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44화 (44/138)

44회

chapter2정하에게 혼나고 나서 배고프지 않냐며 점심을 먹자고 정하를 간신히 달랬다. 물론 뭘 하기엔 시간도 늦었고 하여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서 배를 채우자 여유가 생겼다. 그 덕분에 나는 문득 정원이가 나를 맞이했을 때 했던 괘씸한 소리가 다시 생각이 났다.

정원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지껄여본 소리일지도 모르겠으나, 괜히 나온 소리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원이가 왜 그런 개소리를 한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너 근데 아까 다리 주물러 달라는 건 뭔 개소리였냐?”

“아니 장난 아니고 요새 계속 서있어서 다리 팅팅 부었어. 존나 아파.”

“아, 뭐 출근하고 계속 서있냐?”

“어. 일 배우라고 계속 같이 서있어서, 선배들이야 교대하는데 나는 배워야 되는 입장이니 교대하기도 뭐하고 해서 계속 서있지 뭐.”

정원이는 점심을 먹자마자 퍼져서는 엎드려있는 상태였다. 정원이는 마침 잘 물어봤다는 심보인지 뱅글 뒤돌아 똑바로 누워서는 팔을 버둥거리며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좀 주물러 달라구. 너는 사무직이라서 최소한 몸은 안 힘들 거 아냐.”

“정하한테 해달라고 하지 왜.”

“저 가스나 지도 일하는데 나 혼자 힘든 척 오지게 한다 그러잖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정하가 째려보자 정원이가 입을 닥치고 또 쭈굴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까지 같이 혼나던 동병상련이 느껴져서인지 측은하기도 하여 정원이 옆에 가서 앉았다.

“해줄테니까 엎드려.”

“정말? 야호! 땡큐!”

정원이는 언제 쭈구리가 됐냐는 냥 다리를 내 쪽으로 쭉 내밀고 베개를 가져와서 엎드렸다. 나는 위쪽 허벅지부터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누르면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안마를 잘하는 편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군대에서 화를 내던 선임새끼들도 입을 닥칠 정도로 평이 썩 좋을 정도였다. 정원이 역시 금방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으으응. 아으.”

“야, 이상한 소리 좀 내지마라.”

“아니, 너 진짜 존나 잘해서 그래, 시발.”

“너, 에휴, 됐다. 시발.”

나는 그냥 정원이의 반응을 무시하고 정원이의 다리를 풀어주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정원이가 마냥 엄살을 부린 것은 아니었는지 다리가 꽤나 팅팅 부어있었고, 근육이 뭉쳐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게 다 정원이가 일주일간 한 고생을 대변하는 것 같아 조금은 기특했다. 이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그 자리에서 회사의 얼굴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웃긴 것도 사실이었다. 정원이가 신음소리를 내며 점점 풀려버리자 정하가 옆에서 정원이에게 물었다.

“언니, 강휘 오빠가 그렇게 잘해?”

“어어, 진짜 최고오오. 아응!”

“와, 나도 해주면 안 돼?”

“아서라,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느니라.”

“다정원도 여자거든?”

“정원이는 정원이고.”

나는 그리고는 정하의 말을 무시하며 천천히 허벅지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장딴지로 그리고 발까지 이어 마사지하며 발가락 하나하나 전부 꼼꼼하게 주물렀다.

한참을 주무르다가 내 손도 아프고 정원이가 부어있다는 것도 떠올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냉동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냉동실에서 얼음을 비닐봉지에 담아 그것을 수건으로 감싸서 정원이의 허벅지를 살살 문질러줬다. 그러자 정원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어으아으어, 디지겠네 진짜. 아, 최고오오오.”

“아니 씹, 공들여서 주물러주는데 뒤지겠다 그러냐? 돌겠네.”

“아니, 아응, 최고라고오오.”

“에효. 끝!”

얼음찜질을 마지막으로 마사지를 마치자 정원이가 만족한 얼굴로 완전히 드러누웠다. 노곤함이 척보기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이는 앓는 소리를 한참 내다가 다시 몸을 뒤집어서 정자세로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혹시나 자나 싶을 정도였다.

“자냐?”

“아니요옹.”

“글케 힘드냐?”

“넌 안 힘드냐 그럼?”

정원이가 별 거 아닌 것처럼 날린 질문에 순간적으로 목이 턱하고 메는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쪽팔리고 자시고 자존심을 벗어던지고는 정원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뻔 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답했다.

“아니 뭐, 그럭저럭이지.”

“……많이 힘드냐?”

내 말을 듣더니 푹 퍼져있던 정원이가 자세를 바로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야, 마사지한 값이다. 뭐라고 징징대도 다 들어줄 테니까 일단 말해봐.”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야 나 진짜로 화내기 전에 말해라?”

사실 나 역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다 내뱉고 싶을 정도였다. 하물며 정원이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도 정원이를 마사지해줬으니 조금은 앓는 소리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에게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도 말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내 마음의 빗장은 그렇게 하나하나 걷어져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정원이의 눈을 마주보고 있자니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애가 잘못한 것을 변명하는 것처럼 조금 웅얼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아니, 뭐. 그냥. 별 건 아닌데.”

“어.”

“그, 회사에서 좀 무시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뭐?”

“아니, 그냥 혼자 앉혀놓고 눈치껏 배우라고는 하는데, 뭔가 관심병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아, 그거.”

그러자 정원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 만 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원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건 곧 해결 될 거야.”

“뭐?”

“아,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에이, 원랜 니가 스스로 눈치 채는 게 좋은데 너야 이번이 회사 처음이니까 몰라도 어쩔 수 없지.”

“그게 뭔데.”

“말해줘도 되나? 에이, 맘 고생하는 것 보다야 낫겠지. 쉽게 말하면 텃세야 텃세.”

“텃세?”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반문하자 정원이는 다시 손사래를 치며 말을 고쳤다.

“아니다. 텃세라기보단 신입 기죽이기? 아니면 기강 다지기? 아! 너 알기 쉽게 말하면 새로 들어온 이병한테 괴롭히진 않는데 눈치만 주는 거.”

“아, 아!”

그제서야 나는 내가 무슨 취급을 받고 있는 지 깨달았다. 인사과에선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어떠한 형태로 길들이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내가 군대에서 운이 좋게 당하지 않았고, 내 의지로 행하지 않아 금방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었다. 뜬구름의 실체를 낚아채자 꿉꿉하고 찜찜한 기분이 사라졌다. 정원이는 이어서 말을 했다.

“그거 아마 니가 쓸 만한지, 금방 그만두진 않을지, 대충 그런 거 재고 있는 걸 거니까. 이제 일주일 지났나? 아마 곧 끝날 걸? 오히려 그거 끝나고 나면 진짜 회사 일 시작이지.”

“그런 거였구나.”

길들인다는 것이 썩 그렇게 부정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그들에겐 그들의 문화가 있을 것이요, 그들에겐 그들의 관습이 있을 것이요, 그들에겐 그들의 규칙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속하는 일원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를 규격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 이것도 나와 정원이의 생각일 뿐이고 그냥 단순히 내 기를 죽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나와 정원이의 가설 쪽이 더 내가 이해하기 쉬웠다. 왜냐하면 인사과에서도 나름대로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티는 내고 있었으니까. 정원이는 이미 회사를 다녀봤기에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정원이는 그렇게 말하다가 난감한 티를 냈다.

“아 근데, 너 이거 아는 척 하면 안 될 건데. 신입이 아는 것처럼 느껴지면 오히려 좀 마이너스 점수라고 해야 하나.”

“뭐 눈치껏 해야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 잘 아네.”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버지께서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도 대충 이해가 갔다. 이 또한 지나갈 일이었으며 통과의례였다. 아버지께서 왜 인사과장에 대해서 조금 실망한 듯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완벽하게 이해를 했다.

동시에 무게 추가 조금 기울었다. 정원이에게 받은 게 너무 큰 탓이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정원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말했다.

“너는 힘든 거 뭐 없냐?”

“야, 말도 마라. 아니, 나보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 들어가냐, 왜 허리는 쭉 안 펴냐, 제복은 왜 또 그렇게 입었냐 그러는데!”

정원이도 한참을 투덜거렸다. 정원이는 대체로 여자로써 익숙하지 않은 정원이에게 여성스러움을 강요한다던가, 여성과 대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정원이에게 뜻 모를 의사소통을 한다던가, 혹은 가만히 서있는 것 자체가 좀이 쑤시다는 점 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적당히 공감을 해주며 정원이를 달랬다.

“그래서, 또, 아니 근데 여자들은 원래 서로 터치도 하고 그러나?”

“어, 그러는 사람도 있어. 근데 어느 정돈데?”

“아니 그냥 손잡고, 등 두드리고 그런 정도?”

“그 정도면 이상한 정도는 아니네.”

내가 대답하기 힘든 문제는 정하가 옆에서 거들었다. 정원이는 한참을 불평불만을 하고나서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이 열성을 다해 토해냈다. 한 시간정도 지나자 내 마음속의 저울의 추가 다시 평행을 이뤄가고 있었다. 그래도 배은망덕하게 내 불만을 들어주던 정원이의 대놓고 끊기는 싫었기에 정원이를 격려해줘서 입을 막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려라, 격려를 떠올리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정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냐, 수고했다. 너도 고생이 많았구나.”

“아니, 에휴.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정원이는 내 손을 때내려고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저번 다툼 이후로 정원이는 내게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 눈에 띠게 보였다. 굳이 말하면 참는다기 보다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느낌이 강했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실수했나 싶어 멈칫했지만 정원이가 순순히 받아들이니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실수로 손을 댄 것 치곤 정원이의 머리카락은 퍽이나 감촉이 좋았다. 정원이를 격려하려고 한 행동인데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머리를 쓸어내리고 있자 정원이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정원이를 조심스럽게 눕혀놓고 정하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정하도 얌전히 얇은 이불을 가져와서 정원이에게 덮어주었다. 정원이는 입맛을 다시며 꿈나라로 떠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니 나 또한 졸음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오늘은 원래 정원이와 피시방이나 가서 던파나 하려고 했지만, 차라리 이렇게 푹 쉬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도 자게?”

“어. 좀 졸립네.”

“그럼 차라리 그냥 침대에서 자.”

“어, 그래.”

나 역시 졸음에 취해 정하가 이끄는 대로 향해 드러눕고 포근하고 아득한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힐링이 되는 하루였다.

***

일요일엔 아버지를 따라가서 차를 한 대 샀다. 토요일에 정원이네 집에서 한숨 돌려서 여유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인생의 첫 차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설레는 마음이 가득 했다. 결국 산 차는 k5였다. 첫 차로 험하게 몰기에도 나쁘지 않다는 이유였다. 오랜만에 장롱면허를 꺼내서 차를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몰아봤다. 아버지를 조수석에 태우고 몰아본 것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 열댓 번은 넘게 혼났다.

“내일부터 몰고 다니는 건 자제하는 편이 낫겠구나.”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긴 했습니다.”

“너도 네 실력이 걱정돼서 그러냐?”

“아뇨, 아직은 좀 신입사원으로서 눈치 좀 봐야 될 것 같아서요.”

그러자 옆에서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새삼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새 눈치를 챈 모양이구나.”

“좋은 친구를 둬서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좋은 친구로구나.”

옆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아버지의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환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예상이 됐다. 이번엔 다소 확실했다. 아버지께서는 나보고 주차장이든 집 주위든 하여간에 주행을 좀 해보라고 하셨다. 나 역시 그래야할 것 같아서 집 주위에 차를 몰고 다니며 일요일을 보냈다.

주말이 지났지만 저번 주처럼 축 쳐지거나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서 새롭게 다짐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도 강수 확률이 책정되어 있었다. 전번에는 그러고도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산을 챙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 오늘도 힘내자.”

집을 나서자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햇빛을 보며 잡생각을 하던 저번 주와는 달리 햇빛이 마냥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깨를 감싸고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 응원에 힘입어 나는 힘차게 발걸음을 디디며 회사로 향했다.

[작품후기]이유만 알게 되면 정말 괴롭게 느껴졌던 일도 별 거 아닌 것처럼 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저번 코멘트를 보다가 신입길들이기라는 걸 단번에 알아 차리신 분이 있어서 역시 어딜가나 다 비슷한가 싶었습니다.

정원이랑 놀다보니 스토리 전개가 늦어졌네요. 다음 화부터는 다시 스토리가 궤도에 오를 예정입니다. 하하... 뭐 지금까지 쓴 것도 다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항상 부족한 글 관심 가져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힘내서 글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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