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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40화 (40/138)

40회

chapter2어렸을 적에는 스파이 영화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며 기대하던 일종의 로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비밀장소에 대한 동경이었다. 고풍스러운 책장 사이에서 특정한 책을 꺼내면 보이는 범상치 않은 버튼,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리는 책장, 그 안으로 보이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 결국 도착하면 벽에 걸려있는 각종 총기들과 최첨단 장비들이 보이는 그런 풍경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이런 허무맹랑한 로망은 식어만 갔지만 아직 그런 울렁거림이 조금은 남아있어서였을까? 나는 지금 괜시리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국정원 직원이 정원이를 부른 장소는 네이버 지도에서도 검색이 되는 유명한 대학 병원이었다. 적어도 동네 한 구석에 박혀있는 한적한 병원이었다면 조금은 더 두근거렸을까싶었다.

내가 실망하는 것과는 반비례하여 신뢰감은 올라갔다. 유명한 대학병원이니만큼 더 확실한 검사가 가능하리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병원 근처에 도착하자 이 전에 본 인상이 흐릿한 사내가 정문에 서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혹시라도 헤매실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잘 찾아오셨습니다.”

“지도 찾아서 오는데 헤맬 일이 있나요.”

“그렇군요, 하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자 기다리는 시간 없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척 보기에도 유능하다는 느낌이 드는 젊은 여자였다. 정원이가 조금은 어색해하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의사는 그럼 일단 피검사부터 하시죠. 라며 여러 가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모든 게 정원이가 우선시 되어 지체되는 시간 없이 검사를 한다는 점 말고는 특별한 점이 없는 검사였다.

정원이가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사내와 함께 프론트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동안 한 마디도 없이 서로가 핸드폰이나 바라보고 있었지만 별로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면 더욱 불편했으리라.

나는 핸드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정원이를 검사해보고 관련 실험도 하겠다는 건데, 혹시 정원이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과연 정원이가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다면 정원이는 그것을 어떻게 여길까.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관계는 이전처럼 돌아올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비어있는 시간은 쓸데없는 시간이 몸을 불리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이런저런 검사가 끝나자 정원이가 비적비적 내게 다가왔다. 정원이는 아무 말 없이 옆으로 와서 앉아있었다. 정원이는 살짝 얼이 빠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고야, 정신이 없네 정신이.”

“그러냐?”

“어, 옷 갈아입고 피 뽑고 뭐 찍고 그래서 그런가 정신이 없다야.”

말마따나 정원이는 조금 어지러웠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느새 정원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이번에 검사하면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어쩔래?”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음에도 정원이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정원이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오히려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웃을 수는 있겠네. 지금처럼 말고 더 후련하게 말이야.”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인데?”

“아니야. 음, 아닌가?”

정원이가 짓고 있던 표정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 똑같이 웃고는 있으나 조금 장난기가 서린 웃음이었다.

“응, 괜한 질문 맞네. 괜히 마음이 뒤숭숭하잖아. 이 나쁜 자식아.”

정원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구리를 툭 쳤다. 그 때까지만 해도 괜히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의사가 정원이를 불렀을 때 나는 괜한 질문을 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의사는 여러 가지 데이터가 적힌 종이와 정원이를 찍은 MRI사진 등을 짚으며 말했다.

“다정원씨는 완벽하게 여성입니다. 솔직히 이전에 남성이었다고 정보를 전달받기는 했습니다만, 검사 결과만 보면 전혀 그런 흔적이 없네요.”

정원이는 조금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별 생각이 없이 던졌던 말이 혹시라도 정원이에게 괜한 희망을 줬다가 뺏은 게 아닌가하여 괜한 말을 꺼낸 입을 원망했다. 나까지 표정을 굳히고 설명을 듣고 있었더니 의사가 잠시 설명을 멈추며 정원이에게 물었다.

“혹시 잠시 휴식이 필요하신가요? 두 분 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그러자 정원이가 옆에 있던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내 옆구리를 방금처럼 툭 하고 쳤다. 어느새 정원이의 얼굴은 조금 풀려있었다. 그러더니 정원이는 의사를 마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계속 설명해주세요.”

정원이는 시원할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내가 오히려 순간적으로 얼이 빠질 정도였다. 의사는 그런 정원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강하시군요.”

그리고는 설명이 이어졌다. 정원이는 유전자적으로 완벽히 여성이며 이번에 검사한 결과로 유전자가 변이된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에 다시 돌아가거나 그런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는 점, 일단은 추가적인 실험을 머리카락이나 피를 통해 해 볼 생각이라는 점, 일단 건강상으론 큰 문제가 없다는 점 등등을 설명했다.

정원이는 설명을 가만히 듣다가 내 얼굴을 빼꼼 바라봤다. 의사는 그런 정원이를 보며 질문이 있으시냐고 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정원이는 조금 얼굴이 빨개져서는 의사에게 질문했다.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고 신체상으로 완벽하게 여자애라는 건 혹시 이,임신이나 이런 것도 다 된단 소린가요?”

“생리하셨죠?”

의사의 질문에 정원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왠지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 와서 나가기도 애매하여 뻘쭘하게 앉아있었다. 눈치 빠른 의사와 달리 나는 눈치가 퍽이나 없는 새끼였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가시방석이 위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의사는 정원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보며 말했다.

“다정원씨의 사례가 처음 있는 사례이기에 완벽하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으나, 적어도 지금 상태에선 임신도 가능하리라고 판단되네요.”

“그, 그런……가요.”

정원이는 탄식을 내뱉듯이 대답을 했다. 정원이는 제 스스로 무언가를 체념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사실이 정원이의 안에서 무언가를 변하게 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눈치 챘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정원이가 스스로 납득한 무엇인가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는 그 후로 몇 가지의 설명을 더 들었으나 딱히 이전의 검사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 우리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러자 사내가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오늘 일정은 더 없습니다. 가셔도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동안 정원이는 자리에 앉아서 골똘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피곤해 보이기만 했지만, 확실히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10분 남짓 고민을 하던 정원이가 내게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의도를 알 수 없어 나는 정원이에게 물었다.

“어쩌라고?”

“잡아서 일으켜 달라고. 피 뽑아서 일어서기 빡세니까.”

“오냐.”

내가 손을 잡고 끌자 정원이가 의자에서 힘차게 일어섰다. 그러더니 조금 비틀거리기에 받쳐줬더니 땡큐라고 작게 말하며 순순히 몸을 기대왔다. 정원이의 얼굴은 평온했다. 방금까지 고민을 하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정원이는 잠시 내 부축을 받으며 걷다가 곧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아, 일어나려는데 좀 어지럽잖아. 오랜만에 피 뽑아서 그런가? 무튼 땡큐.”

“어.”

“그리고 밥이나 먹으러가자. 검사한다고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다야.”

“오냐, 뭐 먹을래?”

정원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선짓국이지. 피 뽑아서 머리 아프다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핸드폰으로 근처에 있는 선짓국을 파는 음식점을 대충 검색을 해보니 10분 거리에 국밥집이 있었다. 평가는 그럭저럭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는 애를 데리고 멀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착은 금방이었다. 우리는 메뉴도 보지 않고 바로 선짓국을 두 개 시켰다. 선짓국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차에 정원이가 반찬을 몇 개 집어먹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 아버님 함 뵈러 가야 되는데.”

“엉? 아버지는 왜?”

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반응하자 오히려 정원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무슨 일 하는지 내가 들은 게 있기나 하냐? 언제 회사로 가야 할지도 못 들었잖아.”

“아.”

나는 들었지만 정원이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 들어 알게 된 것인데 나는 꽤나 빈번하게 전해야 할 말을 까먹고는 했다.

“너 인포 갈 거래.”

“인포?”

“인포메이션. 그 왜 회사 메인에 앉아서 사람 안내하는 역할 있잖아.”

“무어어어어?”

정원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먹던 젓가락으로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야, 인포라니, 내가 인포라니?”

“아니 진정 좀 해봐라.”

“아니 진정하게 생겼냐?”

정원이는 자신이 인포메이션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었다. 사교성이 부족한 정원이에겐 쥐약 같은 일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썩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나 역시도 아버지께 처음 들었을 때 걱정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납득시켰던 최고의 이유를 정원이에게 전했다.

“원래 구인하려던 자리가 거기였대.”

“흐어아어으.”

정원이는 김빠진 소리를 냈다. 동시에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흐느적거리며 책상위에 엎드렸다. 그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었더니 정원이가 그에 맞춰 나를 노려봤다.

“웃냐? 웃어?”

“아니, 지금 니 모습이 웃겨서.”

“아, 어쩌지, 어쩌지?”

정원이는 진심으로 자신이 인포메이션 자리에 가야하는 사태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 일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던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으며, 추가로 정원이가 잘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패닉에 빠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정원이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편이……, 장난이야. 그렇게 째려보지 마.”

정원이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정원이가 책임감 없이 일을 내려놨을 경우에 아버지가 기껏 신경써준 면이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초리가 사나워졌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원이 역시 진심이 아니라 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나는 눈매를 다시 신경 쓰며 풀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에이, 뭘 이상한 거로 신경 쓰고 앉았냐.”

정원이는 내가 사과를 하자 오히려 손 사레를 털었다. 그러는 동안 선짓국이 나왔다. 소주가 굉장히 땡기는 메뉴였지만 오늘은 시키지 않았다. 내가 마시는 것을 보면 정원이도 마시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정원이는 선짓국을 이제는 조금 익숙하게 먹고 있었다. 별로 흘리지도 않았고 덩어리를 작게 잘 잘라서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다 흘리면서 쳐먹는 건 아닌 걸 보니 자기 나름대로 적응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이가 단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입맛이 변한 셈이었는데, 이런 비린 음식은 또 용케 잘 먹는구나 싶었다. 국밥 같은 거야 옛날에야 좋아했었지만 여자들은 그렇게까진 좋아하지 않지 않나? 하지만 정원이가 잘 먹는 모습을 보자니 그런 것도 내 편견일지도 몰랐다. 아니 편견이리라 싶었다.

수저를 부지런히 놀리다가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나는 아까 정원이가 기겁해서 끊겼던 말을 이어서 했다.

“국정원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그 때까지 시간은 달라고 했었거든. 그러니까 뭐, 아버지 볼 거면 내일, 아니다. 오늘 너 피 뽑아서 내일도 컨디션 별로일 테니까 모레 같이 물어보자.”

“너희 아버님이라, 아니지. 부사장님이라고 해야 하나?”

“이사라시던데.”

“그럼 이사님이라고 불러야겠네. 근데 너는 뭐하냐?”

“인사과 간다던데.”

“인사과? 그거 원래 생초짜들 뽑았었나?”

“아버지 일 물려받게 회사일 전체적으로 좀 배우라더라.”

“오올, 부르주아지.”

정원이와 나는 그렇게 식사를 하며 입사에 관련된 얘기를 했다. 정원이는 궁금한 것에 대해 이것저것 내게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라고 한들 아는 게 거의 없는 건 마찬가지라 대답이야 뻔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인포메이션에선 정확히 뭐한대?”

“몰라.”

“우리 회사 언제부터 간대?”

“몰라.”

“너는 아는 게 뭐냐, 대체?”

“몰라.”

우리는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다음에 만나는 건 우리 집에서 이틀 뒤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는 우리는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아버지에게 모레 저녁 시간 좀 비워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작품후기]2부 프롤로그는 여기까지인 셈입니다. 정원이도 멘탈이 단단해져서 이 정도론 별로 흔들리지도 않네요. 좋다, 많이 힘내라 다정원!

참고로 정원이가 저번 막간에서 부른 씹덕 노래는 요루시카의 말해줘입니다. 귀여운 노래를 생각하니까 그게 먼저 생각나더라구요.

오늘도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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