가 너무 제한됐다. 정원이가 정말로 괜찮은지 아니면 귀찮은지, 혹은 괜찮지 않은데 말을 돌리는 건지도 확실치 않았다. 언어란 이렇게도 조잡한 것이었다.
옛날 전공공부를 하다가 어디서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 표현에 대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람은 말보다 눈빛, 제스쳐, 표정, 억양 등 비언어적인 표현을 통해 더 많은 메세지를 전달하며, 메세지를 전달받는 대상 역시 말보다는 그러한 비언어적인 표현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이론이 담긴 논문이었다.
이 상황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프론트에서 웃는 가면을 쓰고 점점 흐려져 가는 정원이의 표정만이 떠올랐는데 정작 정원이는 괜찮다는 말밖에 하고 있지 않았다. 이 두개의 모순되는 표현 속에서 나는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좀 더 자연스럽게, 넌지시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에겐 그저 요망한 일이었다.
완전히 꿀꿀한 것은 아니었지만 편치는 않은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닥쳐왔다. 뭔가 마음속에서 응어리가 맺히는 듯한 기분 나쁜 감정이었다. 나는 이 감정의 원인을 알고 있었으나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언젠가 정원이가 나에게 털어놓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런 생각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피네가 없는 점이 악랄한 도돌이표였다.
***
며칠이 지나 기다리던 금요일이 됐다. 사실 금요일보단 주말을 더 기다리는 것이긴 하지만 나는 대체로 금요일이 좋았다. 왠지 정작 주말이 되면 내 금쪽같은 쉬는 시간이 점점 줄어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히려 주말이나 휴가를 염원하는 마음이 가장 커지는 휴가 전 날이 좋았다.
금요일이라는 날은 나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직장인들에게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멀리 살고 있는 애인을 만나러 갈 수도 있는 날이며, 토요일은 쉬기 때문에 밤을 새며 자신의 취미를 즐길 수도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금요일이 회식을 잡기에도 가장 좋은 요일이라는 의미도 포함했다.
“오늘 회식이다.”
“예.”
속으로 시발소리가 나왔다. 겉으로도 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볼멘소리가 섞여 나올 것 같았다.
“아.너.무.즐.겁.다.”
그리고 실제로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성욱선배였다. 방금 금요일을 생각하며 떠올렸던 멀리 사는 애인을 사귀고 있는 선배였다. 과장님 역시 사정을 알고 있기에 성욱선배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집 안에서 마누라가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칠 거니까 오래는 못 마신다. 얼굴 풀어라.”
“에휴, 예.”
그런가 하면 회식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효웅선배와 김유진씨가 그런 부류였다. 굳이 말하자면 김유진씨는 평소에 사먹을 수 없는 비싸고 맛있는 것을 꽁돈으로 먹는다는 것을 즐기는 부류였고, 효웅선배는 회식자리 그 자체를 즐기는 부류였다. 둘은 벌써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일을 하고 있었다.
적당히 인원들의 현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회사가 이제 중소기업으로 올라가서 그런지 인사과의 업무는 각 과에서 원래 하던 일들을 조금씩 떼와서 인사업무를 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원래는 인사 명령도 잘 내지 않고 움직였다고 하니 그 수준을 알 법했다.
내가 들어온 것은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도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맨날 과장과 팀장이 퇴근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나나 효웅선배 같은 말단들이야 있어봐야 도움이 안 되니 바로 칼퇴근을 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이런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와중이기 때문에 인사명령이나 인적자원관리를 하나하나 수작업에 가깝게 시행해야 한다는 일이었다. 즉, 인원관리만 하는 데도 오전시간이 전부 날아갔다. 단순한 소모성 일이라는 게 더 골치가 아팠다.
“이거 시스템화를 좀 하면 안 되나…….”
“그래서 하고 있잖냐. 너도 한 손 거들래?”
혼자 중얼거린 것을 어떻게 들었는지 재성선배가 음산하게 답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피안화로 끌어들이는 귀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충실하기로 했다.
“두고 보자, 너도 꼭 이 일 거들게 한다.”
“뭐야. 강휘 너도 관심 있나?”
그걸 또 귀가 밝은 인사과장님이 캐치하시고 물어왔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나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 알려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큭큭.”
내가 재성선배를 바라보자 재성선배는 고개를 돌리고 나를 비웃고 있었다. 방금 전과 입장이 역전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인사과장님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손가락으로 불렀다. 내가 자리에 가자 인사과장님이 입을 여셨다.
“그럼 오늘 하던 일은 전부 효웅이한테 인수인계하고 넌 오늘부터 내 옆으로 와서 인사 시스템 구축 배워라.”
“흡, 옙!”
나도 모르게 숨 참는 소리가 튀어나와 겨우 눌러 담고 힘차게 대답했다. 장난으로 말하신 줄 알았는데 인사과장님은 진심으로 한 소리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나도 얼굴에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었는지 인사과장님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 일 잘해서 시키는 거야. 실망시키지 말도록.”
“예!”
정신을 차리고 힘차게 답하자 인사과장이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재성선배와 민경아 팀장이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처럼 보였다. 아, 정말이지 입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옛 말은 틀린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 역시 이 불편하고 의미 없이 반복해야 하는 인사관리에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왕 하는 거 이번에 확실하게 시스템을 구축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오자 효웅선배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헬게이트 오픈된 기분입니다.”
“어휴, 지옥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인수인계야 어차피 다 너 오기 전에 내가 하던 일이니까 그냥 파일만 넘겨.”
“예.”
딱 오전 중에 했던 파일을 넘기니 점심시간이 됐다. 효웅선배와 밥을 먹으러 식당을 내려가는데 효웅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효웅선배를 바라보다가 효웅선배도 고개를 돌리지 않아 묘하게 눈싸움을 하는 구도가 됐다. 좀 더 버틸 수는 있었지만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싶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선배를 이겨봐야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효웅선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카드 내놓으라고. 오늘부터 다시 커피당번 나니까.”
“……대체 얼마나 빡센 겁니까, 이 업무?”
“글쎄, 나는 맨날 칼퇴하니까 모를 일이지만 팀장님이랑 재성선배는 하루도 쉬지 않고 야근하더라.”
“이런, 씹…….”
그제서야 나는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에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이고 내 신세야. 입만 열면 한탄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던 길에 습관처럼 인포를 바라보니 이번엔 식사가 후번이었는지 정원이가 있었다.
그리고, 눈에 익지 않은 남자 하나가 정원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포카리스웨트 하나를 넘기며 은근슬쩍, 정원이의 손을 마주 잡으려 하는 장면이 망막에 서렸다.
[작품후기]강휘 차 색은 검은색입니다. 강휘도 입사 첫 주엔 안 끌고 댕기다가 한 달 되기 전 쯤에 과장에게 허락맡고 끌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과장은 이런 거까지 보고하는 강휘에게 그 때 좋은 감정이 생겼습니다.
이런 뒷 사정은 어지간하면 그냥 넘기려구 합니다. 정원이 없는 파트가 너무 길어져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얘기 같아서용.
항상 부족한 제 글을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 갑사드립니다. 요즘 이상하게 선작이 잘 오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