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36화 (36/138)

36회

chapter1정원이는 그 후로 레몬사와를 한 병 더 시켜 먹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원래 같았으면 미리 알고 좀 자제를 시켰을 텐데, 우리 둘 모두 부끄럼에 취해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있었기에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결국 알아챈 건 정원이의 혀가 꼬이기 시작한 이후였다.

“강히야, 한 잔 더 죠바라.”

“그만 마셔라. 이미 취했다.”

“안 취해셔! 나능 안 취해따고!”

나는 한숨을 내쉬고 점원에게 카드를 넘겨 계산을 했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않으려는 정원이의 손을 붙잡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정원이가 의자에 드러누워서는 버둥거렸다.

“안 취해셔, 앙 취해스니가 쫌만 더 먹자. 응?”

“여기 영업 끝났댄다.”

“아 구래? 구럼 어쩔 슈 업찌.”

정원이가 헤롱거리며 비틀거리는 꼴을 차마 볼 수만은 없어 나는 결국 정원이를 부축했다. 그러나 이제 키 차이가 너무 나서 내가 정원이를 부축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얼굴을 짚으며 물었다.

“업힐래?”

“냬가 왜? 앙 취해따니까?”

“어, 너 안 취했는데, 내가 여자 한 번 업어보고 싶어서 그런다.”

“그러타면 어쩔 슈 업지!”

그러고는 정원이는 내게 순순히 업혔다. 솔직히 여자애가 아니라 술 취한 아저씨를 다루는 기분이었다. 정원이를 업자 정원이는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부드러운 감각이 오롯이 내 등에 완전히 기대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잠시 몸이 굳었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오히려 별 거 아닌 듯이 정원이를 업었다. 그러자 정원이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구래. 강히 니가 언제 여쟈를 어버보겐냐. 나니까 업혀쥬지.”

“에휴, 시발. 그래. 그러려니 한다, 내가.”

내가 한숨을 내쉬며 대충 답하자 정원이는 내 대답이 불만스러웠는지 몸을 흔들어 댔다. 안 그래도 원피스를 입어서 조심스럽게 업고 있는 판에 버둥거리는 녀석을 업고 있자니 짜증이 조금 몰려올 것 같았지만 어차피 취한 새끼한테 짜증을 내봐야 하등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밝은 목소리로 정원이에게 말했다.

“아, 기분 좋다. 그래, 내가 언제 여자애를 업어 보겠냐. 다정원님이 최고십니다.”

“구치? 헤헤.”

정원이는 바보처럼 쪼개며 고개를 내 어깨에 파묻었다. 드디어 쳐 자나 싶어 안심하던 차에 정원이가 내 어깨에 대고 웅얼거렸다.

“야, 강히야.”

“왜?”

“솔찌키 냐 아직 화나따.”

“뭐가?”

정원이는 그러고 잠시 동안 닥치고 있다가 계속 웅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도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내겐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메세지였다.

“너눈 다 이해해줄 쭐 아라딴 마리야.”

“아, 그 때 화난 거?”

“엉.”

“그걸 내가 어떻게 다 아냐. 말해줘야 알지.”

“구렁가?”

정원이는 내 대답을 듣고 한동안 끙끙거렸다. 취한 놈이 아무리 고민해봐야 자신의 물음에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정원이가 고개를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구럼 아프로 힘둘면 마랄 테니까.

……너마는 나룰 아라 조야 대. 아라써?”

“……알았어.”

내가 답하자 정원이는 그제서야 히히거리며 기분 좋게 웃다가 대가리를 내 어깨에 다시 들이받았다. 색색거리며 차분하게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 뻗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정원이를 택시로 태워 보낼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어차피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있었다. 별 일이야 일어나지도 않을 테고 오해가 예상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내 방에 정원이를 던져놓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자면 되겠지 싶었다. 솔직히 택시를 태워 보내는 것조차 걱정될 정도로 뻗어있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에휴, 병신.”

그렇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웬일로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인공위성이 빛나는 밤이었다. 마냥 어둡기만 했던 밤이 끝나고 난 이후에 우리가 서로의 인공위성을 더듬던 밤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건 그랬었구나 하며 서로를 이해하며 시시덕거렸다. 나는 내 감정을 최대한 내비치려고 했고 정원이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내 안에서 정원이를 향한 동정심이 커져가는 것을 느낀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수확이었다. 수확이라고 하기에도 우스웠다. 이런 감정은 우리가 대등한 관계를 맺는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끝끝내 덜어내지 못했다. 그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정원이를 데리고 왔더니 누나 홀로 깨어있었다. 내가 정원이를 업은 채로 내 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누나가 대뜸 내 방문을 몸으로 막길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좀 비켜. 이 새끼 좀 던져놓고 나오게.”

“누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거니. 그럴 줄 알고 서있는 거야. 얘, 일어나야지. 화장 안지우고 자면 내일 후회해요.”

“으으응, 으응.”

누나가 정원이의 얼굴을 흔들어 깨웠지만 정원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원이의 원래 술버릇이 자는 것이니 만큼 정원이는 한 번 자면 일어나지를 않았다. 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문에서 비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방문을 열어 정원이를 침대에 눕히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누나가 들어왔다. 누나의 손엔 옷가지와 화장솜이 들려있었다.

“도저히 떡이 되서 일어날 구석이 안 보이니까 임시조치라도 해놔야지. 어머? 얘 화장 엄청 얇게 했네.”

누나가 정원이 얼굴을 닦으며 말하기에 나는 방을 나왔다. 아마 옷가지도 손에 들려있던걸 보니 옷을 갈아입히려는 것이겠지. 내가 있을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방에서 나와 대충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왔더니 누나가 방문을 닫고 나오고 있었다. 하여간에 누나도 누구 챙기기를 퍽이나 좋아했다. 내가 소파에 누우려고 앉았더니 누나가 그 옆에 앉았다. 내가 눈을 찡그리자 누나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금방 자게 해줄 거야. 몇 가지만 물어보고. 혹시 쟤에 대한 거 말 안한 거 있니?”

“없는데?”

“그래? 그럼 뭐 켕기는 거 없단 소리지?”

“어.”

“근데 왜 뭔가 있는 거 같지. 뭐 그건 됐고.”

나는 조금 놀랐다. 누나가 촉이 좋은 거야 알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납득할만하게 설명을 했는데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숨긴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누나는 혼자 잠시 고민하더니 우리가 숨기는 것이야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다른 화제를 던졌다.

“쟤네 부모님도 다시 봬야 한다며?”

“어.”

“쟤랑 싸운 건 숨길 거고?”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대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원래 정원이에게 말할 얘기였다. 생각보다 정원이가 빨리 꼴아서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나는 정원이를 피했었고 문제가 운 좋게 해결이 되긴 했지만 그 점에 대해서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했다. 어떻게 보면 혼나고 싶었다는 것에 더 가까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다 밝히게.”

“그래서 쟤가 내려가더라도?”

“그건 막아야지. 어차피 채용도 됐잖아?”

내가 가볍게 말하자 누나는 나를 빤히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하여간에 고집 세다니까. 그냥 잘 넘겨도 되고 그게 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알아.”

“그래, 어련히 잘 알겠지. 잘 자렴.”

“어, 누나도 잘 자.”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고 갔다. 나는 그런 누나를 보다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여간에 남 챙기고 걱정 많은 건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이유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육 효과일지도 몰랐고, 이 집안 특유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뒤척이다 결국 잠이 들 수 있었다.

***

정원이네 부모님이 올라오시기 전 며칠 동안 나는 정원이와 함께 성규를 안심시키고 정하에게 가서 싹싹 빌었다. 왠지 정원이네 부모님이 올라오시기 전 베타테스트를 하는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가볍게 넘길만한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정하는 그야말로 야차처럼 화를 냈지만 결국은 용서해줬다. 마치 내가 죽일 수는 없으니 살려는 놓는다는 태도에 나도 정원이도 정하의 비위를 맞추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정하의 비위를 맞추면서 며칠이 지나고 오늘은 정원이네 부모님이 다시 올라오시는 날이었다. 나도 정원이도 나름대로 차려입고 정원이네 집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원이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은 언제 시작해?”

“어, 일주일 뒤에? 원래 채용 공고가 이번 주에 나가서 일주일 쯤 뒤에 뽑을 생각이었다고 하네.”

“음, 그럼 일주일간은 팍팍 놀아야겠네.”

“지금까진 안 놀았고?”

“양심 없냐? 진짜.”

우리는 서로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그 때 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원이와 정하가 문을 열고 나가니 정원이네 부모님들이 서있었다.

“완나?”

“어, 왔다.”

“안녕하십니까.”

“어, 너도 오랜만이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정하가 책상과 차를 타오는 모습까지 그때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운을 먼저 뗀 건 정원이네 아버지셨다.

“그래, 결국 직장 구했다고?”

“어. 구했다 안카드나.”

“그나. 수고했네.”

정원이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하자 정원이네 아버지께서도 의외로 기분 좋게 웃고 계셨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서로 닮은 웃음이었다. 정원이네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셨다.

“강휘 니도 수고 많았다.”

“아, 그거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야, 너 설마.”

정원이가 나를 불안한 듯이 올려봤다. 생각해보니 정원이에게 우리가 싸우고 내가 잠수탔다는 말을 부모님께 전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날 이후로도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운을 띄워놓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정원이네 아버지께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사실 정원이와 다투고 이 일에 대해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을 구한 것도 운이 좋게 구한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글나?”

의외의 반응이었다. 정원이네 아버지께서는 너무도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고개를 들고 있지 않자 고개를 들라고까지 말씀하셔서 내가 고개를 들자 정원이네 아버지는 정말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시는 얼굴이었다. 내가 계속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오히려 정원이네 아버지께서 의문에 찬 얼굴을 하셨다.

“뭐, 우야라고.”

“아니, 그. 싸우고 나서 제가 정원이를 무시하다시피 내버려뒀습니다만.”

“아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정원이네 아버지께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처음엔 당황하던 정원이도 덩달아 그런가 보다하고 신경을 끄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결론이 좋게 나서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건가 싶으면서도, 조금은 혼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한 건 그 이후의 말이었다.

“아, 그래. 정원이 니 어차피 여서 지내야 된다. 이제 국정원에서 너 찾아올끼다.”

“뭐라카노?”

“니 몸 바뀐 거 우에서 알아부려가 좀 알아보고 싶다카드라. 내가 우얘 막겠노.”

“어엉?”

오늘은 예상과는 벗어난 일들이 퍽이나 많이 일어났다. 맥이 빠져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러고 보면 정원이네 부모님께 정원이의 신체나 정원이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것 역시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는 일이었다. 마치 이게 세상의 순리에 맞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들이 묘하게 거슬리게 느껴지는 이유는 왤까. 분명히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내 의도와는 상관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런 역설적인 감정을 느끼며 묘한 탈력감을 만끽하고 있었다.[작품후기]1부 끝. 원래 짰던 것과 이래저래 차이도 좀 생겼지만 하여간에 이래저래 1부 끝입니다.

항상 부족한 글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날려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이후 공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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