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회
chapter2국정원에서 정원이를 언제 찾아올지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께 미리 말씀을 드렸다. 물론 국정원에서 정원이를 찾아온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원이 개인사정 때문에 혹시라도 사정을 봐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원래 채용기간을 생각해보면 2주 뒤까진 괜찮겠구나.”
나는 일단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바로 말씀을 드리겠노라 약속했다. 그러고 나니 나와 정원이가 입사를 하게 됐는데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음이 문을 두드리고 찾아오자 부끄럼은 덤으로 따라왔다. 입사를 수동적으로 했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까지 수동적이어선 안됐다. 아버지께 묻자 이 역시 흔쾌히 답해주셨다.
“너는 인사과에 들어갈 거고, 그 아이는 인포로 가게 될 거다.”
“인사과랑 인포요?”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도 단번에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문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아예 초짜인 내가 인사과에 들어가는 것도, 정원이가 인포메이션에 들어가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꺼낸 한마디에 모든 것이 정리가 됐다.
“원래 구하려던 자리가 그 두 자리였다.”
“그렇군요.”
원래 구인을 하던 자리가 그 두 자리여서야 우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차라리 우리가 둘 다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보통 인포는 여성을 위주로 뽑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사과를 들어가는 거야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자리를 가든 나에겐 다 생소한 일일테니까. 문제는 정원이였다.
인포메이션 자리에 서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교적인 능력을 필요로 할 게 틀림없었다.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정원이에겐 가장 힘든 업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정원이를 인사과로 보내자니 인사과 역시 사람을 다루는 자리였다. 진퇴양난이었다.
“너는 어차피 내 자리를 이어야 되니 이 자리 저 자리를 전전하게 될 거야. 이번엔 기본 업무와 사람관리 어떻게 하는지를 중점으로 배우고 와라.”
“부사장 자리 물려주시게요?”
“뭔 부사장이야. 요즘엔 이사라고 부른다, 이사라고.”
그리고는 아버지는 명함을 꺼내셨다. 한상호 이사. 내가 막연하게 짐작하던 것들은 이렇게나 틀린 점이 많았다. 나는 명함을 받아 지갑에 넣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넘겨준 이 가벼운 명함이 얼마나 무거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렴풋하게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은 나였다. 나는 그 권리와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딱히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 일단은 저랑 정원이가 아버지가 뒤를 봐주신다는 걸 안 들켰으면 좋겠어요.”
“왜?”
“저는 아예 처음부터 겪어보고 싶어서요. 정원이도 부담스러워 할 것 같고.”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대견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다.
“좋다. 대신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선 내가 자신의 휘광을 통해 호가호위하는 것도, 그림자에 가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다. 그래서 그런 나의 행보를 흡족해하시는 듯 했다. 누구에게나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라도 기성세대가 사회 초년생에게 바라는 것은 적당한 눈치와 패기라고 생각했다.
“아, 그래도 사장은 알거다. 채용하는 과정상 그 친구는 당연히 알게 되거든.”
“네, 뭐, 그건 당연하죠.”
“물론 그 친구에게도 내색하지 말라고 언급해두마.”
“감사합니다.”
사실 아버지가 뒤를 봐주지 않기를 바란 것은 패기도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도 아니었다. 단지 내 자존심이, 내 자존감이 호랑이를 업은 여우의 꼴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낙하산을 타고 착륙하여 사회의 첫걸음을 딛기 시작한 나의 작은 반항이자 비참한 자존감의 발현이었다.
나는 그것을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꾹꾹 눌러 담았다. 아버지조차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비참한 쓴 맛을 씹어가며 나는 그저 웃고 있었다.
***
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한지 3일이 지났다. 나는 자연스럽게 정원이네 집에 있었다. 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딱히 할 게 없어서 나와 보니 갈 곳을 잃고 어영부영 도착한 것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초가을에 뒤늦게 도착한 장마전선은 사람을 조금은 쳐지게 만들었으며, 또한 장마가 끝나고 난 뒤에 반드시 조금 쌀쌀해지리라는 예상을 하게 만들었다. 국정원에서 사람이 나온 건 그런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똑똑
“네, 누구세요?”
“국정원에서 왔습니다.”
들려오는 어조가 굉장히 평온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르고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지 다크서클이 늘어진 40대 남성이 서있었다. 누구도 그를 보고 국정원에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차라리 보험을 팔러 왔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아니, 국정원에서 일한다는 것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기에 보험팔이를 언급한 것이지, 저런 인상을 하고 있었다간 당연히 문전박대를 당했을 것이다. 그래, 비가 내리는 지금의 날씨와 너무도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덕분에 나도 정원이도 정하도 말을 잇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가만히 서있자 사내는 알아서 문을 조금 더 열고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를 처음 보시는 분들은 다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해서 이해는 합니다.”
“아,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정하가 빠르게 인사를 하며 맞이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상을 펼쳤고, 정원이는 마실 것을 내왔다. 정원이가 내온 것은 맥심 커피였다. 피곤함 그 자체를 쓰고 있는 듯한 사내를 보며 누구나 떠올릴 법한 선택지였다. 사내는 그런 선택조차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말했다. 웃음조차 사람을 늘어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 역시 자주 나오는 반응이군요. 하하.”
“앗, 혹시 커피 싫어하시나요?”
“아니요. 정말로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이젠 이미 습관이죠. 아마 혈관에 맥심이 흐르고 있을 겁니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국정원 직원의 모습에 대해 내가 예상한 것은 우람한 근육, 선글라스, 다부진 인상의 남성이 제식을 맞추듯이 척척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절대로 이런 툭치면 쓰러질 것 같은 아저씨를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정원이가 앉아있는 쪽으로 손가락을 향했다가 조금 내려 상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다정원씨일테고, 옆에 분은 다정하씨일테고, 그런데 반대쪽에 계신 남성분은 누구십니까?”
“저는 한강휘라고 합…….”
그 순간 부드럽게 손목이 잡혔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잡혀 있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어울렸다. 순간 숨을 삼켰다. 앞에 있는 사내의 분위기가 변해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내는 나를 제압하고 있었다. 딱히 나를 위협하려는 의도도 없이, 강압적인 물리적 시위도 없이 단지 조금 분위기가 변해서 내 손목을 짚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사람 맞습니까?”
“어, 네, 네! 맞아요! 얘는 이미 다 아는 애에요!”
정원이가 화들짝 놀래며 내 손목을 짚은 남자의 손을 떼냈다. 아무리 힘을 줘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손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그제서야 숨을 다시 내쉴 수 있었다. 사내는 어느새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괜한 짓을 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나와 사내가 서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사내가 종이를 한 장 꺼내며 탁자에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치 전자기기 사용설명서를 읽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뭐 별 건 없습니다. 그냥 한 달에 한 번 정기검진 하듯이 검사에 응하시면 되고, 담당 주치의도 생길 겁니다. 몸에 이상 생기시면 한 달이 아니라 그 때 바로 찾으셔도 됩니다. 그게 답니다.”
설명은 그게 다였다. 맥이 풀릴 정도로 짧은 설명이었다. 사내가 내민 종이엔 그보다는 좀 더 많은 정보가 담겨있었다. 얼핏 봐도 10장은 넘어 보이니 당연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정원이는 종이에 있는 글을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한참을 읽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바로 내게 넘겨 버렸다.
“야, 너도 읽어봐.”
“왜?”
“이런 건 니가 더 잘 보잖아.”
한 소리 하려다가 어차피 나도 읽어보고 싶었기에 종이를 들어 살펴봤다. 서류를 읽어보자 방금 설명한 내용이 핵심이었다. 일부러 짧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핵심만 짚어서 설명한 것이었구나.
좀 더 자세히 읽어보자니 보수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보수가 나오는 이유는 다정원에게서 혈액과 머리카락등 DNA를 채취해서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 라는 것, 다정원이 거절할 시 일절 사용하지 않을 것, 사용결과 유용한 이득이 창출될 경우 다정원에게 얼마의 보수 제공할 것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었다.
나는 모든 서류를 다 읽어보고는 정원이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보수에 대한 것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정원이에게 말했다.
“그냥 검진만 받아도 된다는데.”
“뭐가?”
“너한테 과도할 정도로 좋게 쓰여 있어. 검진만 받아도 되고. 여기, 니 DNA데이터로 실험해보고 싶은데 니가 거절하면 그것조차 안하시겠단다. 여기는 그 외 보수에 관련된 얘기고.”
“그래?”
정원이의 반문에 사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예. 솔직히 다정원씨는 전 세계에서 처음 발생한 그,”
사내가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곤란을 빠르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처음에 정원이를 봤을 때의 모습이었다. 정원이 역시 나 때문에 익숙해진 건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완벽한 성전환? ts? 뭐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어요.”
“네, 그럼 완벽하게 성전환을 하신 첫 번째 케이스입니다. 유일무이한 사례이기에 국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에 계약이 다정원씨에게 아무리 유리하게 적혀있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제가 싫다고 해도요?”
“그럼 조금 귀찮아지시겠죠. 아, 구속한다거나 잡혀간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새터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저희 쪽에서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정원이가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맘대로 해. 네 일이야. 정원이가 한숨을 내쉬며 내 팔을 가볍게 때렸다. 나쁜 새끼. 정원이는 홀로 고민하더니 결국 뜻을 정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도 제가 무슨 상탠지 제대로 모르겠으니까 한 번씩 검진하는 거로 하죠, 뭐. DNA데이터는 인륜에 반하는 행위만 아니면 됐고.”
“좋습니다. 잘 됐군요.”
앞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피곤이 조금 가셔보였다. 일견 다크서클이 조금 줄어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후련한 미소였다. 사내는 계약서를 넘기며 말했다.
“검진은 내일이나 모레 중 언제가 편하십니까?”
“어, 그럼 내일로요.”
“그럼 내일 xx병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싸인 부탁드립니다.”
“어, 네.”
“잠깐만.”
나는 싸인을 하려던 정원이를 잠시 막고는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련 실험할 때 마다 정원이한테 정보 제공하셔야 됩니다. 계약서에 그게 안 적혀 있던 것 같은데요.”
“아, 그렇군요. 저희 쪽의 불찰입니다. 그럼 그것도 계약서에 포함시켜서 다음 번 검진 때 뵙겠습니다.”
사내는 정원이에게 계약서를 넘기며 싸인은 다음번에 받겠다며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나는 혹시나 사내가 마티즈를 끌고 다니나 싶어 문 밖을 바라봤지만 사내의 차는 흰색 세단이었다. 무엇하나 관념적으로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맞는 것이 없었다. 사내가 떠나자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쉬자 거짓말처럼 정원이도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뭐냐?”
“너야 말로.”
우리는 서로를 째려보다가 곧 웃었다. 동시에 말한 것도 그래서 서로 기분 나빠하는 것도 실없이 웃겼다. 정원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어,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야, 따라하지 마.”
“뜨르흐즈 므.”
“이놈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같아서 갑작스럽게 장난기가 돌아 따라하자 정원이가 결국 내 등을 퍽퍽 때렸다. 나는 그런 정원이의 팔을 잡으며 실실 쪼갰다. 정원이는 더 약이 올라서 힘을 주며 나를 때리려고 했고, 나는 적당히 맞아주며 적당히 막으면서 정원이의 화가 풀릴 때까지 그렇게 놀았다. 그렇게 방금 전까지 느끼던 감정을 털어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내였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음에도 금방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모습이 그런 위화감을 더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그 사내에 대한 신뢰를 더하고 있다는 점이 무섭고도 우스웠다. 바깥에선 사내를 닮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작품후기]2장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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