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회
chapter2내게 있어 가면을 쓰는 것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 있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내 본의와 가까울수록 수월했고, 반대로 먼 역할을 연기할수록 더욱 힘든 것은 맞았다.
그런 가면들 중 특히나 어렵게 여기는 것은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객관적으로 볼 때 꽤나 자만하기 쉬운 편이었으며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길 좋아했다. 그나마 요즘은 모순되게도 정원이덕분에 이런 가면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하여간에 오늘 아침에 회사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은 그런 내게 있어 호류를 타는 것과 같았다.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좋은 흐름이었다. 인사과장님이 오늘도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한 나를 조용히 손짓하여 불렀다.
“오늘부턴 배운 것에 대해 일지를 작성하도록.”
“예.”
나는 분명 알겠다고 답했으나 내 눈에는 무엇을 적으라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과장님은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부턴 효웅이 녀석에게 붙어. 그 녀석이 뭘 해야 할 지 알려 줄 테니까.”
“예.”
역시 차례차례 인사과 인원들이 출근을 하고 회의 시간이 되자 자연스럽게 인사과장을 중심으로 인원들이 모였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일을 분배하던 과장님은 효웅선배를 지목하며 말했다.
“오늘부턴 신입한테 뭐 해야 하는지 효웅이 니가 밀착마크해서 책임져라.”
“어, 그럼 이제 저 막내 졸업 맞죠?”
“너 하는 거 봐서.”
“오예! 알겠슴다!”
효웅선배가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었다. 이제서야 인사과에 들어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업무가 시작하자마자 효웅선배는 ‘내 좌석’을 자신의 옆자리로 옮겼다. 비어있었던 그러나 내가 앉지 못했던 자리였다.
이번엔 내가 선배의 화면을 뚫어져라 봐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나는 인원관리, 인원파견, 인원현황 체크하는 법, 기타 일일업무처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효웅선배는 경박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의외로 꼼꼼하게 요소별로 가르치는 것에 능했다.
“어, 그리고 어차피 한 달 정도는 강휘가 좀 빼먹어도 내가 체크해 줄 거니까, 일단 한 일은 나한테 보고하고.”
“예 선배.”
“어? 선배? 아! 그렇지! 선배지! 아 기분 좋은데!”
효웅선배는 방금 보이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다시 가벼운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해는 갔다. 나도 처음 후임이 들어왔을 때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마 그런 기분이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이 좋게 보일 때였다. 지금 삐딱선을 탔다간 인사과에 있는 동안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요 일주일동안 내가 생각해도 바른 모습만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인사과장도 나에 대해서 나쁘게 보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시작선이 썩 나쁘지 않았다. 효웅선배는 그러다가 깜빡 잊은 것이 떠올랐다며 내게 엄포했다.
“아, 제일 중요한 걸 안 말해줬네.”
“그게 뭡니까?”
“인사과 신입은 점심시간에 커피를 사와야 해. 너도 보다시피 과장님이 좀 꼰대셔서…….”
“김효웅!”
“이크, 아닙니다!”
인사과장님은 장애물이 없는 만큼 귀가 밝았다, 메모메모. 하긴 귀는 밝아도, 효웅선배가 이런 말을 가볍게 하는 것을 보면 이마만큼 마음은 넓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효웅선배에게 카드를 받았다. 커피 값은 이 카드로 긁으면 된다는 모양이었다. 법카로 처리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회식을 다른 팀보다는 좀 덜 한다고 했다. 아싸기질 덕에 회식조차 스트레스로 느껴지는 내겐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바로 내가 배운 것을 빠릿하게 시행했다.
“혹시 커피 뭐로 고르십니까?”
“아메리카노 세개, 바닐라 라떼 한개, 카페모카 한개, 딸기요거트 한개에 강휘씨 거 하나 고르면 되요. 아 혹시 오늘 기분 다른 사람?”
김유진씨가 대표로 답해주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대로 사와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까먹지 않기 위해 입사를 하면서 들고 다니기 시작한 노트에 메모를 했다. 그러자 민경아 팀장님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을 했다.
“보통은 핸드폰에 적던데 따로 노트를 들고 다니나 보네요.”
“혹시 모를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배우는 입장에서 하나라도 더 까먹지 않으려고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좋네요.”
민경아 팀장에게 플러스 점수로 작용한 것 같았다. 이 역시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름대로 성실함을 어필하기 위해 사용했던 장치가 한 발 늦게 제대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뒤늦게라도 톱니바퀴가 딱딱 맞춰 돌아가는 쾌감이 들어 속으로만 나이스를 외쳤다.
식사를 하러 내려갔는데 오늘은 정원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상할 정도로 요새 밥을 먹을 때마다 정원이가 있긴 했었다. 밥을 먹자마자 바로 커피숍에 가려고 하니 같이 먹던 효웅선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야야, 너무 빨리 사가도 안 돼.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예, 선배님.”
다음부터는 좀 더 천천히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하나가 마음에 들자 다음 것도 맞아떨어졌다. 작은 행운이 비탈길에서 구르며 눈덩이처럼 불어나가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을 가는 길에 인포를 봤는데 정원이가 혼자 서있었다. 정원이도 혼자 서있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식사교대를 하느라 혼자 서있는 것이리라. 내가 바로 식사를 했으니 아마 식사는 아직 못했으리라.
나는 애써 정원이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정원이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는 커피숍으로 가서 적어놓은 메모를 봤다. 아메리카노 세개, 바닐라 라떼 한개, 카페모카 한개, 딸기요거트 한개. 나는 내 몫의 아메리카노까지 포함하여 법카로 긁고 작은 쿠키를 하나 내 카드로 샀다. 그리고는 조금 서둘러서 회사에 돌아왔다.
정원이는 아직도 혼자 서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을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슬쩍 인포데스크의 옆을 지나가면서 쿠키를 던지듯이 놓고 왔다.
“어차피 지금은 못 먹는다고.”
웃음기 섞인 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릴랑 말랑 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인사과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인포에 서서는 못 먹겠구나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뭐 그래도 긴장 좀 풀고 힘내라는 의미가 전해졌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 행운은 충분히 불었으니까 너에게도 조금은 전해지길.
오후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커피를 하나하나 자리를 찾아가며 전해드렸다. 조금 놀랐던 점은 딸기요거트를 시킨 것이 한재성선배였다는 점이었다. 인상은 깐깐하게 생겨서 딸기요거트라니. 내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였건만 오히려 재성선배 쪽에서 핑계를 대듯이 말했다.
“커피 못 마신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사표현이었다. 다행히 재성선배쪽도 내게 어떤 반응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음 자리로 옮기자 재성선배는 내게서 신경을 껐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조금 졸릴 것 같았지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며 정신을 차렸다. 효웅선배의 모니터를 바라봤더니 효웅선배가 오른손으로 책상모서리에 짚으며 몸으로 내 시야를 가렸다.
“오후는 오전에 배운 거 보고서 쓰는 시간이야.”
“아, 예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라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효웅선배가 손가락으로 내 자리의 컴퓨터를 가리켰다. 컴퓨터를 키자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아, 그거. a13243546! 이고, 비밀번호는 편할 대로 바꿔~. 바꾸는 편이 좋아.”
“예.”
비밀번호를 내가 편할 대로 바꿔놓고 방금 배운 프로그램 조작법을 떠올리며 문서를 켰다. 그 문서에 오늘 배운 내용을 하나하나 적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혹시 검토는 뽑아서 받아야 합니까?”
“어, 사내 메신저로 보내. 아, 그것도 알려줘야 되는구나?”
“벌써부터 좋은 거 가르친다.”
“앗, 죄송함다.”
효웅선배가 재성선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뭐가 문젠지 싶었는데 효웅선배가 민망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사실 사내 메신저로 보내도 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데 뭐, 이건 보내도 되는 쪽이긴 한데 꼼수부터 가르치지 말란 소리야.”
“그렇습니까?”
“뭐, 하여간에 보내. 이게 뭐 특별한 비밀인 것도 아니니까.”
“예.”
내가 메신저로 보내자 효웅선배는 대충 훑어보더니 단어를 한 두개씩 지적했다.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었으나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어휘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이 역시 군대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옛날에 공문에 단어하나 잘못 썼다가 소대장에게 두 시간을 갈굼 당했던 행정병 녀석이 떠올랐다.
나는 그 단어들도 하나하나 메모지에 적었다.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웃는 얼굴로 고쳐줄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각 개인마다 다른 인내의 영역이었다. 선배들의 인내의 한계를 굳이 내가 체크할 필욘 없었다.
체크 받은 표현을 다 고치고 과장님께 보고서를 드리려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간단한 것도 물어봐야 한다는 게 애매했지만 결국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효웅선배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뽑아야합니까?”
“아, 설명 안 했었네? 설명해 줄 테니까 이 내용도 보고서에 넣어서 제출해야 돼.”
“예.”
보고서를 뽑아서 과장님께 들고 가자 과장님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보고서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몇 가지를 짚으며 설명했다.
“이거랑 이건 다시 써오고, 다음부터는 서류철이랑 같이 가져와라.”
“예, 알겠습니다.”
보고서를 다시 고쳐서 내자 과장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두고 가라고 하셨다. 아마 저렇게 모인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하던가 하겠지. 그 작업까지 끝내자 어느새 퇴근시간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효웅선배가 퇴근시간에 딱 맞춰서 도망가듯이 퇴근을 했고 다른 인원들은 몇몇은 퇴근하고 몇몇은 야근준비를 했다.
야근준비를 하는 것은 민경아 팀장님과 한재성 선배와 고성욱 선배였다. 고성욱 선배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어서 돌아가란 표시였다. 나는 성욱 선배에게 고개를 숙이고 퇴근을 했다.
퇴근을 하는 길에 인포를 바라보니 아무도 없었다. 저번 주에는 어땠나 싶었는데 저번 주는 나도 힘들기도 하고 정원이를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으려고 인포를 바라보지 않았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마 인포데스크의 퇴근시간도 내 퇴근시간과 동일한 것 같았다. 빈 데스크를 슬쩍 바라보니 쿠키가 사라져있었다. 잘 먹었으면 됐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어느 날은 조금 혼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칭찬을 들으면서 한 달여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나도 슬슬 내 업무에 익숙해져가는 와중에 새로운 것을 또 배우고 다시 익숙해져가는 와중에 다시 새로운 것을 배워갔다. 어느새 오늘 배운 것 보고서 따위는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차 역시도 몰고 다닌지 좀 됐다. 그런 사소한 변화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듯 내 운신의 폭이 더욱 넓어졌지만 신입이라는 감투는 책임감만큼은 짊어지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히 해야 했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아니, 오히려 보이지 않았기에 더 위험한 함정이었다. 달콤하고 치명적이며 악랄한 함정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 할 일은 다하자는 주의에 주위에 트러블을 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이 회사가 아버지가 이사자리에 있는 회사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모난 곳 없이 열심히 하며, 심지어 선배들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고, 튀려고 하지 않는 신입을 싫어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다행히도 이 부서엔 그런 극소수의 사람이 없었다. 내 자신에 대한 평가가 고평가라는 점에 대해선 조심해야 할 바이지만, 적어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호의적으로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다 잘 맞아떨어져가고 있었다. 오직 내 태엽만큼은 그랬다. 나는 출근하면서 인포데스크를 바라봤다. 정원이가 또 홀로 서있었다. 인포데스크엔 이런저런 간단한 음료들이 있었다. 이전엔 없던 것들이었다. 내가 둔 것 역시 아니었다.
정원이의 불평불만을 들어준 것도 2주전이 마지막이었다. 저번 주엔 오히려 정원이는 내게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같이 던파나 하자며 말없이 게임만 했다.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 점까지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불만은 ‘도저히 선배들이랑 같이 탈의실은 부끄러워서 못 쓰겠다.’ 였다. 그래서 조금 더 일찍 출근을 하고 조금 더 늦게 퇴근을 하는데, 그게 점점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정원이가 아직 성에 대한 모호성을 지니기에 생긴 델리케이트한 문제였다.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정원이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내게 불평불만을 털어놓지 않는 걸까? 확실치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주 안엔 물어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네 표정이 점점 무너져 내릴 것 같았으니까.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왜애앵, 왜애앵, 진돗개 하나, 진돗개 하나.
[작품후기]기승전결로 치면 승이 시작됩니다. 이번 챕터는 한 사건의 승과 전이 유독 길 예정입니다.
저번 코멘트에 대해 몇 개 답변. 신입 기죽이는 회사의 방식은 어떤 곳은 하고 있고, 어떤 곳은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점점 더 하지 않는 추세이리라 생각합니다.
정원이는 어쩌다보니 강휘랑 같이 회사를 다닐라고 어울리지도 않고 잘 하지도 못하는 인포를 하게 됐습니다. 이전에 강휘가 지껄여 놓은 개소리 덕분 입니다... 그래서 강휘가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점도 분명 있을겁니다.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항상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힘을 얻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